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선택과 약속이 있는 자리
성경: 열왕기상 1장 22-53절(구 509쪽)
찬송: 303장(날 위하여 십자가의), 406장(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곳과)
설교: 20220102. 주일낮예배
새해 첫 주일을 맞아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외국의 격언 중에, 삶은 탄생과 죽음 사이의 선택이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말처럼, 우리는 수많은 선택과 버림을 결정해야 합니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모양과 결과가 달라집니다.
선택이 많은 영향을 끼치긴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선택이 같은 가치를 가지지는 않습니다. 시간과 힘을 쏟을 만한 가치가 없는 선택과 기준도 있습니다. 또 거기에 정성과 최선을 다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습니다만, 한 여배우가 토크쇼에 나와서 패션에 대해 강하게 발언한 내용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화면에 나오는 배우들은 외모나 옷차림 등에 특별히 신경을 많이 쓰죠. 사회자가 외모를 관리하기 위해 특별히 신경 쓰는 부분이 있느냐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이 배우가 두 가지를 극히 싫어한다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는 정장에 흰 양말을 신는 경우고, 다른 하나는 겨울에 차안에 따뜻한 바람을 트는 경우라고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패션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관심도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예의를 차려야 하거나, 공적인 자리가 아니면, 남에게 피해를 줄 만큼 지나치지만 않으면 된다 생각합니다. 여름에 시원하면 되고, 겨울에 따뜻하게 입으면, 패션의 선택과 가치를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흰 구두에 흰 양말을 신든, 흰 양복을 입든, 누군가로부터 무시를 받을 만한 일은 아닙니다.
겨울에 차안을 따뜻하도록 트는 히터도 마찬가지죠. 겨울엔 건조한데, 히터까지 틀면, 더 건조해져서 피부가 건조해지고 많이 상한다고 합니다. 저는 피부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별로 관심도 없습니다. 피부가 건조해지면, 간단히 로션을 많이 바르면 될 듯한데,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서 추위를 견딘다는 말이 저에게는 맞지 않는 기준이고 선택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겨울에 피부가 동상에 걸리거나 건조해지지 않도록 돼지고기 비계를 녹여 발랐다고 합니다. 그 여배우는 아마 이런 지혜와 방법을 잘 모르는 듯합니다.
그런데 이후에 이 배우의 여러 못된 행태가 방송과 언론에 많이 보도되었습니다. 주위에서 돕는 여러 사람들을 무시하고, 크게 싸웠다고 합니다. 약속된 시간에 늦고, 자기주장만 펴서, 함께 일하기조차 꺼려한다고 합니다. 무슨 옷을 어떻게 입고, 어떤 색으로 맞춰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과 기준은 분명한데, 사람으로서 가져야 하는 최소한의 수준에 이르지 못 했습니다. 피부를 부드럽고, 촉촉하게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서는 기준을 명확하게 세웠으면서도, 마땅히 가져야 하는 가치관은 갖추지 못 했습니다.
선택과 기준의 관점에서 보면, 이 배우는 하찮은 것에 많은 관심과 힘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이 크고 중요한 기준은 버렸습니다. 인정받기 어려운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선택의 기로를 수없이 만나지만, 우리의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복과 평안이 약속된 길로 이끌기 위해서는 바른 기준을 세우고, 기준에 맞게 선택해야 합니다. 지난날들의 기준과 선택에 따라 지금 우리의 모습과 수준이 정해졌고, 지금의 기준과 선택에 따라 앞날의 모습과 수준과 내용이 결정됩니다. 지금 마땅한 기준을 세우고, 지혜롭게 선택해야만 우리의 앞날에 거둘 만한 열매가 가득할 수 있습니다. 지금, 헛되거나 잘못된 기준을 세우고, 가치와 의미 없는 일에 힘쓰면, 아무것도 거두지 못 하고, 이루지 못 하는 빈털터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셔서, 우리를 자녀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또 우리는 이 땅에 살기에, 선택의 기로를 수없이 마주하게 됩니다. 이때 무엇을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인정받고, 복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이 포기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선택을 위해 어떤 기준을 세워야 하는지 알려주시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와 지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큽니다. 시간과 공간의 차이가 워낙 커서, 처한 모든 상황에 맞는 성경 본문과 내용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지금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이유는, 성경 속 인물과 사건과 기록을 통해, 지금의 기준을 찾을 수 있고, 이 기준에 맞춰 유익이 되는 선택을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속에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 한 무리가 나오고, 반대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는 무리들이 대조되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했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어땠는지를 통해, 우리가 겪는 모든 경우에 내세울 수 있는 기준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다윗이 나이가 많아져서 자기 몸 하나 간수하기조차 어렵게 되었습니다. 늙고 몸까지 약해지니, 상황을 바르게 파악하기도 힘들고, 결정하기도 어렵게 되었습니다.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형편이었으면, 다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자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야 하고, 자기 아들들 중 하나가 왕으로서 나라를 이끌어야 합니다. 솔로몬을 후계자로 마음에 두고 있었다면, 자신이 죽기 전에 솔로몬을 왕으로 앉혀야 합니다.
그런데 몸과 정신이 약해지고, 판단력마저 흐려진 터라, 다윗은 이 작업을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자신이 죽기까지 왕으로 남아 있고픈 욕심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왕이 이처럼 다음 왕을 앉히는 일을 계속 미루자, 여러 분열과 갈등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아도니야가 나섭니다. 자신이 다음 왕이 된다면서, 스스로 왕처럼 행세합니다. 요직에 있는 여러 사람들을 모아, 궁 아주 가까운 곳에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때의 모습을 본문 앞 7절에서는 “아도니야가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하니 그들이 따르고 도우나”라고 하고, 9절에서 “아도니야가 에느로겔 근방 소헬렛 바위 곁에서 양과 소와 살찐 송아지를 잡고 왕자 곧 자기의 모든 동생과 왕의 신하 된 유다 모든 사람을 다 청하였으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도니야가 왕이 되겠다고 나설 때 함께한 사람들과 또 그 자리를 생각해 보면 어떻습니까? 아도니야는 용모가 아주 뛰어났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왕으로서 충분해 보일 만큼 멋졌습니다. 게다가 주위에 수십 명의 호위병과 기병을 두고, 병거까지 따라다녔으니, 얼마나 대단해 보였겠습니까?
대통령이 이동하는 모습을 보면, 수십 대의 차가 따르고, 많은 사람들이 경호하죠? ‘우리나라처럼 총기 사용이 엄격하게 규제된 곳에서, 저렇게 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참 화려하고, 멋져 보입니다. 대통령이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지 생각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아도니야는 수천 년 전의 사람인데도, 이를 잘 알았습니다. 외모를 멋지게 가꾸었고, 건장한 군인들 수십 명으로부터 경호를 받았습니다. 이를 본 사람들마다 아도니야가 왕이 될 만하다고 칭찬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도니야는 누구와 함께해야 왕이 되는 데 유리한지 잘 알았습니다. 만약의 사태를 위해, 군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당시 군사령관인 요압을 가장 먼저 끌어들였습니다. 요압은 능력이 뛰어났지만, 그 권력이 얼마나 크고 대단한지, 심지어는 다윗 왕도 함부로 처리하지 못 할 정도였습니다. 다윗 자신이 요압을 처리하지 못 하고, 결국 자기 아들에게 유언으로 남길 만큼, 요압의 권력은 대단했습니다. 왕이 되고자 경쟁해야 하는 아도니야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입니다.
다음으로는 아비아달 제사장을 끌어들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문화는 철저히 신앙 중심입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허락에 따라야 합니다. 만약 군사만 끌어들여, 힘으로 왕에 오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우지 않은 왕이라며 비난을 받고, 많은 반대에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아도니야는 이 점도 잘 알고 있어서, 제사장 아비아달을 끌어들입니다. 대제사장인 아비아달을 끌어들임으로써, 명분도 세우고, 백성들의 동의와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계산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사람들을 모아 잔치를 벌였습니다. 많은 사람을 모아 양과 소와 살찐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또 솔로몬만 빼고, 다른 모든 왕자들을 모았습니다. 멋지고, 화려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했습니다.
그런데 이와 정반대 모양의 자리가 오늘 본문 속에 등장합니다. 솔로몬이 왕에 오르고, 이를 선포하는 자립니다. 아도니야가 스스로 왕처럼 행세하고, 사람을 모아 잔치를 벌여, 왕이 되었음을 선포하려 하자, 나단 선지자와 밧세바가 급하게 나서서, 다윗에게 솔로몬을 왕에 앉히라 설득합니다. 다윗도 자신이 언제 생을 마감할지 모르고, 그대로 나두었다가는 나라가 두 동강 날 수밖에 없음을 알고, 급하게 솔로몬을 왕으로 선포합니다.
솔로몬이 왕으로 선포된 자리는 아도니야의 잔치 자리와는 많이 다릅니다. 경호하는 군사들도 없었고, 양과 소처럼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조차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사람들을 미리 포섭하고 함께한 아도니야의 자리와는 달리, 솔로몬의 자리는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만이 함께했습니다.
이처럼 상반되는 성격의 두 사람이 각기 자리를 마련했는데, 둘 중 어떤 자리가 결국 이겼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이 둘의 과정과 그 결과까지 비교해 기록해 놓았습니다. 솔로몬이 있는 자리는 백성들의 인정과 환영을 받았습니다. 반대로 아도니야의 자리는 두려움이 닥쳐왔습니다. 49절의 “아도니야와 함께 한 손님들이 다 놀라 일어나 각기 갈 길로 간지라”는 말씀처럼, 각자 살 길을 찾아 도망해야 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또 이 자리를 주최하고, 왕에 오르고자 계획했던 아도니야도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성전으로 피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솔로몬의 자리와 아도니야의 자리는 왜 전혀 다른 결과를 맞이했습니까? 군사가 충분했고, 권력자들이 함께했고, 기름진 음식과 술이 가득한 아도니야의 자리는 왜 두려움이 가득하고, 살려고 피해야 하는 자리가 되었습니까? 아도니야와의 자리와는 달리, 아무것도 없다 해도 지나치지 않은 솔로몬의 자리는 왜 기쁨과 환영의 자리가 되었습니까? 이유는 단 한 가집니다. 다윗 왕의 약속과 허락에 따라 갈렸습니다.
아도니야의 자리는 권력과 명분을 가진 많은 사람이 있었고, 좋아할 만한 모든 게 넉넉하게 준비되었지만, 그러나 그 자리는 다윗의 약속과 허락을 받지 못 한 곳이었습니다. 솔로몬의 자리는 몇 사람밖에 없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자리였지만, 그러나 그 자리는 아버지 다윗의 약속이 주어진 자리입니다. 왕이 허락한 자리인지라, 결국은 생명과 복으로 채워졌습니다.
이를 통해,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생명과 복이 약속된 자리여야 합니다. 생명과 복이 약속된 자리에 들어가야만, 장차 복과 영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앞날을 기대하며 살 수 있습니다. 반대로 생명과 복이 약속되지 않은 자리가 주는 유혹을 피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자리에 임하는 저주와 실패를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간단한 이 선택과 기준이 쉽지 않습니다. 유혹이 훨씬 큽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도, 왕의 약속과 허락이 있는 솔로몬의 자리보다, 왕이 미워하고, 거부하는 아도니야의 잔치 자리가 훨씬 크고 화려하고 많은 사람이 몰린 모습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은 생명과 복이 있는지 여부보다, 권력과 이익이 있는 곳, 당장 많이 얻을 수 있는 자리를 향합니다. 이 유혹이 얼마나 큰지,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도망할 때도, 목숨 걸고 지키고 함께했던 대제사장 아비아달마저 아도니야 편으로 갈 정도입니다. 그곳엔 우리의 입맛을 다실 만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권력과 이익을 약속하고, 기름진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당장 편하고, 많이 얻어 누릴 수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성공을 향한 기회처럼 보였으나, 결국엔 살기 위해 도망해야 하는 자리로 끝났습니다. 모두에게 드러내고, 자랑하고, 축하를 받을 만한 잔치 자리처럼 여겨졌으나, 결국엔 살기 위해 숨기고, 피해야 하는 자리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왕의 허락 없는 잔치에 다가간 대가는 결국 패망과 실패였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지도 않고, 보장하지도 않는 자리의 끝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눈에 보기 좋은 자리가, 우리에게 생명과 평안을 약속하지 못 합니다. 화려하고,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자리라고 해서, 그 자리에 하나님의 복이 있음을 보장하지 못 합니다. 그래서 우리 욕심과 욕망으로 기준 삼지 말고, 믿음과 지혜의 안목으로 보고 판단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느새 2022년의 첫 주일을 맞았습니다. 한 해를 시작하며, 계획하고 바라는 일들이 많죠. 그러나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약속이 보장된 길을 선택하며 살기로 다짐하고 새겨야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처럼, 선택하고 지켜도 보잘 것 없는 일에 집착하지 말고, 앞날의 모양과 방향과 수준과 내용을 달리하게 만드는 크고 중요한 일에 힘써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의 기준에 맞춰 지혜롭게 선택하고, 힘써 향해 나아가면, 장차 생명과 복과 평안을 받고 누릴 수 있습니다. 올 한 해의 삶만이 아니라, 우리의 평생과 내생에서까지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새해 첫 주일을 맞아, 새로운 각오와 계획을 세워 나아갈 때, 화려하고 보기 좋은 자리를 선택했으나, 약속받지 못 한 자리에 머묾으로써, 결국 도망한 이들처럼 되지 말고, 솔로몬의 자리처럼, 복과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허락과 약속이 있는 자리에 머묾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은혜와 생명으로, 2022년을 채워 나아가는 복된 자녀들 모두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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