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211219)마땅히 전하고 가르쳐야 할 길(왕상 1장 1-10절)

청명하늘 2021. 12. 19. 15:56

마땅히 전하고 가르쳐야 할 길

 

성경: 열왕기상 11-10(508)

찬송: 390(예수가 거느리시니), 446(주 음성 외에는)

설교: 20211219.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올해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나온 책들 중에 [아이가 내 맘 같지 않아도 꾸짖지 않는 육아]라는 제목이 있습니다. 저는 육아와는 전혀 상관없는 입장이라,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제목만으로도 전체 내용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과정이 참 어렵다고 하죠. 이를 잘 드러내는 말들 중에, “자식은 부모 맘대로 안 된다는 말도 있고,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 모두 이 말에 동의할 정도입니다.

 

낳는 일보다 바르게 교육하는 게 비교할 수 없이 어렵습니다. 어머니는 10개월 동안 아이를 배어, 여러 가지 어렵고 험난한 과정을 거칩니다만, 그러나 큰 이상이 없으면 10개월이면 아이가 나옵니다. 아이를 낳는 수고와 고통은 10개월로 한정되었습니다.

 

하지만 낳는다고 해서, 부모로서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수많은 동물이 있지만, 인간만큼 교육과 보살핌이 많이, 또 길게 필요한 경우가 없다고 합니다. 아무리 큰 동물도, 몇 주, 길어봤자 몇 년이면 온전히 성숙해지고, 더 이상 부모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기간이 그 어떤 동물과 비교할 수 없이 깁니다. 1,2년이 지나면 말하고, 걷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교육과 돌봄이 끝났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성장시키기까지는 거의 20년 가까운 시간이 필요합니다. 몸은 커지고, 자기주장은 강해지지만, 몸이 커지고 강해지는 속도를 생각이 따르지 못 한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혼자 바르게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부모는 끊임없이 가르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바라는 모습과, 실제 자녀가 보이는 모습 사이에서 오는 이 간극 메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부모의 기대치는 언제나 크고 높고 먼데, 자녀의 모습은 언제나 작고, 낮고, 뒤에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성공한 이들 중에도, 자녀가 말썽과 문제를 일으켜,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는 수없이 많다는 사실이 이를 잘 알려줍니다.

 

자녀와 청년들을 가르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목표와 목적을 제시하고, 이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강하게 이끄는 길입니다. 다른 하나는, 가능하면, 자녀들이 원하는 대로 놔두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자유롭게 놔두는 방식입니다. 이 두 가지 방법 중에 무엇이 더 적합하고 좋아 보입니까? 자녀와 아이들의 삶을 위해 어느 길이 맞아 보입니까?

 

저 개인적으로는, 부모님은 무섭고 강압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 주셨습니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저의 의견을 자유롭게 드러낼 여건도 안 되었고, 당연히 부모님과 많이 대화를 나눈 적도 없습니다. 부모님의 말씀이 언제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부모님은 당연하듯 일방적으로 말씀하고, 이끄셨고, 저는 또 당연히 불만과 불평이 많았습니다.

 

특히 가까운 친구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제 부모님의 방법과 기준이 옳지 않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친구 부모님은, 아들에게 강압적으로 무엇을 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친구는 자기 하고픈 일들을 부모님의 반대나 강요 없이 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입장과 전혀 다른 친구의 모습을 보면서, 자녀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놔두는 방식이 최고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책의 내용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거라 추측합니다.

 

그런데 부모님의 간섭보다는, 제 주장과 결정이 훨씬 커진 지금에서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방임에 가깝게, 자녀의 결정과 선택에 맡기는 방식이 옳다는 생각이 점차 작아집니다. 때로는 부모와 어른이 자녀와 젊은이들을 반강제로라도 옳은 길로 인도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은 점차 커집니다.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놔두는 방식은, 각자가 가진 가치관과 생각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각자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놔두어도, 발전하고, 좋아진다고 생각합니다. 각자 나름의 계획과 목표를 향해 힘쓰면, 행복을 누리며, 결국 모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여깁니다.

 

반대로, 옳은 길, 좋은 길을 가르치고, 반강제로라도 길과 방향을 제시해야만 한다는 주장은, 인간의 본성이 온전하지 못 하다는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자유롭게 하고 싶은 대로 놔두면, 인간의 못된 본성이 더 커져서, 점차 악화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합니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이 문제와 고민은 계속될 터인데, 오늘 본문을 이와 관련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열왕기가 시작되는 부분인데, ‘열왕기왕들을 나열한 기록이라는 뜻입니다. 지난주까지 살펴보았던 사무엘상하서는 다윗의 삶을 중심으로 하고, 열왕기는 다윗의 뒤를 이은 왕들을 중심으로 하고 합니다.

 

사무엘상하서에서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이기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선택되고, 왕이 되고, 업적을 쌓는 모습을 보였던 다윗도 어느새 나이가 많이 들었습니다. 들짐승들을 쫓아내고, 골리앗과 싸울 만큼 용감하고 날렵했던 다윗도 세월의 장벽에 부딪혀, 이제는 자기 몸 하나 가누기 어려운 때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나이 들고, 육신이 약해진 모습을 오늘 본문 1절에서는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한지라는 말씀으로 설명합니다. 나이가 많아지고, 몸이 약해질수록 몸이 차가워지게 되죠. 한 나라의 왕이고, 권력과 이름을 가진 다윗 역시 그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다윗이 늙었다지만, 왕이기에 그나마 부하들이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해결책을 찾기 위해 고심했습니다. 그리고 젊은 처녀를 품게 하는 해결책을 내놓았습니다. 당시 주변 문화에서 흔히 사용되던 방식입니다. 4절에서는 이 처녀는 심히 아름다워 그가 왕을 받들어 시중들었으나 왕이 잠자리는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는 설명까지 덧붙임으로써, 순수하게 다윗의 온기를 위한 해결책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4절까지만 다루면, 생로병사를 겪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기억해야 한다는 주제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빌미가 되어, 솔로몬이 자신의 형인 아도니야를 죽여야 하는 비극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약해진 다윗의 건강을 위한 방법이었지만, 차라리 없는 게 나은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 바로 다음 이어지는 다윗의 세 번째 아들인 아도니야의 행적 속에, 6절에서 그는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자요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라 그의 아버지가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고 기록함으로써, 다윗이 자녀를 교육하는 방식이 어떠했는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셋째 아들인 아도니야의 행적에 대해 간섭도 하지 않고, 지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도니야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대로 놔두었습니다.

 

심지어는 아도니야는 아버지인 다윗이 살아 있고, 허락이나 약속조차 받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왕이 될 거라 말하고 다녔습니다. 왕만 할 수 있는 정도로 병거를 타고, 기병과 호위병을 무려 오십 명을 데리고 다녔습니다. 이는 반란과 다르지 않을 만큼 중대한 일임에도, 다윗은 아도니야에게 이유를 묻지도 않았습니다. 왜 그런 일을 하느냐고 꾸짖지도 않았습니다. 다윗이 아도니야를 교육하는 방식은 말 그대로 자유방임주의였습니다.

 

그런데 자녀가 무엇을 하든, 책망하지 않음으로써 실패한 경험이 다윗에게 있습니다. 사무엘하서에서, 다윗의 첫 번째 아들인 암논이 이복여동생인 다말을 범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임에도, 다윗은 분노했지만, 암논을 처벌하지도 않았고, 책망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이 일이 빌미가 되어, 두 번째 아들인 압살롬이 암논에게 복수해 죽이게 되었습니다.

 

한 가족임에도, 가장 큰아들은 이복동생을 범했습니다. 둘째아들 압살롬이 형을 죽였으면, 이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처벌을 내려야 함에도, 다윗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다른 나라로 도망했다가 돌아온 압살롬이 병거와 말과 호위병들을 두고, 자기 멋대로 재판관처럼 행동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나라에는 법과 제도가 있음에도, 이를 모두 무시하고, 마치 왕처럼 교만하게 행동하면, 왕인 다윗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비록 자신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그에 대해 꾸짖고,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압살롬에게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다윗은 궁에서 쫓기고, 죽을 위기까지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까지 겪었는데, 다시 세 번째 아들인 아도니야가 압살롬의 모습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압살롬이 어떻게 하든, 제지하지 않고, 책망하지 않아, 말할 수 없는 비극을 맛보았음에도, 아도니야에게도 그 어떤 책망이나 처벌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건강을 위해 젊은 처녀를 들이는 이방인들의 방식을 다윗이 받아들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평생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성전을 지으려 할 만큼 믿음이 크고 대단한 다윗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 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젊은 처녀를 들여 품어봤자, 몸이 젊어질 수 없고, 몸이 따뜻해질 수 없음을 그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부하들의 주장과 방법에 대해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도 않고, 반대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보다 다윗의 성격과 기준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행적을 보면, 아주 용감하고, 대범하지만, 성격은 그리 강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녀들이 그렇게 여러 비행을 저지름에도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싫은 소리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부하들이 어리석은 방법, 이방인의 이상한 방법을 내놓았을 때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이런 성격은 언제나 비극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겪은 가장 큰 비극은 무엇보다도 질책과 책망을 하지 않는 성격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언제나 변질되고, 어긋나기 아주 쉽습니다. 많은 이들의 주장처럼, 자유롭게 놔두면 발전하고, 좋아지는 경우보다는, 후퇴하고 잘못된 경우가 비교할 수 없이 많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이를 기억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 삶을 가꿔 나아감을 뜻합니다. 태생 자체가 이기적이고, 교만한 존재인 인간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가장 행복하고, 좋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간섭과 말씀과 질책이 좋을 리 없습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점차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고, 맘대로 살고 싶은 교만이 여전히 모두의 밑바닥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 속에 이런 방향과 기준이 바탕을 이루다 보니, 신앙생활과 신앙교육에서조차도 이런 흐름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는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대로 살고 있는지 여부는 생각하지 않고, 오직 칭찬하고, 인정하고, 격려해 주기만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언어로 주어져야 하는 설교마저도, 고난과 십자가와 질책 등 부담되고 어려운 이야기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든, 어떻게 살든, 그저 잘한다.” “그래도 괜찮다.” “잘될 것이다등의 편하고 좋은 이야기만 원합니다. 설교자들 역시 이런 흐름에 맞춰, 교인들이 듣기 좋은 이야기, 재밌는 이야기, 흥미롭고 자극적인 이야기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분명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의 삶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문제와 어려움은 더욱 커집니다. 잠깐은 편하고, 좋아 보이지만, 그러나 결국은 실패와 비극만 남습니다.

 

믿음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은혜와 평강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편하고, 쉽고, 듣기 좋은 소리만 골라 들어서는 안 됩니다. 부담되고, 어렵고, 거북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맞으면, 기꺼이 듣고, 받아들이고, 따라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잠깐 어렵고, 거북하다고, 설교자가 복과 평안만을 약속하거나, 성도의 삶과는 상관없이 방치하면, 결국 비극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간섭과 인도를 외면하고, 편하고 좋은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면, 그 끝에서는 죽음과 실패를 마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용맹스럽고, 신실한 사람이었지만, 부담을 주고, 싫은 소리하지 못 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가족 내의 사고와 비극이 반복되고 말았습니다. 부담과 아픔을 주지 않으려, 편하고 쉬운 길을 선택했지만, 오히려 이게 원인이 되어 고통과 슬픔만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우리의 기대와 생각만큼 선하지도 못 하고, 스스로 좋은 길을 선택할 만큼 지혜롭지도 못 합니다. 그래서 어른과 지도자가 되었을 때는, 상황에 맞게 책망하고 질책으로 이끌 줄도 알아야 합니다. 가르침을 받아야 할 때는, 부담되고, 어려운 일마저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수고해 걸어온 과정이 헛되지 않고, 우리가 마주할 앞날이 복과 은혜로 채워집니다. 쉽고 편한 길의 끝에서는, 죽음과 실패를 만나지만, 어렵고 힘든 길의 끝에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구원의 복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다윗의 선택과 교육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누릴 수 있는지를 기억하고, 언제 어디에서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대로 선택하고, 받아들이고, 행동함으로써, 매일의 삶 속에서 복의 열매를 가득 맺는 자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