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220227)은혜로 기억하며 감사하십시오(왕상 4장 1-34절)

청명하늘 2022. 2. 27. 14:53

은혜로 기억하며 감사하십시오

 

성경: 열왕기상 41-34(516)

찬송: 254(내 주의 보혈은), 428(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설교: 20220227.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1592년에 왜적이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이때가 임진년이라서 임진왜란이라고 부릅니다. 부산포로 침입한 왜적은 두 달만에 한양에 이르게 됩니다. 지금처럼 도로가 좋아도, 10일정도 걸어야 하는 거리입니다. 지금으로부터 400년도 더 된 시기라 도로 상황도 좋지 않고, 또 수많은 군수물자를 가지고 가야 하는 상황이라면 훨씬 더 많이 걸릴 수밖에 없죠.

 

그런데 두 달만에 한양까지 갔다는 건, 말 그대로 거침없이 갔다는 뜻입니다. 적이 우리 땅을 공격해 왔으면, 죽을힘을 다해 막아야 합니다. 적군이 부산에서 단 두 달만에 한양까지 이르렀다는 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군사가 많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당시 조선이 얼마나 전쟁을 대비하지 못 했는지, 또 맞서 싸우는 군사들이 얼마나 적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왜군이 한양까지 막힘없이 올라오자, 당시 임금인 선조는 궁을 버리고 평양으로 도망합니다. 임금이 절대적인 힘을 갖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임금과 그 가족이 맘대로 누리며 살라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힘으로 나라를 잘 이끌어서, 모두가 잘사는 곳으로 만들라는 의미입니다.

 

적이 침략해서 나라 곳곳이 파괴되고, 백성들은 어떻게 할지 모르고 우왕좌왕합니다. 가장 큰 힘을 가진 임금은, 군사와 신하를 잘 통솔하고, 지휘해서 적을 막고,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선조는 자기 살고자 나라와 궁을 버리고, 평양으로 도망했습니다. 그나마 이순신장군을 비롯한 수군이 목숨 걸고 싸워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물리쳐서 위기를 넘겼습니다.

 

선조가 자신의 책임과 사명을 알고, 자기가 잘못 행했음을 알 만한 그릇이었다면 이후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최소한 미안한 마음이라도 가져야 하고, 공을 세운 장군과 신하들에게 상을 주어야 합니다. 언제 다시 침략할지 모르는 적도 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선조는 가장 큰 공을 세운 이순신장군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나마 다시 패망 직전에 이르자, 이순신장군의 모든 지위를 박탈하고, 백의종군시켰습니다. 왕명을 거역했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진짜 이유는, 자신은 백성들로부터 원성과 무시를 받는데, 이순신 장군은 높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지 않고, 충신들이 목숨 걸고 싸우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나라는 망하고, 선조는 임금으로서 나라를 계속 다스리지 못 했겠죠. 당시 중국 명나라에 가서 빌붙어 살든지, 아니면 왜군에 정복되어 비참하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임금이면서도 자기 살고자 백성과 궁을 버리고 떠난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자신의 무능하고, 이기적인 행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임금으로 인정해 주는 백성들에게 고마워해야 하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며 싸운 이들에게 상을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공에 따라 상을 주는 과정에서도, 선조는 무능하고 어리석은 모습을 보입니다. 조선 수군을 패망 직전으로 몰고 간 장군에게 가장 큰 상을 주기도 하고, 자신과 함께 피난한 신하들에게 큰 상을 주었습니다. 심지어는 환관들 중 24명이 큰 상을 받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본바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자기중심으로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이익이 되는 일일 때는 앞서려 하고, 손해가 될 때는 뒤돌아섭니다. 인정과 높임을 받을 때는 가장 앞에 자리하고, 책임과 수고가 있을 때는 가장 뒤에 서려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말처럼, 받고 누린 혜택과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하고 보답하기보다는, 오히려 손해와 피해들을 오랫동안 기억하는 특징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약, 선조처럼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사람이 곁에 있다면, 당연히 미워하고 싫어할 것입니다. 할 수만 으면, 그런 사람을 멀리하려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은혜를 돌에 새깁니까? 물에 새깁니까? 기쁘고 좋은 일이 있을 때, 돌에 새겨 언제나 기억하며 감사합니까? 아니면, 선조처럼 받은 은혜와 사랑을 물에 새긴 것처럼, 금세 잊고 있지는 않습니까? 은혜는 금세 있으면서도, 막상 힘들고 어려운 때는, 이루지 못 하고, 받지 못 했다며 서운함을 응어리로 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본문은, 솔로몬이 왕이 된 후, 더 강해지고 부유해진 이스라엘의 모습을 여러 가지로 나누어 알려주고 있습니다. 지역마다 솔로몬이 거느린 관리들과, 관리들이 이끈 지역이 19절까지 기록되었습니다.

 

20절부터는 솔로몬이 가진 부귀영화가 기록되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영토는 이집트 국경에 이르기까지 넓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다, 모세의 지도를 통해 탈출해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게 되죠. 이집트를 탈출하는 시기에 대한 의견이 좀 나뉘긴 하지만, 열왕기상 61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 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년 시브월 곧 이월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는 말씀을 보면, 500년이 안 되었습니다.

 

5백 년 전에 종으로 살던 민족이 새로운 땅에 자리를 잡고, 계속 유지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요? 그렇다고 강한 군사력도 없습니다. 갈 만한 땅이 정해지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광야에서 40년을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녀야 했으니, 주변의 강한 민족들에게 정복당할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500년의 세월이 흘러서, 전에 종으로 살던 나라와 국경을 맞댈 수 있을 만큼 나라가 넓어지고 강해졌습니다.

 

또 궁전에서 사용되는 여러 가지 재료들이 기록되었습니다. 밀가루가 매일 1,000포 이상이 사용되었습니다. 살진 소가 30마리, 양이 백 마리가량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사슴, 노루와 새들까지 엄청난 양을 소비했습니다. 나라 전체에서가 아니라, 궁에서 매일 사용되는 재료들입니다.

 

나라가 넓어지고, 부유해진 것만이 아니라, 군사력도 크게 강해졌습니다. 26절부터 전차를 끄는 말을 두는 외양간이 사만 칸이나 되었고, 군마가 만 이천 필이나 되었다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500년 전에는, 다른 나라에서 탈출해, 광야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던 민족이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운데, 이처럼 강하고, 부유해졌습니다. 먹을 음식이 없어서, 마실 물이 없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로 인해 40년을 광야에서 돌아다녀야 했던 민족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발전한 이스라엘의 모습이 오늘 본문 전체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기록해 놓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순히, 약하고 어렵게 살던 이스라엘이 이 정도로 성장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일까요? 아니면, 나라를 이 정도로 발전시킬 만큼, 솔로몬 왕의 능력과 지혜가 대단하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서일까요? 전혀 잘못된 해석이라고 보긴 어렵지만, 그러나 본문이 나온 상황과 앞의 내용과 연결해 푸는 게 좋습니다.

 

오늘 본문 앞 3장에서는,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리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꿈에서 나타나셨습니다. 솔로몬이 백성을 재판할 수 있는 지혜를 바라자, 하나님은 이 모습을 마음에 들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구한 지혜도 주시고, 구하지 않은 부귀와 영광까지 주겠다 약속하셨습니다.

 

일천번제를 드린 후 솔로몬의 꿈에 나타난 모든 내용이 실제였음을 그 다음 사건을 통해 증명합니다. 솔로몬이 백성들을 재판할 만한 지혜를 구했고, 구한 지혜를 받았기 때문에, 서로 자기 아들이라 주장하는 두 여인 중에서 진짜와 가짜를 가릴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솔로몬이 부귀와 영광까지 받아 누렸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이스라엘의 생활수준, 영역, 군사력까지 세세하게 기록함으로써, 이스라엘이 그 동안 한 번도 겪어 보지 못 할 만큼 강해지고, 부유해졌음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부강해졌다는 말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솔로몬은 자신이 가진 지혜와 부귀와 영광까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음을 알고, 인정하고, 알려준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솔로몬이 지혜와 부귀와 영광을 모두 자기 덕분으로 생각했으면 어떻게 기록했을까요? 기록하는 내용과 방식이 달라집니다. 만약 솔로몬이 자기 능력을 자랑하고, 자기 덕분으로 이스라엘이 이 만큼 발전했다고 교만하게 생각했다면, 3장에 나온 일천 번제를 드린 후 꾼 꿈의 내용을 기록하지 않으면 됩니다.

 

돈이 아주 많은 사람이 어떤 경우에 더 대단해 보일까요? 부모로부터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아 누린 사람이 더 대단해 보입니까? 아니면, 부모나 다른 누구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 했지만, 사업을 잘 해서 크게 부유한 사람이 더 대단해 보입니까? 당연히, 아무것도 없는 형편이었던 사람이, 열심히 노력해서 쌓아올린 부귀가 훨씬 더 대단하고, 더 크게 인정받습니다.

 

솔로몬의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솔로몬이 지혜와 부귀와 영광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고 하지 않고, 스스로 애써서 쌓아올렸다고 하면 훨씬 더 대단해 보일 수 있습니다. 힘들고 어렵게 살았던 나라를 몇 년 사이에 부강하게 만드는 임금이면 얼마나 멋져 보입니까?

 

그럼에도 솔로몬은 이를 역사로 기록해 모두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자신이 꿈을 꾸었으니, 이를 말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알 수 없음에도, 3장의 꿈 속 이야기를 기록함으로써, 솔로몬은 자신이 받고 누린 모든 은혜와 부귀와 영광까지 철저히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음을 인정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대단한 이유는, 단순히 지혜와 부귀와 영광을 크게 받았다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분별할 만한 지혜를 가졌다는 데에도 있지 않습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는 점 때문에 솔로몬이 특별한 게 아닙니다. 오직 자신이 받은 은혜와 능력과 복을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알고, 모든 사람 앞에서 인정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물에 새기지 않고, 돌에 새길 줄 알았다는 점이 대단합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야고보서 46절 말씀을 통해 보면,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특별하다 할 만큼, 크고 놀라운 은혜와 복을 주신 까닭을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했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기억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은혜와 복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음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라고 힘들고 어려운 일이 없었겠습니까? 불평할 만한 일이 왜 솔로몬이라고 없었겠습니까? 그럼에도 솔로몬은 불평과 원망을 물에 새기고, 하나님을 향한 감사를 마음의 돌에 새기며 인정했습니다.

 

솔로몬의 이런 모습이 뭐 대단하냐? 나도 솔로몬처럼 크게 많이 받으면 그 정도로 인정하고 감사하겠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각자 살아온 과정을 돌아보면 어떻습니까? 솔로몬처럼 크게 많이 받지 못 했다 하더라도, 분명 잘되고, 이루고, 누린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과연 그마저도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누렸다고 인정하며 감사했습니까?

 

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에서, 감사의 내용들을 기록한다면 몇 가지나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언제 어느 시간까지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반대로 불평과 불만을 기록한다면 몇 가지나 기록하고, 어느 시기까지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감사와 불평불만 중에 어느 쪽이 더 많습니까? 감사할 일과 불평하고 원망할 일들 중에 어느 쪽이 더 오랫동안 기억되었습니까?

 

바라는 일들은 끝없이 많습니다. 그 이유까지 제법 잘 설명할 수 있을 듯합니다. 불평하고 원망할 일들도 그에 못지않게 많아 보입니다. 이 두 가지를 책으로 기록하다 보면, 절대 얇지 않은 책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감사로 기억하고, 인정할 만한 일을 세어 보니 금세 동나고 맙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멋진 말로 자세하게 표현하고 싶어도, 몇 마디 말이면 어느새 끝나고 맙니다. 감사하는 기간도 너무 짧습니다. 아무리 크고 대단한 은혜를 받았어도, 감사의 기간이 그리 오래 가지 못 합니다.

 

저 혼자만의 모습뿐이겠습니까? 본래 이기적이고,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받아 누리는 은혜를 물에 새기고, 원망과 불평을 돌에 새기긴 우리 모두가 똑같은 모습 아닙니까? 불평과 원망의 폭과 너비를 점차 키워가면서도, 감사에 대해서는 모두가 까탈스러운 입맛을 드러내고 있지 않습니까?

 

누구나 솔로몬과 같은 지혜와 부귀와 영광을 누리길 바랍니다. 이를 소망하며, 믿음으로 구하는 이들도 신앙인들 중에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 이루었고, 지금까지 갖고 누린 은혜를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며, 감사로 기억하며 사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자기의 업적과 능력마저도 겸손히 하나님의 것으로 돌리는 이들은 너무 적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인정함으로써, 더욱 큰 사랑과 은혜를 받아 누렸습니다. 솔로몬의 겸손과, 겸손한 자녀에게 더 큰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본받아 살아감으로써, 날마다 하나님의 새롭고 큰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