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220213)하나님의 마음에 들도록(왕상 3장 1-15절)

청명하늘 2022. 2. 13. 14:13

하나님의 마음에 들도록

 

성경: 열왕기상 31-15(514)

찬송: 449(예수 따라가며), 430(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설교: 20220213.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견월망지’(見月忘指)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그대로 해석하면, ‘달을 보면 가리키는 손가락은 잊어라는 뜻인데, 보통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끝을 보지 말고, 달을 쳐다보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가리키는 달은 보지 않고, 달을 향한 손가락만 본다는 뜻으로서, 본래 의도나 목적과는 상관없이 겉모양이나 부수적인 것에 얽매이는 잘못된 현상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말이 사용될 수 있는 상황이 많겠지만, 성경을 해석하는 과정에서도 똑같은 실수를 많이 보곤 합니다. 성경이 기록된 시대와 상황은, 지금과는 너무 다르죠. 그래서 해석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어떤 상황에서 어떤 목적으로 기록되었는지를 살피고, 풀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으로 기록되어 전해졌지만, 이를 그대로 읽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잘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해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해석도 단순한 의미를 살피는 정도에 그쳐서는 안 되고, 시대와 상황을 넘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작업을 거치지 않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단은 말할 필요도 없고, 정통 교단에 속해 있는 목회자들과 교회들도 이런 실수를 범할 때가 많습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과 자료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해졌습니다. 2,3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만큼 성경을 해석하는 시각도 다양합니다. 자료가 많고, 다양한 시각에서 해석한다는 사실은 좋지만, 성경의 본래 의도와 목적과는 동떨어진 해석이 나올 가능성도 훨씬 커졌습니다. 성경에 맞춰 해석하기보다, 반대로 자기의 뜻과 목적을 위해 해석하고, 또 그렇게 설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도, 본래 뜻과는 상관없이 엉뚱하게 해석되는 대표적인 본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신앙인들에게 아주 잘 익숙하고, 또 설교로도 많이 이용됩니다.

 

헌금 종류가 교회마다 다양한데, ‘일천번제가 있는 교회가 적지 않습니다. ‘천 번 드리는 번제라는 뜻입니다. 이름대로 작정한 금액을 매일 드려 천 번 드립니다. 하루에 1,000원이면, 1백만 원이고, 5천 원이면 5백만 원이 됩니다. 3년 가까운 기간 동안 매일 정한 금액을 드린다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겠습니까? 웬만한 정성과 다짐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일천번제라는 헌금이 교회에서 이용되는 이유는 오늘 본문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소원을 묻자, 왕으로서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도록 지혜를 달라고 합니다. 보통은 장수와 부와 힘을 구하는데, 자기의 사명을 위해 지혜를 구하자, 하나님께서는 지혜도 주시고, 더불어 부와 영광도 주겠다 약속하셨습니다. 일천번제를 통해 소원을 이루고, 복을 받는다는 근거로 이용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 일천번제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소원을 들어 주시고, 그 이상으로 복을 주신다는 해석이 맞을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천번제를 좋아하신다고 말씀하실까요? 일천번제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는 사실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기록해 놓은 말씀일까요? 이렇게 보기엔 어렵습니다.

 

먼저, 일천번제는 번제를 하루에 한 번씩 해서, 1,000일 동안 1천 번 드렸다는 뜻이 아니고, 제물을 천 마리 드렸다는 뜻입니다. 두 가지는 차이가 있습니다. 매일 한 번씩 1천 번을 드리려면, 3년 가까이 걸립니다. 왕으로서 하나님을 섬겨야 하지만, 그렇다고 제사 드리는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들이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나라는 누가 다스리겠습니까?

 

왕으로서 가장 중요한 사명은 제사를 많이 드리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말씀과 계명에 따라 나라를 이끄는 왕을 기뻐하시지, 나라의 일은 뒷전이고, 제사만 많이 드리는 왕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통해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이유는, 횟수 때문도 아니고, 오랜 기간 제사를 드린 때문도 아닙니다. 본문 10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는 말씀처럼, 솔로몬의 정성과 노력과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번제는 온전함온전한 헌신’ ‘온전한 감사등을 뜻하고, 사용될 수 있는 제물이 정해져 있습니다. 또 형편에 따라 드릴 수 있는 제물이 달랐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비둘기를 드릴 수 있었지만, 형편이 괜찮은 사람들은 수소, 수양, 수염소 등입니다. 솔로몬은 왕이니, 수소를 드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소는 가축 중에서 가장 비싸고 귀합니다. 하물며 약 3천 년 전에는 어땠을까요? 솔로몬이 왕이라 하지만, 천 마리를 드리는 일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여건이 되고, 그만한 권력이 있는 왕이라 하더라도, 그만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헌신하기로 다짐하기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만약 솔로몬의 믿음이 작았다면 일천번제를 드릴 수 없습니다.

 

아무리 부자라 하더라도, 가질수록 더 많이 갖고자 하는 마음이 인간의 욕심입니다. 하물며 양이나 염소 한두 마리를 잡아 바치는 일도 쉽지 않은데, 천 마리를 제물로 바칠 정도였다면, 웬만한 믿음, 웬만한 확신이 없으면 절대 불가능합니다. 수입의 10분의 1을 바치는 과정도 쉽지 않은데, 하물며 재산의 아주 큰 부분을 바치는 일이 쉽겠습니까?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렸다는 사실은,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감사와 헌신의 다짐이 얼마나 크고 대단했는지를 알려줍니다. 자신이 가진 전부를 바칠 만한 수준이었습니다. 더 많이, 더 크게 갖고자 하는 욕심을 억누를 만큼 확고했습니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렸다는 사실보다, 일천번제를 드릴 만한 믿음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만약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리면서, 비둘기 천 마리를 드렸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을까요? 숫자로만 본다면, 비둘기로 천 번 드리면 일천번제가 맞습니다. 게다가 비둘기도 번제로 드릴 수 있는 제물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단순히 많이 드리는 제사 자체만을 인정하셨다면, 솔로몬이 비둘기로 일천번제를 드려도 받으셨겠죠.

 

그러나 비둘기는 형편이 어려운 이들이 드릴 수 있는 제물입니다. 형편이 정말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 천 마리 비둘기를 드렸다면, 하나님께서는 역시 기뻐하시고 인정하셨겠죠. 하지만 솔로몬처럼 넉넉히 가진 사람, 양이나 염소나 소를 넉넉히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비둘기를 드렸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일천번제가 아니라, 일만 번제를 드려도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 속에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확신이 대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을 온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해 섬기는 사람이 너무 가난해서 귀하고 비싼 제물을 드릴 수 없다면 어떨까요? 정말 드릴 만한 여건이 안 되어서, 비둘기 한 마리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까요? 한 번만 드렸다고, 게다가 하찮은 비둘기를 바쳤다고,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실까요? 하나님께서 싫어하실까요?

 

이에 대한 답을, 오늘 본문으로부터 약 천 년이 지난 후, 예수님께서 주셨습니다. 당시 종교인들은 하나님을 섬길 때, 겉모양과 드리는 양과 횟수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이는 모양과 크기에 따라 복과 응답을 달리하신다고 여겼습니다. 많이 드리는 부자들은 이를 자랑스워며 내세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확실한 답을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211-4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과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셨습니다. 부자들은 형편이 풍족하니,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많이 넣었습니다. 하지만 과부는 겨우 두 렙돈을 바쳤습니다. 당시 화폐 단위로서는 가장 작은 금액입니다. 당시 노동자 하루 임금이 1데나리온이고, 렙돈은 1/128입니다. 이해를 쉽게 하면, 하루 품삯이 128,000원이면, 렙돈은 1천원입니다. 두 렙돈이니 2천 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고 하시면서,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금액만 보면, 과부가 드리는 두 렙돈은 너무 하찮습니다. 부자들의 씀씀이는 가난한 과부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과부가 평생 살아오면서 드리는 모든 헌금액보다, 부자가 그 시간 한 번에 드린 금액이 훨씬 클 수도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액수와 제물의 종류에 따라 마음이 움직이고, 그에 따라 복과 응답을 달리하신다면 어떻겠습니까? 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히 부자들이 드리는 헌금을 기뻐하시고, 더 큰 복과 은혜를 베푸십니다. 푼돈을 드린 과부에게는 눈길조차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헌금액이나 횟수를 보시지 않습니다. 그 속에 담긴 간절함과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마음을 보십니다. 이를 기준으로 보면, 두 렙돈의 극히 작은 금액이지만, 그 속에 간절한 믿음과 마음이 담겨 있기에,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특별한 인정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치는 제물의 종류나 크기나 횟수보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마음을 보신다는 사실은, 솔로몬에게 복을 약속하시면서 덧붙인 본문 14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는 말씀에서 확인됩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시고, 솔로몬이 왕으로서 백성들을 다스릴 만한 지혜를 구하자, 지혜와 더불어 부귀와 영화까지 주겠다 약속하셨습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다른 조건 없이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14절에서는 장수의 복에 대해서는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길대로 행하며, 하나님의 법도와 명령을 지켜야만 장수할 수 있습니다.

 

지혜, 부귀, 영광, 장수 모두 귀합니다. 귀하지 않은 것 하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중에서 무엇이 가장 귀할까요? 지혜롭지 않아도, 부귀와 영광과 장수를 누리는 사람 있겠죠? 부자가 아니지만, 지혜롭고, 영광을 누리며 오래 사는 사람도 역시 괜찮아 보입니다. 많은 사람으로부터 인정받지 못 하지만, 지혜롭게 부귀와 장수를 누리는 삶도 나름 괜찮습니다.

 

하지만 지혜도 얻고, 부귀와 영광을 모두 얻었는데, 일찍 세상을 떠난다면, 지혜와 부귀와 영광은 얻는다 하더라도,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오래 살아야 지혜를 펼칠 수 있고, 부귀와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네 가지 모두 좋고, 꼭 필요하지만, 살아야 누릴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장수는 반드시 필요하고,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장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길과 법도와 명령을 지켜야 한다는 조건을 내거셨습니다. 바꿔 보면, 만일 다른 모든 복과 은혜를 받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서 벗어나면, 이를 누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변치 않는 믿음과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고,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기도의 응답을 받되, 넘치게 받는 모습을 통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복과 응답을 받을 수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신앙인들의 생각처럼, 일천번제를 드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과 감사를 키워야 합니다. 일천번제의 횟수와 금액을 드리는 것보다, 일천번제를 드릴 만한 믿음과 사랑으로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천 번의 제사를 드리는 일보다, 천 번의 제사마저도 아까워하지 않고, 담대히 드릴 수 있을 만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가진 모든 것을 드려도 아깝지 않고, 모든 것을 드려도 아까워하지 않을 만큼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런 믿음과 사랑이면, 천 번의 제사가 아니어도 하나님은 천 번의 제물로 받으십니다. 이런 수준으로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면, 가난한 과부처럼 푼돈밖에 드리지 못 해도, 부자의 헌금보다 훨씬 크게 받으십니다. 이런 믿음과 확신으로, 하나님이 복을 약속하신 말씀과 방식으로 삶을 채워 가면, 이 땅에서 복을 누릴 수 있는 삶이 길어지고, 복의 영역이 점차 넓어집니다.

 

솔로몬은 우리에게 기도가 응답받고, 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중심을 보시기에, 우리가 드리는 겉모양이나 횟수나 금액에 따라 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무엇을 담고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따라 사느냐에 따라 달리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참된 믿음과 큰 사랑으로 하나님을 향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기뻐하시고, 인정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과 사랑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이 바라시는 대로, 말씀과 계명 안에서 살며, 하나님의 방식대로 삶을 채워 가야 합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향한 특별한 사랑과 확신으로 제사함으로써, 하나님의 인정과 복을 받았습니다. 솔로몬이 보여준 길을 기억하고, 언제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인정하실 수준과 모습으로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부귀와 영광과 장수의 복까지 모두 함께 누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