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220206)버릴 것들, 지켜야 할 것들(왕상 2장 36-46절)

청명하늘 2022. 2. 6. 14:11

버릴 것들, 지켜야 할 것들

 

성경: 열왕기상 236-46(513)

찬송: 434(귀하신 친구 내게), 540(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설교: 20220206.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지난 주중에는 설날이 들어 있어 고향에 갔습니다. 가장 큰 명절이지만, 전염병 때문에, 다른 때보다 가족들이 많이 모이지 못 했습니다. 시간의 여유가 있어서 집을 청소했습니다. 그 동안도 오가며 청소했지만, 보통은 당일에 대청소를 하긴 쉽지 않죠.

 

청소를 시작하니, 치워야 하는 물건이 너무 많았습니다. 몇 군데 치우는 데도 한참 걸렸습니다. 집 전체를 깨끗할 만큼 치운다면, 며칠이 걸릴지 모를 정도였습니다. 일단 시작하고 보니, 생각하지도 못 하고, 기억조차 없던 물건들이 많이 쏟아졌습니다. 언제 사용했는지 모를 뿐만 아니라, 매일 보면서도 그 자리에 있는지조차 잊고 지낸 것도 많았습니다. 그릇이나 반찬통에는 만들어진 시기가 기록되지 않아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0년 이상 된 그릇들, 혹은 그 이상 된 물건도 적지 않았습니다.

 

저희 집만 그렇지는 않죠. 대부분 간단하게 쓸고 닦고 할 때는 모르는데, 모든 수납장을 열고, 전체를 청소하면, 어느 집이나 비슷할 듯합니다. 더 이상 쓰지도 않고, 쓸 수도 없으면서도, 아주 오랫동안 어수선하게 자리하고 있던 물건이 있습니다. 나중엔 워낙 오래되고 익숙해져, 그곳에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자리만 차치하던 물건들이 있습니다.

 

왜 쓰지도 않는 물건을 버리지 않고, 계속 가지고 있을까요? 예전처럼 우리나라가 먹지 못 할 만큼 못 살았다면, ‘너무 아까워서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은 그런 말이 설득력을 갖지 못 할 만큼 우리나라는 풍족하게 먹고, 넉넉하게 누리게 되었습니다.

 

쓰임새나 보관의 가치를 대부분 잃어, 쓰레기에 가까워진 물건을 계속 가지고 있는 이유는 대부분 어쩌면...’이 정도면...’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청소하며 쓰레기로 나온 대부분이 플라스틱 제품이었다는 사실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플라스틱 제품이 가진 여러 가지 특징들이 있습니다. 원하는 대로 모양을 바꿀 수 있고, 가볍습니다. 또 충격에도 아주 강해서, 수명이 아주 깁니다. 밖에 놔두어도, 몇 개월은 끄떡없고, 햇빛 안 드는 곳에 두면 몇 년은 이상 없이 버팁니다. 이 때문에 플라스틱 제품이 없는 집이 없습니다.

 

쓰임새도 다양하고, 오래 사용되니, 당장 쓰지 않으면서도, 언제 어떻게 쓰일지 모른다는 계산 때문에 쉽게 버리지 못 합니다. 자리만 차지한다고 버렸다가, 필요할 때 다시 돈을 들여야 하면 아까깝습니다.

 

하지만,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필요할 때 어떻게 기억해 내고, 어떻게 이용할 수 있겠습니까? 거의 틀림없이 그렇게 해서 수년 동안 자리만 차지하고, 집만 지저분하게 만들게 됩니다. ‘어쩌면...’이라는 아쉬움과 이 정도면...’이라는 욕심 때문에 쓰레기에 가까운 것들을 버리지 못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청소할 때마다 다툼이 일어납니다. 치우려는 사람은 1,2년 사용하지 않은 물건이 다시 사용될 가능성은 없다고 보고, 처리하려 합니다. 반면, 계속 쌓아놓고, 보관하려는 분들은 아깝다” “언제라도 쓸 수 있다등의 이유로 버리지 못 하게 합니다. 그렇게 다시 수년 동안 자리만 차지하다, 대청소를 할 때에야 비로소 그런 물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이를 보면, 집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가치의 폭을 좁게 봐야 합니다. 분명한 목적이 있는 것만 놔두고, 구체적인 계획이 없는 나머지는 깨끗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어쩌면...’이라는 생각과, ‘이 정도면...’이라는 생각이 들 때는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이는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맞이하는 삶의 방향과 내용이 달라집니다. 지혜롭게 선택하고, 지혜 위에 삶을 세워 가면,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어리석게 선택하고, 어리석음 위에 삶을 세워 가면 위태로워지고, 망하게 됩니다.

 

문제는 삶의 기준들이 분명하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숫자처럼 분명하게 떨어지지도 않고, 눈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기준도 분명하지 않고, 선택의 결과마저 쉽게 확인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각자 자기 나름의 계산과 판단으로 선택하는데, 욕심에 눈이 멀어 살 수 있는 길을 뒤로하고, 죽을 길을 향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과 평안이 약속된 길과 방향을 명확하게 정해 놓으셨음에도, 하나님의 길을 그대로 믿고 따라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길과 방법에 여러 변명과 이유로 타협하려 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길을 듣고 알면서도,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이 정도쯤이야...’ 하며 갓길을 조금씩 냅니다. 여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면, 하나님의 약속 위에 다른 통로와 길을 냅니다. ‘갓길 하나 내나, 길을 하나 내나 별반 다르지 않다며 변명의 여지마저 만들어 놓았습니다.

 

생명이 보장된 길이 있음에도, ‘혹시...’ ‘그래도...’ 라는 계산에 조금씩 벗어나고, 어긋나다 보면, 결국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서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후회해 봤자 이미 늦습니다. 죽음을 생명으로 바꿀 수 없고, 실패와 멸망을 성공과 부흥으로 바꿀 수 없습니다.

 

늘 본문에는 시므이라는 사람이 마지막을 맞이하는 이유와 모습이 기록되었습니다.

 

시므이는 다윗 왕 시대에 있던 사람입니다.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도망해야 하는 비참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왕이지만 쫓겨 가야 하는 상황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고통입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쫓겨 왕궁을 떠나야 하는 이유가, 바로 자기 아들의 반역 때문이라 고통에 수치까지 더해졌습니다.

 

몇몇 군사들과 신하들을 이끌고 피난길에 오른 다윗의 비참한 상황을 시므이가 이용합니다. 본인은 사울 왕의 친척인데, 사울 왕이 죽고, 다윗이 왕이 되었으니, 다윗의 모든 점이 싫었습니다. 다윗이 왕이라 조용히 지냈다가, 다윗이 모든 권력을 잃고, 비참한 상황이 되자, 다윗에게 돌을 던지며 저주와 조롱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러나 시므이의 큰소리는 오래 가지 못 합니다. 다윗이 반역 세력을 무찌르고, 다시 왕궁으로 돌아오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저주의 돌을 던진 시므이는 살기 위해 급하게 엎드려 용서를 빕니다. 다윗으로서는 시므이를 죽여도 상관없지만, 살려 둡니다. 대신 당시 받은 충격과 모멸감이 사라지지 않아서, 솔로몬에게 시므이를 잘 처리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어, 자기 아버지 다윗의 유언대로 시므이를 죽여도 되지만, 솔로몬은 시므이를 감옥에 가두거나 처형하는 대신에, 집 밖으로 나오지 못 하게 하는 형벌을 내립니다. 시므이 본인도 가택 연금 정도로 처벌이 마무리되자 인정하고, 고마워합니다. 그렇게 3년의 시간이 지나기까지, 시므이도 집 밖으로 나가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매일 조심하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긴장과 두려움 속에 살던 시므이는 3년 동안 지켰던 가택 연금을 어기게 됩니다. 자신이 부리던 종들 중에 둘이 옆 나라인 가드로 도망했는데, 이들을 찾아오기 위해 가드 지역까지 갔습니다. 이 때문에, 그 동안 시므이에게 선택하고,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솔로몬도 결국 시므이를 처형하게 되었습니다.

 

시므이가 왜 이렇게 어리석은 선택을 내렸을까요? 자신이 집 밖을 나가면 처형당한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지키고 찾아야 하는 경우도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종 둘을 찾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면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시대마다 또 나라마다 종의 가치가 다르죠. 지금으로부터 1,2백 년 전 조선시대에 노비의 몸값은 말의 1/4밖에 안 되었다고 합니다. 노비 넷이 말 한 마리 가치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속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약 3천 년 전입니다. 종의 몸값이 조선시대보다 높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므이가 목숨을 버리고 찾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그 누구보다 시대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또 계산에 철저했던 시므이가, 단지 도망간 종들이 아까워서 목숨을 걸었다고 하기엔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 외의 또 다른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36절에서 솔로몬이 시므이에게 너는 예루살렘에서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거기서 살고 어디든지 나가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집에서 지내고, 집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38절에서 시므이도 그렇게 하겠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럼에도 시므이가 큰 가치가 없는 종들을 위해 가드라는 지역까지 감으로써, 죽임을 당한 이유는, 왕의 명령을 자기 욕심대로, 자기 맘대로 엉뚱하게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시므이에게 가택 연금을 명령했습니다. 당장은 죽이지 않겠지만, 전에 지은 큰 죄 때문에 집 밖으로 나가면 죽임을 당한다는 처벌입니다. 그리고 37네가 나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니는 명령을 내립니다. 기드론 시내는 예루살렘 안에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시므이가 찾아간 가드 지역은 5,60km 떨어져 있습니다. 여기로 설명하면, 복룡 마을 도로를 건너면 죽는다고 했고, 시므이가 종을 찾으러 간 가드 지역은 광주 정도 떨어져 있고, 방향도 정반대입니다.

 

시므이가 가택연금 중임에도 하찮은종들을 찾아간 이유를 엿볼 수 있습니다. 복룡 마을 도로를 건너지 않으면 된다고 멋대로 해석했습니다. 집 밖을 벗어나면 죽는다는 왕의 명령과는 상관없이, 기드론 시내만 건너지 않으면 된다고 자기 멋대로 기준을 세우고 판단했습니다.

 

시므이가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었으면 이렇게 하지 않았겠죠.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고, 왕으로부터 죽음 대신에 집에서만 머물라는 명령을 받았으면, 이를 가장 큰 기준으로 여기고, 어떤 이유에서도 이를 어겨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시므이는 왕이 내린 명령의 본뜻이 무엇인지는 생각하지 않고, 대신 예시로 말한 기드론 시내만 생각했습니다. 욕심의 눈으로 왕의 명령을 해석하고, 받아들이고 보니, 정반대 방향에도 수십 km 떨어진 가드 지역까지 가도 괜찮아 보였습니다. 왕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왜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습니다. 생사 여부를 결정하는 왕의 명령마저 자기 욕심을 기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욕심 위에 자기 삶을 세웠습니다.

 

욕심의 반경을 조금씩 넓혀 갔습니다. 죽어도 할 말 없는 자신을 죽이지 않는 다윗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자신을 처형하지 않고, 가택연금을 명령한 솔로몬에게도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마음이 느슨해지고, 다시 욕심과 욕망이 커지자, 자기 죽을 일인 줄도 모르고 종을 찾아 나섰습니다. 정말 도망한 종이 아깝고, 꼭 찾아와야 한다면, 다른 사람을 시키고, 자신은 집에 머무는 방법도 있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보면, 시므이의 마음속 어쩌면...’이라는 계산과 이 정도는...’이라는 욕심 때문에 죽음을 맞이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죽임을 당해도 마땅하지만, 왕의 자비로 기회를 얻었으면, 잘못을 뉘우치며 말과 행동을 더욱 신중해야 했습니다. 왕의 명령을 더 신중히 받아들이고, 자기 욕심을 더 줄이며 살았으면, 수명을 충분히 누릴 수 있었습니다.

 

시므이의 모습을 통해, 복과 평안과 은혜를 누릴 길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복과 생명을 약속하신 길에서 떠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복과 은혜를 약속하신 삶의 경계에서 물러서지도 말아야 하고, 넘어서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 어떤 이유로도,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에 욕심과 거짓을 섞어서도 안 됩니다.

 

이 과정이 분명 힘들고 어렵습니다. 답답하고 재미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편하기 위해, 더 즐기기 위해, 더 쉽게 살기 위해,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타협하다 보면, 어느새 멸망과 실패의 끝자리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시므이를 통해, 저주와 고통과 실패를 피할 길이 무엇인지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더 엄격하게 적용하며, 믿고 따라 사는 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는 더 엄격하고, 자신에게는 기준을 더 느슨하게 적용시킵니다. 자신을 주인과 주인공으로 삼으려는 못된 본성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생명과 복의 길이 아닙니다. 실패와 멸망의 길입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는 낮고, 쉬운 잣대를 드리우고, 자신에게는 더 엄격하게, 더 분명하게 적용시켜야 합니다.

 

가치 없는 것들을 과감하게 버리고, 귀한 것들을 향해 매일의 삶을 만들어 가면,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성공과 복의 테두리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죄와 죽음과 실패의 테두리에서 더욱 멀어지고, 매일 희망과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과 죽음의 기준을 만드셨고, 그 경계를 말씀을 통해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경계를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모양이 달라집니다.

 

자기 욕심을 따라, 왕의 기준을 벗어남으로써 죽음을 맞이한 시므이의 어쩌면..’이 정도면...’이라는 어리석은 태도를 철저히 버리고, 하나님께서 그려 놓으신 기준과 경계 안에 언제나 머물고, 따라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과 생명을 날마다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