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충성, 거짓 충성
성경: 사무엘하 20장 4-13절(구 498쪽)
찬송: 410장(내 맘에 한 노래 있어), 338장(내 주를 가까이)
설교: 20210926.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우리는 모두 지구에서 살고 있습니다만, 지구 하나의 힘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태양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습니다. 태양이 없으면, 세상 모든 곳의 기온이 크게 떨어져 얼음 덩어리가 됩니다. 식물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가 살 수 없습니다. 그만큼 태양은, 지구의 생명체가 살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런데 태양과 관련해 가장 기본적인 논란이 오랫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지구와 태양 중에 무엇이 중심이고, 무엇이 주위를 도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지구가 중심이고, 태양과 우주가 지구 주위를 돈다는 주장을 ‘천동설’이라거나 ‘지구 중심설’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주장을 ‘지동설’ 또는 ‘태양 중심설’이라고 부릅니다.
지금은 우주를 관찰할 수 있는 장비와 지식이 크게 발달해서, 지구가 1년에 태양을 한 바퀴 돈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지구가 중심이고, 태양과 우주가 지구 주위를 돈다는 주장이 아주 오랫동안 사실로 여겨졌습니다. 그 동안에도, 지구가 태양 주위나 우주 주위를 돈다는 주장이 간혹 있었지만,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16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런 주장이 확립되었고, 점차 널리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16세기 후반이라면, 우리 민족에서는 조선시대고, 임진왜란이 일어난 때입니다. 총과 대포가 이용된 지가 오래되었고, 망원경을 비롯한 관측 장비들이 개발된 지 오래된 시기입니다. 그만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고, 인정받게 된 시기가 다른 발명이나 발견에 비해 매우 늦었다는 뜻입니다.
우리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가장 많이 접하면서도, 지동설이 이처럼 늦게 인정된 까닭이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지동설이든지 천동설이든지, 드러나는 겉모양이 같기 때문입니다.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해도 대부분 충분히 설명됩니다. 태양이 지구를 한 바퀴 돌면, 하루가 지난다고 계산할 수 있고, 충분히 설득됩니다. 반대로 태양이 돌지 않고, 지구가 돌아도, 하루의 시간과 1년의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설명됩니다.
이를 보면, 비슷함이 만들어 내는 어려움을 알 수 있습니다. 유사할수록 잘못된 판단과 결론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비슷할수록 분별의 능력을 무마시킵니다. 진실을 거짓으로 보게 만들고, 거짓을 진실로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이런 모습은 신앙생활에서도 자주 드러납니다. 진실한 믿음과 열성처럼 보이는데, 미신처럼 저급하고, 잘못된 믿음인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열심히 드리는 기도처럼 보이는데, 기복신앙에 머무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충성도 마찬가집니다.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열성을 보이는데,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명예와 성공과 출세를 위한 행동에 불과할 때가 많습니다.
문제는, 이런 차이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잘 드러나지 않으니, 처음부터 작심하고, 이를 악용하곤 합니다. 자기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열심히 할수록, 충성스럽다고 인정받고, 열심히 봉사한다며 칭찬까지 받으니, 점차 악을 향해 나아가고, 악이 더욱 커져서, 그 영혼이 버림받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압이 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이기고, 돌아오는 과정이 본문 앞의 내용입니다. 반역을 정리했으니, 행실과 업적에 따라, 공을 세운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잘못을 저지르고, 반란에 함께한 사람들을 벌해야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과정에서 전혀 예상 밖의 결정을 내립니다. 반란 세력을 벌하지 않고, 돌아설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그나마 여기까지는 이해되는데, 더 파격적인 결정을 내립니다. 압살롬 쪽으로 합류했을 뿐만 아니라, 그 밑에서 군대장관을 지낸 아마사를 자기편의 군대장관으로 세웠습니다. 그 동안 요압은 다윗의 군대장관으로서 여러 업적을 쌓았습니다. 반역이 일어났을 때조차 요압은 끝까지 다윗과 함께했습니다. 차라리 요압 쪽으로 가면,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사서 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자기편에서 끝까지 함께했던 요압을 군대장관에서 물리고, 대신 반란군 쪽의 군대장관을 지낸 아마사를 그 자리에 앉혔습니다. 요압이 많은 공로를 세우고, 또 끝까지 다윗 곁에 머물렀음에도, 요압을 버린 까닭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다윗이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요압의 힘이 너무 커졌습니다. 왕의 명령을 거부할 정도였고, 그럼에도 다윗이 요압을 처리하지 못 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다윗은 죽음을 앞두고,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기면서, 요압이 생을 편안히 마감하지 못 하게 하라고 당부합니다.
반역이 일어났을 때도, 다윗은 반역을 일으킨 자기 아들 압살롬의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부하들에게 당부했습니다. 다른 모든 부하들은 왕의 명령을 듣고 그대로 따릅니다. 엄청난 금은보화마저 마다할 만큼 다윗의 명령을 앞세웁니다. 하지만 요압만은 왕의 명령을 듣고 알았음에도,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압살롬을 살해했습니다.
또 앞서 나라가 둘로 나뉘고, 다윗은 유다 사람들의 왕으로 있을 때, 화친하기 위해 찾아온 북쪽의 실권자인 아브넬을 요압이 죽였습니다. 전쟁에서 자기 동생을 죽였다는 이유였습니다. 조금 있으면, 남북으로 갈린 민족이 하나가 되고,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될 수 있는데, 요압은 다윗의 허가나 명령 없이, 자기 개인적인 복수와 이익을 위해 아브넬을 죽였습니다.
이처럼 요압이 몇 차례 자기 명령을 거부하고, 멋대로 행동하자, 다윗은 결단을 내립니다. 반역에 가담한 사람들을 모두 죽일 수도 없고, 모두 처벌하면 오히려 분란과 반란의 명분을 주는 꼴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를 계기로, 요압의 교만과 권력을 누르는 전략을 세웁니다. 요압이 가지고 있던 군대장관 자리에, 반역 세력의 군대장관인 아마사를 앉히는 것입니다. 이를 받아들이지 못 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겠지만, 그럼에도 요압의 교만을 꺾고, 반란 세력에 있던 사람들과 화합할 수 있는 좋은 전략입니다.
이 과정에서 불만이 가장 큰 사람은 당연히 요압입니다. 이 불만이 오늘 본문에서 그대로 표출됩니다. 또 다른 반란을 제압하라는 첫 번째 임무를 아마사에게 주었습니다. 하지만 아마사가 다윗이 말한 기일 내에 마무리하지 못 합니다. 이때 다윗이 자기 측근 사람들을 추가로 보냅니다. 요압은 이때를 이용합니다. 아마사에게 인사를 하듯 다가가서, 칼로 아마사를 살해합니다. 그리고 곧 바로 왕이 내린 명령을 마치기 위해, 반역을 일으킨 세바를 쫓아갑니다.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드러난 요압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충성스러운 사람입니까? 불충스러운 사람입니까? 한 마디로는 애매합니다. 요압에게는 이 두 가지 모습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마저, 끝까지 남아 함께한 모습을 보면, 이 정도로 충성스런 사람도 찾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또한 그 누구보다도 많은 업적을 쌓았으니, 공적의 크기로 봐도 칭찬과 인정을 받을 만합니다. 군대장관의 자리에 앉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철저히 불충스런 모습도 여러 차례 드러냅니다. 다윗 왕이 민족의 통일과 화합을 위해 만들어 놓은 큰 틀을 두 번이나 깨뜨렸습니다. 철저히 자기 개인적인 욕망에 거슬렸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아들을 살려 달라는 왕의 당부마저 거부하고, 직접 죽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을 향해 협박을 일삼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충성스런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역적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 모습들입니다.
충성과 불충 두 가지 모습을 함께 보인 요압을 다윗이 싫어하고, 제거하려 했음을 보면, 다윗은 요압을 불충한 신하로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압이 충성, 열정, 수고를 많이 보였음에도, 왕으로부터 인정을 못 받은 까닭이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충성과 수고와 헌신의 방향과 목적이 오직 자신을 향했기 때문입니다.
충성하는 대상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는, 충성의 분량도 중요합니다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방향과 목적이 가장 중요합니다. 충성하고, 많은 업적을 쌓았지만, 그러나 그 방향과 목적이 자신을 향하면, 그것은 충성이 될 수 없습니다. 충성의 가면을 쓴 교만과 불충에 불과합니다. 자기의 자리와 명예에 방해가 되면, 언제 적으로 돌아서 칼을 들고 달려들지 모릅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집니다. 거짓 충성과 노력으로 속이려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여기에 속는 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참된 충성이나, 자기 욕심과 욕망을 위해 만들어 내는 포장된 충성이나 비슷하게 보입니다. 내 욕심을 위해 충성한 척, 노력한 척, 애쓴 척 하면, 많은 사람들이 칭찬하고 높여주고 인정합니다. 투자한 시간과 노력에 비해, 넘치는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전에 있던 도시교회에서 한 분이 장로 되는 방법이라며,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닌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말대로 장로로 선출되었습니다. 도시교회는 주일낮예배도 몇 차례 드리고, 교인 수도 많기 때문에, 서로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장로가 되려면, 공동의회에서 2/3의 표를 얻어야 하는데, 모르는 교인들이 많은 도시교회에서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장로가 되고 싶은 한 집사님은, 교인들의 애경사를 빠짐없이 챙기기 시작했습니다. 애경사와 관련해서 책임이나 직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앞장서서 애경사를 주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눈 적인 없는 교인들의 애경사에도 넉넉히 부조금을 냈습니다. 그렇게 2년 동안 열심히 노력했더니, 계획대로 많은 교인들이 인정하고, 선택해 주어 장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수고하고, 애쓰고, 봉사했지만, 과연 이 모습을 충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수고하고 애쓰는 목적과 방향이 오직 자기 장로가 되기 위함이었는데, 장로가 되었다고 해서 과연 좋은 일꾼, 교회에 유익을 주는 장로가 되었겠습니까? 장로가 된 이후에도, 자기 이익과 출세와 명예만을 향합니다. 교회를 살리기 위해 자신이 죽어야 하는 자리지만, 그러나 기본조차 안 되어 있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새사람이 될 리 없습니다. 교회와 당회에서 끊임없이 말썽과 분란을 일으킵니다. 자기의 뜻에 거슬리면, 싸우곤 합니다.
맡겨진 책임을 다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과정이 누구를 향하느냐에 따라 행동이 전혀 달라집니다. 하나님만을 향한 참된 충성이라면, 자기보다 일을 잘 하고, 자기보다 더 인정받는 사람이 오면, 함께 칭찬하고, 인정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자랑과 이익만을 위해 충성하는 척, 노력하는 척 하는 사람이라면, 자기보다 더 칭찬받고, 자기보다 더 인정받는 사람의 꼴을 견디지 못 합니다. 좋은 일꾼이 와서 교회에는 도움이 되고, 성장의 밑거름이 되지만, 자신의 출세길에는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정도가 심해지면, 자신보다 나은 사람, 더 잘 하는 사람, 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시기하고, 더 나빠지면 적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정하실 충성인지, 자신의 자랑을 위한 거짓 충성인지를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더 나은 일꾼이, 무리 속에 들어왔을 때, 정반대의 모습을 보입니다. 참된 충성이라면,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을 칭찬하고, 함께 협력합니다. 주인 되신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가 더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충성을 가장한 것에 불과하면,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 일 잘하는 사람이 오면, 시기하고, 싸우고, 심하면 싸워 없애려 합니다. 자신이 중심이 되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인을 중심에 두지 않고,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면, 수고와 열정과 노력이 아무리 크고, 많은 업적을 쌓아도 충성으로 인정받지 못 합니다. 다윗이 결국 요압을 처치하도록 유언으로 남겨놓았고, 그대로 결국 비참하게 죽은 요압과 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래서 애쓰며 수고하는 일도 중요합니다만, 그러나 충성의 방향과 목적과 대상이 중요합니다. 방향과 목적과 대상이 분명하지 않고, 바르지 않으면, 그 노력과 헌신이 결국 죽음과 실패와 패망의 원인이 됩니다. 바라는 바, 복과 은혜는 누리지 못 하고, 오히려 비참한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충성, 하나님이 복 주시고, 은혜로 응답하실 만한 노력이 되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하나님을 향해야 하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향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향한 충성이면, 자신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 한다 할지라도,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들을 반기도, 아끼고 협력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실 만한 교회를 함께 만들어가기 위해 애씁니다.
자기 자신의 이익이나 명예나 자랑을 위한 여정이 되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인정을 받을 수 있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버리십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수 있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책망하십니다. 열심히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무조건 응답하시고, 기뻐하시는 게 아닙니다. 사람은 겉의 행동에 따라 쉽게 속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래서 복의 근원되신 하나님의 복과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오늘도 우리 안에 가득한 교만과 이기심을 철저히 버리고, 하나님의 선한 도구가 되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부흥과 발전에 밑거름이 되기를 각오하고 힘써야 합니다.
자신이 드러나고, 자신으로 목적으로 삼음으로써, 결국 주군인 왕으로부터 미움과 버림을 받아, 실패한 요압의 모습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오직 하나님,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나를 희생하고 수고함으로써, 죽기까지 충성한 자녀에게 베푸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고, 이 땅에서도 풍성한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사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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