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211003)지혜와 결단을 심어야(삼하 20장 14-26절)

청명하늘 2021. 10. 3. 14:04

지혜와 결단을 심어야

 

성경: 사무엘하 2014-26(498)

찬송: 419(주 날개 밑 내가), 330(어둔 밤 쉬 되리니)

설교: 20211003.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며칠 전에 한 대학교의 총여학생회가 해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우리나라 정부 부처에도 가족남성부는 없는데 가족여성부는 있습니다. 이와 같은 구조로, 대학교에서 학생들 전체를 대표하는 기구를 총학생회라 하는데, 이 밑에 여학생만을 대표하는 기구로서 총여학생회가 있습니다. 이 대학의 총여학생회가 해산된 이유가 화제에 오른 이유는, 그 동안 여성주의, 여권주의의 기반이 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남성 중심의 사회였습니다. 물론, 여성 중심의 사회도 있었지만, 아주 특이한 경우로 여겨질 만큼, 남성이 사회 중심에서 활동했습니다. 지금도 여성 최초라는 말로 화제에 오르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남성 중심 사회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바꿔 보면, 여성은 그만큼 기회와 보답이 적었고, 이로 인해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여성주의, 여권주의는 바로 이를 바로 잡으려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합당한 대우와 기회를 받지 못 했으니, 이제라도 여성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고, 남녀가 동등하게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어렸을 적 어른들의 모습을 보면, 남성에 비해 여성은 현저히 낮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유교의 영향 때문인지, ‘가족을 대표하는 남자 어른이라는 가부장이라는 말이 많이 쓰였습니다. 아버지는 가정의 어른이라며, 좋은 밥과 반찬을 가장 먼저 받는 일을 당연하게 여겨졌습니다. 어머니는 본인이 직접 밥상을 준비함에도 불구하고, 부모나 남편, 자녀까지 식사한 후에 홀로 밥을 먹어야 하는 일도 많이 보였습니다. 가정에서 남편은 자유롭게, 또 가장 큰소리로 말할 수 있었지만,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이상한 말이 당연시될 정도로, 아내는 의견을 쉽게 낼 수 없었습니다.

 

이런 점을 보면, 편중되고 잘못된 관습을 바로잡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동안 받지 못 한 동안 기회를 되찾아, 남녀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과 주장은 좋아 보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만들어 내는 대부분이 그러하듯, 여성주의, 여권주의도 도에 지나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성의 낮은 권리와 인격을 높여, 평등하게 만들겠다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무조건 여성이 먼저라 주장합니다. 성별을 구분하지 않고, 동등한 권리를 누리게 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여성이 남성보다 더 많이 누리고, 더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더불어, 여성의 권리를 높이려는 목적에 집중하느라, 오히려 여성은 무조건 피해자라 여기며 옹호하고, 남성은 무조건 가해자라며 비난을 쏟아냅니다. 실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번에 총여학생회를 없앴다고 하는 대학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한 무속인이 그 대학의 유명한 교수가 자신을 성폭행했다고 신고했습니다. 교수는 이를 부인했습니다. 죄가 의심되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경찰의 조사와 법원의 판결이 있을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하는 원칙이 있습니다. 얼마든지 거짓으로 신고하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때 이 학교의 여총학생회가 나서서, 언론에 공개하며, 교수를 직위해제하도록 압박했습니다. 학교도 처음엔 조사와 재판을 보고 결정하겠다며 유보했는데, 총여학생회가 워낙 거세가 요구하자 어쩔 수 없이 이 교수를 직위해제했습니다.

 

그런데 조사 결과 모두 무속인이 꾸며 신고한 사건이었습니다. 교수는 처벌을 받을 일을 하지 않았는데, 총여학생회의 압박 때문에 불명예스럽게 학교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죄로 결과가 나왔지만, 뉴스로 수없이 보도되어, 명예가 이미 땅에 떨어졌는데 회복되었겠습니까?

 

이런 모습은 여성 운동을 펼치는 사람들에게서 많이 보입니다. 그 동안 계속되어 온 불균형을 바로 잡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여성은 무조건 옳다고 보고, 남성이 정당한 절차와 수고로 얻은 결과마저 무시하는 지경까지 이릅니다. 불평등을 없애고자 하는 노력이 또 다른 불평등을 방관하며 만들어 내는 과오를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을 보면, 이들의 생각과 노력은 평등이 아니라 욕심을 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여성의 권리를 높이려다, 오히려 남성의 권리를 낮추는 또 다른 불평등을 만들어 내는 이유는, 이들이 능력과 보상에 대한 기준을 잘못 세웠기 때문입니다. 남녀가 평등하다는 뜻은,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반대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특별한 차별이나 대우를 받지 않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하나님은, 남녀가 구별해야 하는 역할이 있다는 점을 말씀하셨지, 능력마저 차이가 난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남자를 여자보다 위에 두시지 않았고, 여자를 남자 위에 두시지도 않았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협력하고 조화를 이루어야만, 비로소 온전해지는 존재입니다. 남자라고 언제나 능력과 업적이 대단하지도 않고, 반대로, 여자라고 더 높이 인정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시지도 않았습니다. 남녀의 구분이 중요하지 않고,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사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는 오늘 본문에서 확인되는 내용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정리하고, 돌아오는 중에, 세바라는 사람이 또 다른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죄와 반역의 씨앗이 많은 백성들 속에 뿌려져 있으니, 이를 빨리 제거하지 못 하면, 점차 더 확대될 수밖에 없고, 피해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부하를 보냈는데, 엉뚱하게 요압이 시기심에 눈이 멀어 군대장관을 살해하는 과정이 본문 앞 내용입니다.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자, 세바는 많은 사람들을 모아 아벨 성읍에 들어갔습니다. 다윗이 보낸 군사들이 와서 성읍을 공격하기 위해 준비합니다. 싸움이 시작되면, 아군과 적군이 쉽게 구별되지 않으니, 세바를 따르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도 다치고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한 여인이 등장하는데,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별다른 지위나 신분이 아닌, 말 그대로 평범해서, 기록이 남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이 여인의 지혜와 용기를 통해, 그 누구도 해내지 못 한 일을 해냅니다.

 

이 여인이 나서서, 아벨 지역은 이스라엘에서도 지혜로 인정받는 곳이라며 항의합니다. 요압은 아벨 지역을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역을 일으킨 세바를 처리하려는 목적뿐이라 하면서, 세바만 넘겨주면 공격하지 않고 돌아가겠다고 답합니다. 이 여성이 지역 사람들을 설득해서, 세바를 죽여 다윗의 군대에게 넘겨주었고, 목적한 바를 이룬 다윗의 군대도 돌아가서, 아벨 성읍이 안전하게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바꿔 생각해 보면, 이 여성의 지혜와 결단이 없었다면,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벼룩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말처럼, 세바라는 반역 주동자 한 사람을 잡으려다, 아벨 성읍 전체를 무너뜨리고,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비극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성읍 전체를 살리고, 다윗의 왕권마저 지켜낸 지혜와 행동을 누가 해냈습니까? 여성이고, 그것도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은 여성입니다.

 

성읍 안에는,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본래 거주하던 사람도 있었고,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던 곳이고, 세바가 이끄는 반역 세력까지 더해졌습니다. 평상시보다 훨씬 규모가 커졌습니다. 당연히 절반에 가까운 사람은 남성이고, 절반에 가까운 사람은 여성입니다. 권력과 돈이 넉넉한 사람도 있고, 지혜가 뛰어난 사람도 있었습니다. 경험이 많은 노인도 있고, 혈기왕성한 청년들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서, 이 성읍을 지켜내고, 수많은 생명을 살린 사람은 여성이었지만, 그렇다고 이유가 여성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이 여인 이외에도 그곳엔 수많은 여성이 있었고, 이 여성 외에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보면, 대단한 지혜와 결단으로 백성들의 생명을 지키고, 성읍을 온전하게 유지할 수 있던 이유는 한 여인의 특별한 지혜와 결단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대단한 일을 해낸 사람이었음에도, 성경에서 그 이름조차 기록하지 않은 까닭을 알 수 있습니다. 이름이 기록되고, 조상이 누구인지를 기록하면, 우리는 본문을 통해 가문이라는 조건을 먼저 기억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여인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고, 오직 그 용기와 결과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성별이나 가문 등, 그 어떤 조건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게 아니라, 지혜롭게 판단하고, 과감하게 행동하는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짐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23절부터 새로 임명된 다윗의 관리들이 기록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의 군대장관에 요압이 임명되었고, 사독과 아비아달은 제사장이 되었고, 그 외에 각 부처를 맡은 여러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사람들은 주요 관직에 올랐다는 공통점만이 아니라, 모두 남성이라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왕인 다윗의 명령에 따라 관직을 얻었으니, 왕으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았다는 뜻입니다. 왕이 인정할 정도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역시 인정받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요즘 관점에서 보면, 출세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동안 주요 관직에 오른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을 텐데, 성경에 기록되어, 수천 년 동안 기억되게 할 정도면, 이만한 명예도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다윗으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관직에 임명된 이들을 기록하면서도, 위기에 빠진 아벨 성읍을 지켜낸 용감한 여인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다는 점이 좀 의아합니다.

 

성읍 전체를 지켜낸 여인의 업적이 큽니까? 아니면 관직에 오른 사람들의 업적이 큽니까? 관직에 오른 사람들의 업적이 상세하게 기록되지 않았지만, 아무리 큰일을 해냈다 하더라도, 성읍 안 사람들을 지켜낸 여인의 업적만 하겠습니까? 상을 주어도, 성읍을 지켜낸 여인이 수십, 수백 배 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여인이 특별한 보상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고, 오히려 공로가 적은 사람들이 더 큰 상을 받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칭찬하시고, 상을 내리시는 기준과, 세상이 칭찬하고 상을 주는 기준이 다름을 먼저 알려줍니다. 세상이 주는 상은, 여러 조건을 내세웁니다. 훨씬 크고 중요한 일을 해냈어도, 자신들이 내세우는 기준을 채우지 못 하면, 인정하지 않습니다. 본문 당시는 무엇보다도 성별에 따라 차별했습니다. 공로가 큰 여인은 차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은 사람의 기준과는 다릅니다. 다른 조건을 내세우지 않고, 정의를 지키고, 생명을 지키는 이를 하나님은 칭찬하시고, 상을 베푸십니다. 성읍을 지켜낸 여인은 비록 세상의 인정과 보상과 관직을 얻지 못 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이 여인의 업적을 기억하셨기에,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 동안 역사의 길이만큼, 수많은 조건과 선입관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좋은 조건과 나쁜 조건을 먼저 만들어 놓았습니다. 습관처럼 우월한 존재와 열등한 존재를 나누었습니다.

 

피부색에 따라 능력이 다르다며 차별하는 악습이 지금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나누어, 우월과 열등을 나누는 기준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계속되고 있습니다.

 

교회까지 확장시켜 보면, 이와 비슷한 시각은 직분에 대한 입장에서 많이 나타납니다. 직분 때문에 수많은 문제와 갈등이 일어나고, 대부분은 원하는 중직을 받지 못 한 데에 대한 불만과 불평입니다. 평신도보다는 서리집사가, 서리집사보다는 안수집사와 권사가 위라고 생각합니다. 이 위에 장로가 있고, 전도사, 목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직을 받아야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고, 하나님이 인정하실 만한 일꾼이 될 수 있다고 이유를 댑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구분과 조건은 하나님의 뜻과 기준과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기준으로 사람을 만들지 않으셨고, 이런 기준으로 평가하지도 않으십니다. 이는 모두 사람들이 만든 기준으로서,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이와 전혀 다릅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하나님이 피부색에 따라 능력과 조건을 달리 세우셨다는 내용을 찾을 수 없습니다. 성별에 따라 더 좋아하시거나 싫어하신 경우도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직분에 따라, 하나님이 달리 대하신다는 내용도 전혀 없습니다. 목사나 중직자라고 무조건 인정하시지도 않고, 평신도라고 싫어하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우리의 판단과 행동에 따라 평가하십니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특별한 관심과 인정을 받지 못 했다 하더라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이들을 하나님은 인정하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관직에 오른 여러 사람보다,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을 만큼, 평범한 여인이 더 복된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인정을 받기 때문입니다. 참되고 영원한 복은 하나님만이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세상의 높은 관직에 있거나, 크고 좋은 보상을 받은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기준에 꼭 맞은 사람이 복됩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과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진 조건과 상황에 교만하지도 말고, 좌절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사람의 기준에 맞추려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고,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당시 특별하지 않은 여건이었음에도, 오히려 그 누구도 해내지 못 한 일을 해낸 여인, 그래서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복을 베푸신 여인을 기억하고, 오늘 각자의 자리에서 충성을 다함으로써, 날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