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언약궤에 담겨야 할 말씀과 약속
성경: 열왕기상 8장 1-13절(구 524쪽)
찬송: 461장(십자가를 질 수 있나), 200장(주의 말씀 듣고서)
설교: 20220410.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우리나라 기독교는 세계 어느 곳보다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또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형교회들이 많습니다. 교회가 대형화 되면서 여러 문제가 함께 생기긴 하지만, 그만큼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데 남다른 점들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많은 교인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이유가 다양하겠지만,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은사 체험, 목회자의 지도력 그리고 설교를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은사 체험을 통해 성장한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은사 체험이 신앙의 기본이자 가장 큰 줄기입니다. 끊임없이 은사를 사모하고, 이를 통해 체험을 쌓았습니다.
이와는 달리, 목회자가 가진 능력을 통해 교회를 성장시킨 경우도 있습니다. 교회에 필요한 여러 사업을 계획하고, 추진하는 데 특별한 능력을 가진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어떤 일을 해서 사회에 봉사하고 섬겨야 하는지를 잘 찾고, 추진하는 데 특별한 안목과 지혜와 능력을 가진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은사 체험도 아니고, 목회자 개인의 지혜와 능력도 아님에도 성장하는 세 번째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교회는 모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이를 변치 않는 진리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리면서, 성경을 통해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전합니다.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친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지만, 그러나 성경을 해석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방식과 내용은 교회마다 목회자마다 차이가 아주 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전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가장 나쁜 모습들 중 하나는, 설교자가 자기주장을 펼치기 위해, 전혀 상관없는 내용을 성경 여기저기에서 가져와 이용하는 경우입니다. 이보다는 덜하지만, 성경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부족해서, 본뜻과는 별개로 엉뚱하게 해석하고 전하는 경우는 워낙 많습니다.
이처럼, 설교의 홍수 속에 있음에도, 하나님의 바른 말씀이 부족한 때에, 성경 해석과 내용이 바른 교회,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사회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전하고, 가르치고 인도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과 시선을 빼앗을 만한 은사가 크게 나타나지도 않고, 사람들을 모을 만한 사업이 없음에도, 말씀 하나만으로 성장했다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 은사, 목회자의 지도력, 하나님의 말씀이 모두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들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세 가지 중에 무엇을 바탕으로 믿음과 교회를 세워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후 언약궤를 성전으로 옮겨 안치하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같은 예배당이라 하더라도, 더 귀하게 여기고, 조심히 여기는 곳이 있습니다. 예배당의 경우, 대부분 예배 인도자와 설교자가 있는 단상을 더 귀하고 거룩한 곳으로 여깁니다. 아직도 일반 교인이나 어린이들이 단상에 올라오면 안 된다고 여기고, 가르치는 교회들도 많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전에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잘못된 해석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이제는 제사장을 통하지 않고, 믿음으로 직접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모두가 믿음 하나만으로 예배하고 기도할 수 있는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누구나 단상에 올라와 기도할 수 있고, 설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성전 중에서도, 가장 귀하고 거룩한 자리를 ‘지성소’라고 했습니다. 말 그대로 ‘지극히 거룩한 장소’라는 뜻입니다. 일반 백성은 성전에 들어가 제사를 드리고 기도할 수 있었지만, 지성소는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제사장들 중에서도 대제사장만이 1년에 단 한 차례 대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바로 지성소입니다. 얼마나 거룩하고 귀한 곳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6절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자기의 처소로 메어 들였으니 곧 성전의 내소인 지성소 그룹들의 날개 아래라”는 말씀처럼, 언약궤를 성전 안에서도 가장 거룩한 자리에 두었습니다. 성전이 성전으로서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곳에 언약궤가 있어야 합니다.
만약, 아무리 크고 화려하고 웅장하게 지어졌다 하더라도, 그곳에 언약궤가 없다면, 그곳은 그저 단순한 건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만큼 언약궤는 거룩합니다. 성전이 다른 건물과는 다르게 만드는 이유이자 기준입니다. 성전이 있어 언약궤가 있지 않고, 반대로 언약궤가 있기 때문에, 비로소 성전이 됩니다. 성전을 위해 언약궤가 있지 않고, 언약궤를 위해 성전이 있다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9절에 “그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맺으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고 말씀합니다.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을 새긴 두 돌판만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신약성경 히브리서 9장 3,4절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라는 말씀처럼, 본래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 판만이 아니라, 만나와 아론의 지팡이가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해서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있을 때, 음식이 없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새벽마다 내리고, 해가 뜨면 없어집니다. 작고 둥근 씨앗처럼 생겼는데, 만나 약간을 언약궤 안에 보관했습니다.
언약궤에 보관되어 있는 두 번째는 아론의 싹 난 지팡입니다. 민수기 16-18장에서, 고라를 비롯한 250명이 작당해 반역을 일으킵니다. 왜 모세와 아론만 지도자 노릇을 하느냐는 이유를 내세웠습니다. 모세와 아론을 지도자로서 인정하지 못 하겠다는 뜻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열두 가문에서 지팡이에 이름을 써서 하나씩 내라고 하십니다. 아론도 이름을 써서 지팡이를 내고, 다음 날 확인했더니, 오직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고, 살구까지 열렸습니다. 어떤 나무도, 하루아침에 순이 나고, 꽃 피고, 열매까지 맺는 경우는 없죠.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오직 모세와 아론만 선택하셨고, 지도자로 세우셨음을 뜻합니다.
언약궤에는 만나와 아론의 지팡이, 그리고 십계명을 새긴 두 돌 판까지 총 세 가지가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돌 판만 남았습니다. 만나와 아론의 지팡이는 중간에 없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언약궤에 보관되었던 만나와 아론의 지팡이가 언제, 왜 사라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정황으로 보면, 블레셋과의 전쟁 중에 빼앗겼을 때 사라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무엘상 4장에 나오는데, 블레셋과의 전쟁이 불리해지자,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전장에 가지고 나왔다 빼앗겼고, 7개월 후에 블레셋 민족이 언약궤를 돌려줍니다. 이때 블레셋 사람들이 함부로 언약궤를 열고, 훼손하는 과정에서 만나와 싹 난 지팡이가 사라졌을 가능성이 짙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십계명이 기록된 돌 판만 남은 언약궤가 성전에, 성전 중에서도 가장 거룩한 곳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언약궤가 지성소에 놓였다는 사실보다는, 십계명이 기록된 돌 판만으로도 성전이 하나님의 집으로서 온전해진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세 가지 중에서, 만나와 싹 난 지팡이가 사라졌음에도, 가치와 의미를 전혀 잃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언약궤 안에 십계명 돌 판이 있는 한, 언약궤는 단순한 보관함의 의미를 넘어, 성물이 됩니다. 십계명 돌 판이 있는 언약궤는 성전 안에서도,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가장 거룩하고 온전한 지성소에 보관되어야 합니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만나를 여러 가지로 추측하고, 해석하지만, 만나는 이후로는 모습이나 기록조차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연 질서를 넘어서 주신 은혜고 사랑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때의 기억을 통해, 고난 중에 함께하시고, 살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신앙인들에게는 은사 체험이 만나의 역할과 비슷합니다. 자연 질서를 넘어서 일어나고, 이를 계기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새로이 한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나가 사라진 언약궤가 여전히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함과 온전함을 뜻하듯이, 은사 체험 없이도,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인도하시는 은혜에는 전혀 방해받지 않습니다. 은사 체험 없어도, 구원과 영생을 향한 과정에는 문제나 부족함이 전혀 없습니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생기고, 보관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지도자로 세우셨음을 알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론의 지팡이에만 싹이 나자, 모두가 모세와 아론을 참된 지도자로 인정하고 기억했습니다. 이 지팡이가 보관되어 있는 한, 자손들은 모두 모세와 아론의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이 지팡이도 사라졌습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럼에도 언약궤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담긴 성물로서 가치에 아무런 흠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아론의 지팡이가 있기 전에도 언약궤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상징했고, 아론의 지팡이가 사라진 후에도 언약궤는 똑같이 거룩하고 온전했습니다. 성전 중에서도, 가장 거룩한 곳에 두어야 했습니다.
이는 목회자의 지도력과 능력이라는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목회자의 지도력과 능력에 따라 교회의 부흥과 성장이 달라집니다. 하지만 마치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같아서, 있어도 좋지만, 없어도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에 지장을 받지 않습니다. 목회자의 능력이 부족해서, 하나님이 떠나시거나 외면하시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만약 언약궤 안에 돌 판이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돌 판이 사라지고, 아론의 지팡이나 만나만 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러면 더 이상 언약궤가 되지 못 합니다. ‘언약궤’라는 말 자체가, ‘말씀으로 주어진 약속이 담긴 궤’라는 뜻인데, 언약이 없는 궤가 되면, 더 이상 거룩하지 못 하게 됩니다. 가장 거룩한 자리에 놓을 이유와 가치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언약궤 안에 두 돌 판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전달하는 과정과 내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언약궤 안에 십계명 돌 판이 없으면, 그 안에 다른 그 무엇이 들었든, 하나님과 상관없게 되듯이, 교회 안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해석과 설교와 가르침이 없으면, 더 이상 예배가 되지 못 하고, 그곳은 더 이상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언약궤가 하나님의 임재와 말씀을 상징하려면, 십계명 돌 판이 최소와 최대 조건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과 약속은 믿음과 구원과 영생에서 최소 조건이자 최대 조건입니다. 전부라는 뜻입니다. 다른 무엇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과 약속을 잊으면, 더 이상 믿음이라 할 수 없고,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과 약속을 기억하고, 향해 살아가면, 그 자체가 믿음이고 구원이고 영생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집니다. 교회가 건물이 아닌 하나님이 세우시고, 함께하시는 곳이 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적인 계산이나 안목을 섞지 않고, 순수한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예배가 순서와 시간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와 시간이 되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하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허황되지 않고,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과 교회와 예배에서, 은사 체험이나 교회 지도자의 뛰어난 지도력은, 있으면 좋은 정도에 불과합니다. 없어도 아무런 손해나 지장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과 교회와 예배는 모든 가치와 의미를 잃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은, 우리의 믿음과 예배와 교회의 전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있는 한, 다른 그 무엇이 있든 없든, 온전한 믿음이 되고, 온전한 예배, 온전한 교회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잃거나 잊어버리면, 그 무엇이 있든 없든, 헛된 믿음, 헛된 예배, 헛된 교회가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담긴 궤만이, 가장 거룩한 자리에 놓일 수 있습니다. 언약을 품은 신앙인들만이 가장 거룩한 자리에 놓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있기에, 겉모습과 치장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가장 거룩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품는 한, 우리의 조건과 겉모습과 형식과는 별개로 가장 거룩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품고,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 각자가, 또 교회가 나아가야 할 모습이고 방향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품는 자 되기를 바라십니다.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 위에 삶을 세우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 자체만으로 믿음과 구원의 전부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오직 말씀 위에 삶을 세움으로써,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가장 거룩하고 온전한 구원과 영생의 자리에 이르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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