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등불을 삶에서 비추십시오
성경: 마가복음 4장 21-25절(신 59쪽)
찬송: 430장(주와 같이 길; 통456), 449장(예수 따라가며; 통377)
설교: 20170806. 주일낮예배
덥고 바쁜 일상 중에서도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자주 등장하는 논란거리들 중 하나는 ‘갑질’입니다. ‘갑질’이란 계약서에서 나온 말입니다. 보통 계약서에서 사람 이름 대신에, ‘갑’ ‘을’ 등을 쓰고, 두 사람 관계에서 힘과 권력을 가진 쪽을 ‘갑’으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갑질’이란, 둘 사이에서 힘과 권력이 있는 사람이, 자기의 지위나 권력을 이용해 계약 상에서 약한 사람들에게 부당하게 대한다거나, 함부로 대하는 행동을 뜻합니다.
이런 경우가 워낙 많이 일어났고, 또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 항공사 회장의 딸이, 비행기 안에서 서비스가 안 좋다고 이륙하려던 비행기를 돌아가게 한 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아파트의 입주자 대표회장은, 아파트 관리사무소장에게 “나는 주인이고, 너는 종놈이야”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자기의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에게 함부로 대하거나, 부당하게 대하는 것들을 ‘갑질’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심해졌으면, 최근에 아파트 경비원에 대한 갑질을 금하는 법이 만들어졌고, 이 외의 여러 갑질에 대한 금지법들이 준비되고 발의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이런 갑질 때문에, 군대의 대장 한 사람이 불명예 제대를 신청한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별 다섯 개 계급이 없기 때문에, 별 네 개인 대장은 가장 높은 계급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40년 간 군생활을 하면서, 온갖 어려움을 이기고 대장에 올랐는데, 다른 이유 때문도 아니고, 갑질 때문에 갑자기 군복을 벗게 된 것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군대에서는 계급이 높은 사람들이 사는 공관이 있고, 공관에서 일할 조리병, 관리병, 보좌관 등을 군인들 중에서 뽑습니다. 군인들에서 뽑아서 쓴다는 것은, 그곳에서 하는 일들이 개인의 일이 아니라, 국가에서 허용하는 한계에서만 이용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과 부인은, 가족의 빨래, 다림질, 텃밭 가꾸기, 화장실 청소 등을 시키고, 막말을 내뱉고 함부로 대했다는 겁니다. 이것이 알려지면서, 대장 계급에서 부끄럽게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저 개인은, 이 사건을 잘 모르고, 또 관심도 없다가, 기사들 중에 짤막한 내용이 눈에 띄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 대장의 공관에서 일하는 관리병, 보좌관 등이 힘든 또 다른 한 가지 이유가, 대장과 그 부인이 새벽기도회를 나가는 6시부터 일과가 끝나는 밤 10시까지 대기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군대에서는 한 계급만 높아도, 대하기 정말 어려운데, 군대에서 가장 높은 별 네 개짜리를 상관으로 모시는 게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생활을 매일 하고,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로 일과가 끝나는 게 아니라,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했으니, 갑질 중에서 악질적인 갑질이라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지금 시대에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갑질을 저지른 사람이, 또 그런 갑질을 저지른 원인 중 하나가 새벽기도에 나간다는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 거겠습니까? 대장과 그 부인이 기독교인이라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믿음이 단계를 나타내는 것들이 몇 가지 있는데, 새벽기도회에 얼마나 열심히 참여하느냐 하는 것도, 아주 높은 순위에 오를 기준일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새벽기도회에 열심히 다녔다는 말만 들으면, 신실한 신앙인으로 여길 것입니다. 악질적인 행동을 한 사람들이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신앙생활을 꽤 잘 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겁니다.
심지어는 이 두 부부가 공관에서 일하는 군인들에게 갑질을 행한 것들 중 하나는, 이 군인들을 새벽기도회까지 함께 나가도록 했다는 겁니다. 또 그렇게 대장과 그 부인의 부당한 갑질 때문에 새벽기도회에 나갈 수밖에 없었던 한 군인은 불교 신자였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시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불교신자지만 억지로라도 새벽기도회에 나가서 은혜 받고, 변해서 구원을 얻으면 되니, 그런 방법도 괜찮아 보입니까? 이 사실을 알고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이 대장 부부의 삶과 행동을 좋아하시겠습니까?
저는 이 이야기를 듣고, 어이도 없고, 화도 나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는, 그런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앙이란 무엇이고, 새벽기도회에 나가서 그렇게 열정적으로 무엇을 위해 기도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아마 그 사람들은, 대장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 복에 감사하면서, 그렇게 남에게 악질과 갑질을 행하는 것이 당연하고, 복을 누리는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새벽마다, 예배 시간마다 교회에 나가서 앞으로도 더 잘되고, 어려움 없이 살기를 빌고 또 빌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누가 이런 사람들을 좋은 사람이라고 하고,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교회에 나가면 사람이 선하고 의롭게 변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래서 자신들도 믿음 생활하겠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이런 사람들 때문에, 기독교 전체가 손가락질을 당하고, 하나님의 얼굴에 먹칠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고, 기도했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뿌려졌다는 것이고, 믿음의 빛이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럼에도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못되고 악한 짓을 저질렀겠습니까? 여러 가지로 분석하고 설명할 수 있겠지만, 오늘 말씀에 비춰 보면, 이들이 신앙이란 빛나는 게 아니고, 비추는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거나, 신앙의 빛을 비추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에서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고 말씀하십니다. 연세가 드신 분들은, 등불이나 등경에 대해 잘 아시겠지만, 어린 아이들을 위해서, 잠깐 등불과 등경을 사진으로 확인하겠습니다.(등불, 등경 사진)
예수님의 말씀은, 본래 목적에 맞게 등불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말 아래나 평상 아래가 아니라, 등경 위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가진 성경에서 ‘말’로 번역된 말은, 요즘 잘 사용되지 않는 단어고, 또 사람이 타고 다니는 말로 잘못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좋은 번역이 아닙니다. ‘말 아래’에서 ‘말’이란 타고 다니는 짐승인 말을 뜻하는 게 아니고, 큰 됫박을 뜻하는 것으로서, 약 4되, 8kg 정도의 큰 그릇을 뜻합니다. 또 ‘평상’으로 번역된 말도, ‘침대’라고 번역하는 게 더 익숙한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등불을 됫박이나 침대 밑에 두면, 등불의 본래 목적이 사라지고, 등경 위에 두어야 비로소 본래의 목적대로 등불을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등불을 됫박 안이나 침대 밑에 두는 것과, 등경 위에 두는 것이 무슨 차이겠습니까? 등불을 됫박 안에 두거나, 침대 밑에 두면 불이 꺼지고, 등경 위에 두어야 등불이 잘 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됫박 안이나 침대 밑이나, 등경 위에나 등불이 타는 것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등불을 됫박 안에 두느냐, 침대 아래 두느냐, 등경 위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빛을 비출 수 있는 한계와 거리입니다. 등불을 됫박 안에 가두면, 등불이 아무리 밝아도 됫박 안만 비출 것입니다. 됫박 안에 있는 등불이 태양처럼 빛나더라도, 됫박 밖 어둠을 밝힐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밝은 등불이라 하더라도, 침대 밑에 두면, 높이 있고, 멀리 있는 물건을 비출 수 없습니다. 높은 곳에 있는 등경 위에 두어야만 비로소 등불의 목적대로 멀리 비출 수 있고, 높이 비출 수 있습니다. 이것이 등불을 켜는 목적이고, 등불을 등경 위에 두는 까닭입니다.
여기에서 불빛의 목적은 빛나는 게 아니라, 비추는 것임을 배워야 합니다. 빛나는 것과 비추는 것의 차이를 모르기 때문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기들을 높이려 하고, 자랑하려 하고, 내세우려 합니다. 사회에서 많이 가지고, 높은 자리를 가져야, 사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더 잘 할 수 있다며, 성공하고 잘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조금 더 가졌다고, 남보다 높은 자리에 앉았다고, 갑질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악질적인 일을 저지르면서도, 자기의 업적과 공로가 더 크다며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사명을 오해하고 있음을 잘 드러내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자녀의 이름입니다. 아이들의 이름들 중, ‘빛나’라는 이름이 많습니다. 이 이름은 온유, 승리, 진리처럼 성경에서 나온 이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뜻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처럼, 큰일을 해내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영광을 받고, 훌륭한 인물이 돼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로, 설교에서도 많이 언급되고, 신앙인 가족에서 ‘빛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 찾기는 아주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녀들에게 반짝반짝 빛나라 말씀하신 게 아니라, 비추라 말씀하십니다. 짠 소금이 돼라고 하시지 않고, 이미 짠 소금이니, 세상을 그 짠 맛으로 맛들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의 사명이고,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이고, 삶의 모습입니다.
빛나는 것은, 그 자체가 번쩍이고, 광택이 나는 것을 뜻하고, 비추는 것은, 그 밝은 빛이 다른 것까지 밝히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 자신이 반짝이고, 빛나라 말씀하시지 않고, 비추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등불을 됫박 안이나, 침대 아래에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는 까닭입니다.
등불이, 됫박 안이나 침대 밑이나 등경 위나, 어디에 있든지 빛나는 것은 똑같습니다. 하지만 그 빛을 비추는 것은 전혀 달라집니다. 됫박 아래 두면 그 등불은 다른 것을 비출 수 없습니다. 비춰 봤자 겨우 됫박 안일 뿐입니다. 침대 밑에 두면, 더 높고 넓은 곳을 비출 수 없습니다. 비춰 봤자 겨우 침대 주위일 뿐입니다. 그러나 등경 위에 등불이 놓이면, 등불의 빛 때문에 주위가 환해지고, 어둠을 밝힐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해서, 세상을 비추고, 세상의 어둔 곳을 밝히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으면서도, 오직 자기가 드러나고 밝게 빛나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자기가 높아지고, 자기가 드러나고, 자기 업적과 공로가 드러나길 바랍니다. 하늘의 맛을 잃어버린 세상을 짜게 하는 것에는 관심이 전혀 없고, 자기가 더 잘되고, 자기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이런 생각과 삶으로만 보면, 하나님은 우리가 하늘의 해같이 빛나라 하신 것 같고, 소금기 강한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빛나고, 짜게 돼라고 말씀하시지도 않고, 이런 것에 큰 관심이 없으십니다. 오직 많은 교인들이, 출세와 성공과 자랑이라는 욕망들을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포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신앙의 수준이 자기가 드러나고 빛나는 것을 넘어서, 남에게까지 비추는 단계까지 나아가는 사람은 우리의 계산보다 훨씬 적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처럼 아주 적은 수에 그칠 것입니다.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를 듣는 사람들은, 마가복음 4장 1절에서 ‘큰 무리’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0절에서 예수님께 나아와 그 비유의 뜻을 듣는 사람들은 “함께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큰 무리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앗들은 각기 다르게 자라고 수확하게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농사를 짓고, 논밭 가까이에 있는 이들에게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를 듣는 이들 대다수는, 예수님의 이 비유가 너무나 당연하고 쉬운 이야기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고, 설명도 필요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하면 농사를 잘 짓는 방법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결국 자기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이해하고 있다고 여긴 큰 무리들은 사실 오해하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큰 무리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적은 수지만,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들과 열두 제자들만이, 예수님의 말씀이 농사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임을 들었습니다.
이처럼 기독교인들 대부분은, 예수님이 우리를 향해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 하신 말씀에 대해서도 오해하거나, 자기중심적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극히 적은 수만이,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말씀하신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노력합니다. 이 때문에, 25절의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르게 알고 그렇게 살고자 노력한 사람은 더 큰 복과 상급을 받을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그래서 제대로 실천하지 못 한 사람들은, 있는 아주 작은 것마저 빼앗기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 믿음의 씨앗, 하나님 나라의 씨앗을 심으셨고, 지금 우리 각자의 마음의 밭에 그 씨앗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그 크기와 속도는 조금씩 다르지만, 같은 하나님이 우리 속에 뿌리신 것이니, 이제는 하나님이 주신 씨앗을 품은 자처럼 살아야 합니다. 믿음의 씨앗들이 싹을 틔우고, 자라고, 성장해서 열매까지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들이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높아지고, 잘되고, 성공하는 게 아니라, 주의 말씀으로 우리가 변하고, 우리 속에 있는 그 빛들이 우리 이웃들에게까지 비춰져, 우리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이웃들의 어두운 영혼에 복음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이것이 널리 많이 높이 비추기 위해 등경 위에 두는 등불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믿음과 영생의 씨앗을 심으신 까닭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세상의 그 어떤 이들보다 더욱 거룩하고 선택받은 자녀임을 기억하고, 우리 삶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를 통해 구원과 복음의 폭이 더욱 넓어짐으로써, 더욱 복되고 기쁨이 가득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0170820)아직은 미약하지만 소망이 있습니다(막 4장 30-32절) (0) | 2018.04.29 |
|---|---|
| (20170813)열매를 고대하며 기다리십시오(막 4장 26-29절) (0) | 2018.04.27 |
| (20170730)말씀이 내 삶에서 결실되어야 합니다(막 4장 10-20절) (0) | 2018.04.27 |
| (20170723)하나님의 말씀은 법칙입니다(막 4장 1-9절) (0) | 2018.04.27 |
| (20170716)행함으로 주님과 함께하십시오(막 3장 31-35절) (0) | 2018.04.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