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미약하지만 소망이 있습니다
성경: 마가복음 4장 30-32절(신 60쪽)
찬송: 387장(멀리 멀리 갔더니; 통440), 486장(이 세상에 근심된; 통474)
설교: 20170820.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지난주에 광주에서 한 고등학생이 영산강에 투신해서 하루 뒤에 숨진 채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어린 학생이 투신해 숨졌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픈데, 더 충격적인 사실은, 본래 다른 한 친구와 투신하기로 했다가, 한 친구는 두려워서 돌아왔다고 합니다. 다른 한 친구도 마지막 순간에 두려워 그만두었지만, 마음으로는 삶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아주 컸다는 것입니다.
또 경북 안동 작은 원룸에서 20대 세 명이 연탄불을 피우고 자살한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주위에 악취가 너무 심하게 나서, 주민들이 경찰에 신고해 들어가 보니, 세 명이 함께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모든 뒷모습은 쓸쓸하기 마련이고, 죽음이란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누가 되었든지 슬프기 마련입니다만, 그럼에도 고등학생, 20대의 젊은이들의 죽음은 우리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듭니다. 누구든지 태어난 이상 언젠가는 육체의 죽음을 겪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과정이지만, 그럼에도 스스로 삶을 포기했다는 소식들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마음이 무척 아픕니다. 더욱이 꿈꿀 것이 많고, 희망으로 삼을 만한 것들이 많은 어리고 젊은 때인데, 그들은 그렇게 먼저 절망 속에서 포기를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그 분들의 삶을 알 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보기에 꿈과 소망의 가능성은 없고, 포기와 절망이 가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당연하게 보이는 것마저도, 그들에게는 절망과 고통과 아픔으로만 다가왔기 때문에,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보면서, ‘인간이란 과연 무엇으로 살아가는가?’하는 너무나 기본적이면서도 당연한 것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삶을 스스로 포기하는 이들은 무엇 때문에 스스로 포기했을까요? 도저히 나을 수 없는 중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은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살해된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스스로 포기한 까닭은, 무엇보다도 더 이상 소망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땅에 태어나고 살아가는 과정에는 고통과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아픔과 어려움을 당할 수밖에 없다면, 이것을 이길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이를 이겨낼 수 있는 길과 방법을 찾으면, 사람답게 살 수 있고, 이를 이겨낼 만한 것을 찾지 못 하면, 삶의 여정들 자체가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고행의 바다’가 되고 말 것입니다. 삶이 고통으로만 가득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삶 가운데 있는 아픔과 고통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를 이겨낼 길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아픔과 고통을 이겨내는 것이란 곧 소망, 희망입니다.
지금 똑같이 배고픔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내일은 좋은 음식으로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면, 그깟 몇 끼 정도 못 먹는 것 충분히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똑같이 배고픈 상황이더라도, 내일은 더욱 더 먹을 것이 없고, 그 다음 날은 더 심해진다면, 참고 견딜 수 있는 시간은 절대 길지 못 할 것입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돈이 없지만, 내일 어디에선가 쓸 만한 돈이 생긴다면, ‘내일’이 희망으로 다가오게 되고, 그래서 오늘의 가난과 어려움을 참을 수 있습니다. 내일이 아닌 더 긴 시간이라고 해도, 그날을 기대하며, 긴 기다림마저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지금 당장 힘든데, 내일은 가난이 더 심해지고, 그 다음 날은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면, 절망은 더 넓어지고, 더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어렵고 힘들지만, 지금의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꾸준하게 돈을 저축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축한 것을 찾을 날이 소망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소망이 있어야만 지금의 어려움을 이기고, 내일을 기대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소망이 무엇이겠습니까? 또 소망의 반대인 절망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희망이란, 지금보다 나중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좋아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절망도 분명해집니다. 지금보다 이후가, 오늘보다 내일이 더 힘들어지고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똑같은 상황이어도, 내일과 나중이 좋아질 거라 여겨지면 소망 때문에 포기하지 않게 되고, 내일과 나중이 더 힘들고 어려워질 거라 여겨지면 절망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소망이 이렇게 중요한데, 무엇으로 소망을 삼아야하겠습니까? 보통은 돈과 건강이 가장 큰 소망이라고 합니다. 물론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 얼마의 돈은 소망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아프고 병든 사람들에게 건강이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돈과 건강이 확실한 소망이 됩니까? 돈만 있으면 행복하겠습니까? 올해보다 더 건강할 자신 있습니까?
바람이야 건강하고, 돈도 많아지면 좋겠지만, 원하는 것만큼 이것이 주어지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각자가 원하는 돈은 언제나 저 앞 멀리 있습니다. 벌거나 가졌으면 하는 금액은 언제나 크고, 실제로 벌고 얻을 수 있는 금액은 언제나 작습니다. 어쩌면 적자가 안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바람일 수 있습니다.
건강도 그렇습니다. 연세 드신 분들이 “한 살 더 먹을수록 몸놀림이 다르다”는 말씀들을 자주 하시죠? 의학적으로 봐도, 20세 중반이 넘으면, 몸은 점차 늙어간다고 합니다. 몸이 늙어간다고 해서, 한 순간에 병들거나 못 쓰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점차 약해지고, 회복이 늦어진다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여기에 있는 사람들 중에, 몸의 건강으로 희망을 삼을 수 있는 이들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최근 평균 수명이 80세 정도인데, 의학적으로 보면 25년 동안은 그나마 건강한데, 이보다 훨씬 긴 기간인 55년가량은 점차 약해지고, 병이 들고, 아픈 가운데 지내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희망으로 삼고 있는 돈도, 건강도 사실 그리 좋은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간절함의 크기와 기간과는 별개로, 그 소망이 주어지는 경우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세상의 소망은 아주 적은 사람들에게 주어질 수도 있지만, 다수에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확률로 주어지는데, 그것도 그리 높은 확률도 못 됩니다. 또 이런 소망이 주어지더라도, 이 소망을 누릴 수 있는 기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잘되어도 몇 년, 몇 십 년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길어도 이 땅에서 누리는 것으로 끝나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잠깐만 주어지고, 조금만 주어지고, 확률로 주어지는 소망에 매달려서는 안 됩니다. 이런 한정적이고, 작은 소망에만 매달리면, 결국 손해나고, 적자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것에만 매달리다 보면, 말 그대로 ‘소망이 끊긴’ ‘절망’의 시간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소망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겨자씨가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다라고 했는데, 겨자씨보다 작은 씨앗이 있지만,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겨자씨를 가장 작은 것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기곤 했습니다. 이렇게 작은 것으로부터, 처음의 모습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변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치관과 판단 기준으로는, 큰 것은 대체로 강하고, 작은 것은 약합니다. 그래서 씨 자체의 크기만 본다면, 너무나도 작은 겨자씨에는 기대를 품을 수 없습니다. 아무런 소망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잘 것 없는 이 작은 씨앗이 제대로 자라면, 새들이 안식처로 삼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이 겨자씨처럼 아주 작게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그야말로 초라하게 시작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희망과는 달리, 권력자도 아니고, 부유한 집안의 자손도 아닌, 너무나 가난하고 무시 받던 목수 집안에서 태어나, 여전히 가난한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도 결국은 십자가에서 초라하게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누가, 이런 과정으로 죽은 예수님께 소망이 있다고,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을 통해 올 것이라고 알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보면, 세계 어디를 가든, 같은 예수님을 부르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디에 가든지 같은 이름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너무 작고 초라하게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커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초라한 시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이제는 수십억의 사람들이 깃들어 말씀을 듣고, 소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초라하게 시작되었으나, 기대고 쉴 수 있는 이 하나님의 나라가 곧 우리에게 참된 소망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품고 살아가고 있고, 그래서 소망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 때문에,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서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라 말씀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을 가지면, 그것이 우리 삶에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소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 믿음이 우리에게 확실한 소망이 되고 있습니까?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이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이 생겼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그 믿음이, 우리 각자의 삶에 영원하고도 확실한 소망이 되고 있습니까? 돈이 많아지는 것보다, 우리의 믿음이 더 큰 소망이 되고 있습니까? 건강에 거는 것보다, 하나님 나라에 더 큰 소망을 품고 있습니까?
하지만 신앙인들의 모습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그리 크지 못 한 것 같습니다. 교회에 나오면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지만, 살아가는 생각과 모양을 보면, 믿음을 갖기 전이나, 그 이후나 그리 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이전에 했던 행동들이 신앙을 가진 이후에도 나옵니다. 이런 것만 봤을 땐, 도대체 신앙생활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고, 교회에 나아온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를 고민하기도 합니다. 예전에 가졌던 헛된 욕심과 못된 모습들이 지금도 꿈틀거리고, 신앙 가운데 바라는 좋은 모습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삶을 살고 맙니다. 로마서 7장 19절에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행해야 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만 행하곤 합니다. 다른 그 누가 아니고, 내가 내 자신의 자취와 행동들을 보면, ‘과연 신앙이 내게 무슨 의미를 가지고, 과연 내가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작아 보이고, 흔적조차 확신할 수 없을 것 같은 이런 믿음에 대해, 오늘 본문 앞에서는 스스로 자란다고 말씀하시고, 오늘 본문에서는 처음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크게 자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정말 하찮고 작아 보여도, 이 믿음이 우리 자신도 모를 때에 자랄 뿐만 아니라, 그것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자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부인할 수 없는 소망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얼마만큼 자라는지, 나중엔 인간에게 가장 큰 두려움을 주는 육신의 죽음마저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 때문에, 죽음마저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2011년에, 인터넷에 한 청년의 죽음이 화제로 오른 적이 있습니다. 보통은 나이 많은 사람이 죽는 게 일반적이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죠? 심하면 몇 개월만에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 한 청년이 보통보다 일찍 죽었다고 해서 큰 뉴스거리가 되지는 않겠죠?
이 청년의 죽음이 화제거리가 된 까닭은, 먼저는 숨진 날이 성탄절이었기 때문이고, 더 큰 이유는, 숨지기 한 주 전에 자기의 죽음을 예상하고, 인터넷에 자기의 상황과 죽음에 대한 자세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연세 드신 분들은 잘 모르실 수 있는데, 인터넷에 올려졌다는 것은, 날짜를 조작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잠깐 이 청년이 올린 영상을 보겠습니다. (영상 ‘죽음 전에 빛을 본 소년’)
가장 건강하고, 꿈이 많은 때에, 병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으면서도, 이 청년은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만약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없었다면, 자신이 죽을 때를 알고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가족과의 이별이 또 얼마나 마음 아프겠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이 커지고, 이것이 참된 소망으로 자라게 되면, 우리 영혼이 쉬고 의지할 곳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면서, 우리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아주 작은 겨자씨처럼 심어 놓으셨습니다. 아직은 이 씨앗이 온전히 자라지 못 했기 때문에, 우리의 눈에 쉽게 눈에 띄지 않지만, 아직은 큰 나무가 되지 못 해 쉽게 실감되지 않지만, 우리를 통해 확장되고 거대해질 하나님의 나라의 가능성이 우리 속에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언제인지 아직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우리 속에 있는 씨앗이 온전히 성장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지 않겠습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육체는 더욱 약해지겠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점차 적어질지 모르지만,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고, 온전히 성장할 날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육체만을 위해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 돈의 능력만 바라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약해지는 육체 때문에 소망이 끊기게 되고, 희미해지는 기억 때문에, 붙들었던 희망이 더 희미해지고, 이 땅에서의 시간이 줄어듦에 따라 절망의 길을 걷겠지만,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가진 우리는 소망과 구원과 기쁨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속에 반드시 크게 성장할 하나님의 나라를 심어 주셨습니다. 이 씨앗을 품었으니, 변하지 않는 자신의 약한 모습 때문에 좌절하지 말고, 오늘도 우리를 통해 역사하실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우리 속에 점차 자라고 거대해질 하나님 나라 때문에 행복하고, 소망이 있는 성도의 삶을 사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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