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220417)부활과 더불어(요 11장 17-37절, 부활절)

청명하늘 2022. 4. 17. 18:36

부활과 더불어

 

성경: 요한복음 1117-37(165)

찬송: 382(너 근심 걱정 말아라), 161(할렐루야 우리 예수)

설교: 20220417. 주일낮예배(부활절)

 

 

 

부활절을 맞이해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우리의 생활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물건들이 참 많은데, 그 중 하나가 안경입니다. ‘몸이 1,000냥이면, 눈이 900이라는 말처럼, 눈이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납니다. 우리의 일상을 생각해 보면, 대부분은 시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볼 수 없으면, 불편을 넘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폭은 훨씬 좁아지고 어려워집니다.

 

안경은 우리가 볼 수 있는 폭과 거리를 크게 확장시켜 줍니다. 흐릿하고 겹쳐 보이던 세상이 안경을 쓰는 순간 깨끗해지고 뚜렷해집니다. 흐릿해 도저히 읽을 수 없던 글씨를 읽을 수 있게 합니다. 지불해야 하는 금액에 비해, 누릴 수 있는 편리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세상 발명품들 중에서, 안경만큼 적은 금액으로 큰 효과를 주는 물건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안경이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렌즈 즉, 안경알이 있어야 합니다. 테도 필요하지만, 테는 그저 알을 눈 가까이에 붙잡아 두는 역할을 할 뿐, 안경이 가진 역할은 렌즈가 모두 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안경을 맞추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력 검사를 받아야 하죠. 바꿔 보면, 사람마다 시력이 다르고, 시력에 맞춰 렌즈를 바꾸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만약 시력이 모두 같다면, 시력 검사를 할 필요 없이, 아무 안경이나 쓰면 되겠죠. 하지만 불편함과 시간을 들여서 시력 검사를 하고, 각자 눈에 맞는 렌즈로 바꿔야 가장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보통, 젊은 사람은 근시라 해서 가까운 곳이 잘 보이고, 먼 곳이 안 보입니다. 이에 맞는 렌즈는 오목입니다. 반대로 나이가 들고, 노안이 생기면, ‘원시라 해서, 아주 가까운 곳은 잘 안 보이고, 어느 정도 떨어져야 더 잘 보이는데, 이때는 볼록 렌즈를 써야 합니다.

 

제 연령대가 노안이 시작되는 때라서, 돋보기를 쓰는 친구나 동료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습니다. 안경을 안 쓰던 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돋보기 쓰고, 안경을 쓰던 사람들이 책을 읽기 위해 안경을 벗어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이 나이대가 되었구나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나마 저는 아직 노안이 많이 진행되지 않아서인지, 간혹 다른 사람의 돋보기안경을 쓰면 심하게 어지럽고, 멀미가 날 듯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더 잘 보이고, 뚜렷하게 만들어 주는 돋보기가 제게는 더 불편하고 어지럽습니다. 반대로 돋보기를 쓰는 이들이 제 안경처럼 오목 렌즈를 써도 같은 증상을 겪게 됩니다. 더 작게 보이고, 불편하고 어지럽습니다.

 

이는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집니다. 믿음을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를 바꿈이라는 표현도 좋아 보입니다.

 

대부분은 이 세상만을 향합니다. 이 세상을 전부로 여깁니다. 이 땅에서 사는 몇 십 년 동안 좀 더 갖고, 좀 더 누리기 위해 애씁니다. 오직 이 땅만을 위해 산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다음 세상을 준비하지 않습니다. 더 정확히는 다음 세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까운 곳에 시선과 마음을 빼앗겨, 멀리 있는 곳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영적 근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인간에게 다음 세상이 있으며, 이를 생각하며 살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을 만드신 분이니, 이후의 삶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아십니다. 다음 세상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고, 영원하기에, 이를 먼저 생각하며 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세상만을 향한 우리의 눈에, 다음 세상을 더 분명히 볼 수 있는 렌즈를 덧붙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를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에 따라 살아야만,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있는데, 이 과정을 말씀으로 그려준 지도가 성경입니다. 이 지도를 앞서 걸어가시고, 안내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 동안 영원한 나라를 향한 안내자가 많았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위대한 여러 인물들이 등장했고, 나름 잘 이끌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두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실수와 오류를 범했습니다. 욕심 때문에 여러 죄를 저질렀고, 무지와 무능 때문에 잘못 안내하기를 반복했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최후이자, 최고의 안내자를 보내셨는데, 바로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 동안 성경 속에 나온 수많은 인물들은 죄를 향한 본성 때문에 완벽하지 못 합니다. 모세와 다윗처럼, 아무리 위대할지라도, 죄의 본성 때문에 실수하고 넘어졌습니다. 이들을 따라가면, 어느 정도까지는 잘 갈 수 있지만, 그러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완벽한 안내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한 분뿐이십니다.

 

완벽한 안내자이신 주님 오늘 본문에서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며, 부활을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은 사람을 세 번 살리셨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서는 백부장인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고, 누가복음 7장에서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나사로를 살려 주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와 나인성 과부는 예수님과 특별한 친분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사로는 그 누이인 마리아와 마르다까지 예수님과 가까이 지냈습니다. 본문 앞 2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5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라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특별히 아끼시고 사랑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에,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병들어 위중하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예루살렘과 베다니는 본문 18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리쯤 되매라는 말씀처럼 아주 가까웠습니다. 여기에서 옆 동네까지의 거리밖에 안 됩니다. 서서히 걸어도 30분이면 닿는 거립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서둘러 베다니로 가시지 않고, 며칠 더 머무셨습니다.

 

그 사이에 나사로는 죽었고, 예수님이 나사로의 집에 도착하셨을 때는, 죽은 지 이미 4일째가 되었습니다. 간혹 이해할 수 없는 현상으로, 호흡이 멈추어 관에 들어갔다가 살아나는 경우가 있지만, 죽은 지 4일이라면 이제는 기적조차도 기대할 수 없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위중한 나사로의 상태를 아셨을 때는, 4절에서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합니다. 나사라가 죽었음을 아셨을 때는, 15절에서 오히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 주시고자 하는 뜻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3일만에 부활하신다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의 수준과 크기가 그러하듯, 부활에 대한 이해도 믿음도 크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여러 가지로 설명하시더라도, 눈에 보이지 않고, 겪어보지도 못 한 부활을 예수님의 말씀만으로 믿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를 잘 아셨기 때문에, 나사로를 통해 보여주시고, 믿도록 하시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최소한 당시 나사로의 죽음과 다시 살아난 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말씀하신 내용이 참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믿을 수 있도록 하신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빠인 나사로가 죽은 지 4일이나 지난 후 예수님이 집에 찾아오시자, 마르다가 맞이하며, 예수님이 그 자리에 계셨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거라는 원망의 말을 뱉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살아난다고 말씀하시자, 마르다는 마지막 날 모두가 부활하는 날에 부활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육체의 죽음을 겪은 후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함께 부활한다는 사실을 알고 믿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35절에 보면, 나사로의 무덤에 이르신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왜 나사로의 무덤에 이르러서 눈물을 흘리셨을까요?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셨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죽은 오빠를 두고 슬퍼하는 마리아의 모습 때문에 눈물을 흘리셨을까요?

 

그렇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어 곧 숨이 멈춘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나사로를 고치시려 계획하셨으면, 나사로가 죽기 전에 얼마든지 고치실 수도 있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아셨을 때도,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잘된 일이라 하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을 때, 그곳에 있지 않는 게 오히려 제자들과 따르는 이들에게 잘된 일이라 하시며, 기뻐하셨습니다.

 

게다가 곧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리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나사로의 죽음과 소생이 이미 예수님의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사로를 곧 살리시는데, 죽은 나사로가 불쌍해서 예수님이 우셨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또 곧 있으면, 나사로가 살아나는데, 이를 두고 슬퍼하는 마리아가 불쌍하거나 안타까워서 눈물을 흘리셨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시 나사로를 살리실 계획을 세우셨음에도,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신 까닭은, 우리가 갖는 믿음이 너무 작기 때문이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사로, 마리아, 마르다는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만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도 믿었고, 예수님이 뜻하시면 하나님의 응답을 모두 받으신다고도 믿었습니다. 이후 부활한다는 사실까지 믿었습니다. 이 때문에, 마리아는 자신이 평생 모은 전 재산이라 할 수 있는 나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닦았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보다 믿음이 훨씬 크고 단단해 보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기준에는 모자랐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전능하시다고 고백했지만, 그러나 이미 죽어 썩기 시작한 사람을 살리는 능력까지는 믿지 못 했습니다. 그저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눈 먼 자를 고치시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과 관심을 받고, 또 예수님께 가진 모두를 바칠 수 있었지만,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처럼 전능한 분이라는 믿음에는 이르지 못 했습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과 관심을 받고, 또 특별할 만큼 헌신한 이들의 믿음이 이 정도였으면, 다른 이들의 믿음은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 생명과 부활을 말씀하신 까닭은, 우리가 믿음의 수준을 더 넓히길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주님이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사실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래서 행하시고, 약속하신 모든 내용이 헛되거나 어긋나지 않고, 그대로 이뤄진다는 사실을 알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훗날 우리가 죽은 이후 부활만을 믿는 수준에 머물기를 바라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부활이 구체화되었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막연한 멋 날의 일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언제인지 알 수 없는 부활을 믿고 바라며 살아야 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지금 당장 우리 앞에 있는 어려움과 고통과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시고, 고치시고,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믿는 수준에 이르러야 합니다.

 

가족을 잃은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습니다. 죽음 이후에 부활도 믿었습니다. 이를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며, 가진 모두를 바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믿음의 눈을 가졌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멀리 있는 사물을 분별할 수 있지만, 오히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영적 노안을 겪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이지도 않고, 지금 당장의 어려움과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믿지 못 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오히려 더 가까이를 크고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돋보기가 필요합니다.

 

저 멀리 죽음 이후에 있을 심판과 구원과 영생을 믿고 바라는 정도가 믿음의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가 이를 믿고 품고 살기를 하나님은 원하시지만, 동시에 지금 우리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어려움과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시고, 해결해 주시는 능력과 사랑까지 믿기를 바라십니다.

 

주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심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날, 우리에게 무엇보다 이런 수준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세상이 전부라 생각하는 근시안적인 믿음에 머물러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이 세상을 외면한 채 다음 세상이 전부라 여기는 원시안적인 믿음이어도 안 됩니다. 한 쪽에 치우치면 다른 한 쪽은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먼 날도, 아무리 가까운 일도, 주님의 말씀과 약속을 기반으로 믿고 의지하며 소망으로 삼는 수준에 이르러야 비로소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죽음이라는 가장 어렵고 무서운 문제를 부활로 이겨내셨습니다. 그 누구도 철저히 무능할 수밖에 없는 죽음마저도 이겨내셨으니,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은 틀림없이, 변함없이, 실수 없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진실로 드러났습니다. 이 약속을 기반으로 믿음을 세워 가야 합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은 저 멀리, 이후에 있을 구원과 영생에만 능력을 베푸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늘 지금 우리가 겪는 모든 일에 세세히 관심을 가지시고, 이를 위해 믿고 구하면 간섭하시고 해결해 주십니다.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을 믿고, 더불어 이 땅에서 겪는 모든 일에도 관심과 능력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더욱 믿음으로써, 이 땅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은혜와 복을 누리며, 이후에는 구원과 영생의 복을 함께 누리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