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기미마저 철저히 차단해야
성경: 사무엘하 19장 40-20장 3절(구 498쪽)
찬송: 429장(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269장(그 참혹한 십자가에)
설교: 20210919.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우리에게 어려움과 고통을 안겨다 주는 질병이 참 많습니다. 지금 당장이야,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의 위협이 가장 크고 오래 지속되고 있습니다만, 이 외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질병이 있고, 끊임없이 고통을 줍니다.
인간은 본래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습성이 있어, 내 몸이 건강하고, 특별한 이상이 없으면, 질병을 실감하지 못 하고 지내곤 합니다. 하지만, 아프거나, 혹은 문병을 가서 보면, 병원마다 환자들로 가득한 모습을 확인하게 됩니다. 또 환자들의 병명을 보면,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 생전 듣도 보도 못 한 병들이 상상 이상으로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질병이 다양한데, 어느 질병이 인간에게 가장 많이, 또 큰 고통을 주고 있을까요? 수천 년을 기준으로 했을 때, 암을 대표적인 질병들 중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갈수록 암 발병률이 높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진단 기술과 기회가 많아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 기회가 부족했던 과거에는, 암에 걸려도, 암인 줄 모르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암은 인간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는 무서운 질병입니다.
암도 종류에 따라서 완치율이 많이 다르다고 하죠. 종류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암의 크기와 번진 정도에 따라 수술이나 치료 과정이 크게 차이난다고 합니다. 암이 큰 것보다는 작은 게 좋겠죠. 또 멀리 퍼지지 않은 게 치료하기에 그나마 낫습니다.
그렇다면 암 덩어리가 큰 경우와, 작은데 여기저기에 작은 암이 퍼져 있는 경우 중에 어느 쪽이 치료하고 수술하기에 더 힘들고 어려울까요?
저도 이에 대해 잘 모릅니다만, 전에 봤던 드라마에서 이에 관한 내용이 나왔습니다. 드라마에서 애인 사이인 남녀가 모두 뛰어난 의사입니다. 그런데 여자가 치료가 아주 어려운 암에 걸렸습니다. 남자가 능력이 있는 의사이고, 또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여자친구를 직접 수술해서라도 치료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수술을 위해 배를 갈라서 열었는데, ‘씨딩’이라서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seeding은 영어인데, 씨앗을 뿌린 모양이라는 뜻으로서, 암이 좁쌀처럼 작게 덩어리져서 여기저기 퍼져 있다고 합니다. 암이 이렇게 퍼져 있으면, 수술이 더 이상 의미 없어 포기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보통은, 암이 커질수록 치료와 수술도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암의 크기를 측정하고, 조금이라도 줄이려 온갖 노력을 기울입니다. 없어지지 않더라도 작아지면 진전이 있다고 판단합니다. 그럼에도 씨앗처럼 크기가 작은 암이 퍼져 있으면, 클 때보다 더 어려운 까닭이 무엇일까요?
요즘 의술과 장비가 많이 발달해서, 여러 장기를 이식할 수 있습니다. 인공으로 만든 장기나 기관으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바꿔 보면, 암이 퍼진 기관이나 장기를 떼어내고, 이식한다든지, 장치를 달아 살 수 범위와 기회가 넓어졌습니다. 그러나 암이 씨앗처럼 작지만, 널리 퍼져 있으면, 절제해야 할 범위가 너무 커집니다. 그렇다고 암이 퍼진 모든 곳을 절제하거나 수술한다면, 의술과 장비가 아무리 발달했어도 환자의 생명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뿐만 아니죠. 가장 큰 이유라 할 수 있을 듯한데, 암이 여러 기관까지 번져 있으면, 지금 당장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미 암 세포가 온 몸에 퍼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디를 잘라내거나 치료하는 과정이 의미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지금 당장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그러나 이미 암세포로 변하고 있고, 또 금세 변하게 될 곳들이 너무 많아지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어디를 손대고, 어디를 치료하거나 수술로 절제해 내는 모든 수고와 과정이 아무런 소용없게 됩니다.
이게 두드러지지 않으나, 고르게 널리 퍼져 있음의 문제고 어려움입니다. 좀 어려운 말로, ‘편만,’ ‘편재’라 합니다. 언 듯 보기엔, 쉬워 보이고, 만만해 보입니다. 특별히 위험해 보이지 않습니다. 작을 뿐만 아니라, 아직 본격적으로 나쁘게 드러나지도 않는지라, 크게 신경 쓸 필요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사소해 보이고, 너무 멀리 퍼져 있어 무섭습니다. 방심하게 만들어, 빨리 손쓸 기회마저 빼앗기고 맙니다. 차라리 몸의 이상을 느낄 만큼 크고 확실하다면, 이를 일찍 발견하게 됩니다. 일찍 발견한 만큼 널리 퍼지기 전에 치료할 수 있습니다. 커서 더 이상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잘라 냄으로써 해결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과정이 힘들고, 큰 고통을 주지만, 그러나 최후의 보루라 할 수 있는 생명만은 지킬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너무 사소하고 작아서, 방심하게 만들고, 손 쓸 수 없게 만드는 편만과 편재가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죄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죄는 믿음의 암세포와 같습니다. 죄의 세포가 크고 두드러지면 분명하게 깨닫습니다.
그러나 죄의 영향이 눈에 잘 드러나지 않으면, 방심하게 됩니다. 죄가 죄인 줄 모릅니다. 죽음으로 이끄는 순간까지도, 건강한 줄 알고, 바른 줄 압니다.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죄가 삶의 곳곳에 워낙 널리 퍼져 있어서, 손대거나 해결할 수 없는 지경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입니다. 철저히 겸손해야 합니다. 스스로 교만과 죄의 씨앗이 있는지 겸손하게 살펴야 하고, 이를 확인하면, 더 이상 다른 곳까지 퍼지지 못 하도록 철저히 차단해야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죄가 널리 퍼져 있는 이들의 모습과, 죄의 무서움을 몸소 체험한 후 이를 차단하기 위해 애쓰는 다윗의 모습이 대조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궁을 떠났다가, 무찌르고 돌아오는 과정 중에 있는 사건입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 전에, 반역 세력에 동조하거나 방조한 이들에게 반성할 기회를 주었고, 모두 다윗을 다시 왕으로 모시기로 동의했습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과 유다라는 표현이 조금 혼동을 줄 수 있습니다. 성경의 전체 배경은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이 속에서 열두 지파로 나뉩니다. 유다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나중에 둘로 나뉘었을 때나, 지지하는 왕조에 따라 둘로 나뉘곤 했습니다. 하나는 다윗을 중심이라서 ‘유다’라 하고, 나머지 세력을 통틀어 ‘이스라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유다도 이스라엘 지파들 중 하나지만, 사울 왕가를 중심으로 뭉쳤던 사람들을 ‘이스라엘’이라 하고, 나머지 세력을 ‘유다’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다 사람들이 먼저 다윗 왕을 맞으러 간 일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불만을 드러냅니다. 그러자 유다 사람들은, 다윗 왕이 자신들과 같은 족속 출신으로서 가깝기 때문이라고 답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이 먼저 왕을 모시고 오자고 했으니, 자신들이 먼저 나서는 게 맞다며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이 둘 사이의 싸움을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습니다. 옳은 일을 하고, 해야 할 일을 한다면, 누가 먼저 하고, 뒤에 하는 게 왜 중요합니까? 이 둘이 싸우는 이유는 결국 명분과 체면입니다. 왕을 맞이하는 데 앞장서면, 더 명예로워지고, 왕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뒤서면, 체면이 깎인다는 생각에 갇혀 있습니다. 누구를 맞이하러 나가느냐가 중요하지, 누가 먼저 맞이하러 나가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음에도, 이들은 이 일로 날선 공방을 펼치며 갈등을 일으킵니다.
결국 유다 사람들의 주장이 더 세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주장이 먹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일이 빌미가 되어 20장 초반에 나온 대로, 베냐민 지파의 세바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 모두가 다시 다윗 왕을 등지고, 세바가 이끄는 반란 세력에 동조하고 말았습니다.
왕을 맞이하러 가는 절차와 순서 때문에, 갈등과 분열이 생긴 사건만 보면, 불화가 재앙의 씨앗이 된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유다 사이의 갈등과 반란 사건이 이어지는 중에, 갑자기 20장 3절에서 후궁 10명 이야기가 끼어 있습니다.
다윗이 반란을 피해 떠날 때, 왕궁에 후궁 열 명을 두고 갔습니다. 그런데 반란을 일으킨 압살롬이, 자기가 새로운 왕이 되었음을 드러내기 위해 이 후궁들과 동침했습니다. 자기 서모들이 됨에도, 압살롬은 하나님이나 가족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왕의 자리에만 집중하느라 이처럼 추악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다윗이 돌아와서 열 명의 후궁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른 곳에서 언급해도 됩니다. 그럼에도, 유다와 이스라엘 사이의 갈등과 반란 문제를 다루다, 이 사이에 다윗이 후궁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기록했습니다. 이 두 사건을 대조함으로써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뜻입니다.
궁으로 돌아온 다윗은 후궁 열 명을 방에 가두고, 감시했습니다. 음식은 주어서 목숨만은 유지할 수 있게 했지만, 이들을 다시는 궁으로 불러들이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후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한편으로는 후궁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후궁들이 다윗을 따라 가지 않고, 궁에 머물기를 고집했다는 내용도 없고, 압살롬과의 관계를 원했다는 내용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이 이들을 가혹하다 할 만큼, 무섭고 또 철저하게 떼어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무엇보다도 죄의 씨앗을 철저히 차단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당장 드러나지 않더라도, 이 일이 빌미가 되어 이후에는 죄로 커지고, 멸망으로 이끌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은 암세포가 널리 퍼지면 더 이상 손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것처럼,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다윗 자신만이 아니라, 나라 전체가 죄에 물들지 않도록, 반복되지 않도록 죄의 기미마저 없애려 했습니다.
바꿔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작은 갈등에도 불구하고, 다시 반란으로 돌아선 까닭은, 그 속에 반란의 씨앗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씨앗이 작고 사소해 보입니다. 쉽게 드러나지 않고, 언제든 건강하고 좋은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빌미만 주어지면, 어느새 삶의 방향을 결정할 만큼 크게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이랬습니다.
먼저는,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키자, 여기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다윗이 반란 세력을 무찌르자, 이들은 다시 다윗의 편에 서겠다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오래 가지 못 합니다. 유다 사람들이 협의 없이 먼저 왕을 맞으러 나갔다는 이유, 한 걸음만 떨어져서 보면, 유치하고, 너무나 하찮은 이유로 다시 반란을 일으키고, 또 거기에 넘어갑니다. 이 과정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 속에는 반란의 씨앗들이 전체에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쉽게 변질된다는 의미는 또한 좋은 모습도 자주 또 쉽게 보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쉽게 변하는 만큼, 쉽게 좋아지기도 합니다. 반대도 마찬가집니다. 그만큼 또 쉽게 나빠집니다. 어느 순간 드러나는 모습으로, 그들의 본바탕을 파악하기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잠깐 보이는 좋은 모습에 방심하면, 훨씬 더 나쁜 모습을 보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처럼 쉽게 변질되고, 쉽게 반역하는 이유가 그들 안에 반란의 씨앗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임을 보면, 다윗이 왜 그렇게 후궁들에게 잔혹하리 만큼 철저히 차단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죄의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죄에 오염되어 있어서, 잠깐 방심하면, 어느새 죄에 물들어 해어날 수 없음을 다윗은 알았습니다. 다윗 본인이 직접 체험했습니다.
남의 아내를 향한 탐심이 부하를 죽이는 지경으로까지 타락시켰습니다. 이 죄가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켰고, 가정의 화평과 사랑이 처참히 무너졌습니다. 이 일로 인해, 나라가 둘로 나뉘고 말았습니다. 이 일이 빌미가 되어, 이스라엘 사람들 속에 반란과 죄악의 씨앗이 자연스레 널리 퍼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죄의 가능성마저 철저히 멀리합니다. 자기가 그 동안 아끼고, 사랑하고, 함께했던 후궁들을 가두고, 멀리함으로써, 죄의 기미마저 버리려 했습니다. 사소한 일이라 여겨, 혹은 자신감에 휩싸여, 하나둘 양보하거나 물러서게 되면, 죄의 씨앗들이 자기 삶 전체에 파들고, 결국 망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그에 따라 행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죄가 죽음으로까지 이끌기 전에, 철저히 차단하라고 말씀합니다. 마가복음 9장에서 손발이 범죄하게 하면, 찍어 버리라고 하시고, 눈이 범죄하면 눈을 빼버리라고 너무 무섭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죄를 가볍게 생각하다, 죄가 영혼에 모두 퍼지기 전에, 무서움을 알고, 죄의 기회, 죄의 씨앗마저 철저히 차단하고 멀리하라는 뜻입니다.
죄가 습관이 되는 까닭은 무엇보다 쉽고 가볍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죄를 지음으로써, 팔과 발이 사라지고, 눈까지 뽑아야 한다면, 얼마나 죄를 무서워하고, 죄짓지 않기 위해 노력하겠습니까? 말 그대로 죽을힘을 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유혹과 무서움을 알고, 철저히 대비하고, 멀어지게 됩니다. 본문에서 다윗이 죄의 기회마저 제거한 까닭이고, 지금 우리가 보고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죄의 씨앗이 널리 퍼져 있어서, 변질과 개선을 쉽게 반복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통해 죄의 무서움을 알고, 죄의 기회마저 철저히 차단한 다윗의 지혜를 기억하고, 언제나 죄로부터 멀어지고, 생명과 복을 선택함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자녀에게 베푸시는 은혜와 사랑을 날마다 누리며 사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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