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과 지식이 해결책이 되지 못 합니다
성경: 마가복음 4장 35-41절(신 60쪽)
찬송: 369장(죄짐 맡은 우리 구주; 통487장), 456장(거친 세상에서; 통509)
설교: 20170910.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그 누구도 쓴맛과 고통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은 것이 모든 이의 바람이고, 이것은 당연한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인생의 쓴맛, 삶의 고통이라 할 수 있는 고생을 왜 사서 하겠습니까? 여기에서 사서 한다는 것은, 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로 선택한다는 것을 뜻하고, 경험하지 않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무언가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겪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고생을 선택하고, 경험하는 것 자체가 기쁘거나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에는 ‘젊어서’라는 조건이 붙습니다. 나이가 들어서는 고생을 사서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고생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나이가 들어서 겪는 고생은 좋지 않은데, 유독 젊은 때 겪는 고생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까요? 얼마나 도움이 되면, 심지어 이 고생을 피할 수 있음에도 일부러 하는 것이 좋다고 여길까요? 나름 각자가 생각하는 까닭이 있겠지만, 그 무엇보다도 젊어서 겪는 고생이 이후에 살아가는 과정에서 좋은 경험이 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고생 자체는 물론 쓴맛처럼 힘들고 아프게 하지만, 그러나 ‘좋은 약이 입에는 쓰지만, 병에는 이로운 것’처럼, 고생이 이후에 살아가는 과정에서 더 크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돈 많은 집안에서 어린 자녀들에게 생활할 수 있는 충분한 돈을 줄 수 있어도, 자녀들에게 돈을 막 쥐어주지 않고, 제대로 된 직업을 갖기 전에도, 아르바이트 등을 통해서라도 적은 금액이라도 스스로 벌도록 가르치곤 합니다. 자녀가 원하는 대로 돈을 주다 보면, 당장은 그 자녀들이 좋아하고, 부모가 자기를 사랑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계속 그렇게만 살다 보면, 버릇이 잘못 듭니다. 돈의 가치를 모르고, 돈을 함부로 쓰고, 그 돈을 벌기 위해 부모가 얼마나 많은 아픔과 어려움을 겪었는지를 생각하지 못 합니다. 그래서 젊어서는 부모의 도움으로 풍족하게 살지 모르지만, 부모가 더 이상 도와줄 수 없는 여건이 되거나, 자녀들이 스스로의 삶을 이끌어가야 할 때가 되었을 때는 잘못된 습관이 몸에 배긴 터라 힘들게 살 게 될 것입니다.
부모는 사랑하는 자녀가 고생하지 않고 편하게 사는 걸 원하지만, 지금 고생하지 않고 남의 도움으로 편하게만 살게 되면, 이후의 생활은 훨씬 힘들고 아플 것이고, 지금 당장 고생하는 모습이 안타깝지만, 지금 고생하면, 돈의 가치, 노동의 대가를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지혜로운 삶을 살 것을 알기에, 지금 편하게 해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로 힘들고 어려운 고생을 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경험이 주는 열매고, 이 경험을 통해 얻게 되는 지식은, 그 어떤 것보다 유익하고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단지 머리로만 기억되거나 알고 있는 것이 아닌, 직접 몸으로 겪고 얻게 되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더 지혜롭게 이끌고,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위험과 어려움이 찾아오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 또한 경험과 지식입니다. 자기의 경험과, 경험으로부터 얻은 지식에 의지하면 어느 정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거나, 성공할 수 있습니다.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이나 힘으로 눈앞에 닥친 불행이나 사고를 예비할 수도 있고, 그 문제들과 어려움들로부터 오는 충격도 어느 정도 완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경험과 지식이 이렇게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경험이 주는 피해와 부정적인 면도 적지 않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몇 번 성공하다 보면, 교만한 마음을 품게 만듭니다. 자기 경험과 지식을 통해, 몇 번 성공하고 이루다 보면,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고, 교만하게 만듭니다. 몇 번의 성공만으로 마치 모든 것을 해내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교만해지는 것은 인간의 본능에 가까운 성향 같습니다.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들을 붙잡아 주면,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음에도 하나같이 혼자 한다고 고집합니다. 걷는 것을 붙잡아 주면, 혼자 뛴다고, 붙잡아주는 손을 뿌리치려 합니다. 하지만 경험과 지식을 통해, 해내고 이룰 수 있는 것은 그리 크지 않고, 대단하지 않는 것들뿐입니다. 정말 중요하고 필요한 것들 앞에서는 철저히 무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 날, 제자들과 예수님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에 큰 광풍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대로, 예수님 제자들 다수가 어부 출신입니다. 어부로 생계를 꾸린 사람들에게 바다라는 곳은 가장 익숙한 곳이었을 것입니다. 평생을 지내오며 쌓아온 경험이 풍부했고, 살기 위해서 조상들로부터 배운 지식들, 자신들이 직접 만들어 놓은 지식들이 그 어느 곳보다도 많은 곳이 갈릴리 바다였습니다.
게다가 성경에서 ‘갈릴리 바다’로 표현된 곳은, 바다가 아니라 큰 호수입니다. 너비가 11km, 길이가 21km 정도 되는 큰 호수입니다. 바다처럼 끝없이 거대한 게 아니기에, 그곳에서 평생 잔뼈가 굵은 사람들에게는, 넉넉히 알 만한 곳이었을 겁니다. 이들에게 웬만한 바닷바람도 걱정이 없습니다. 오랜 경험을 통해, 바람의 방향을 읽을 수 있고, 어느 곳에 암초가 있는지, 어디로 가면 가장 안전한 곳에 빨리 도착할 수 있을 것인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갈릴리 바다에 대해 가지고 있던 어부 출신 제자들의 모든 경험과 지식이 전혀 쓸모없게 되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어부들의 경험이 실제적인 도움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주위를 보고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앞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경험 많고, 바다를 잘 아는 어부마저 바다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전혀 힘을 못 쓴다는 겁니다.
며칠 전에 TV에서 완도의 한 여자 어부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봤는데, 이 사람이 동생과 함께 바다에 나왔는데, 안개가 짙어지기 시작하니, 크게 당황합니다. 그곳에서 자란 사람이고, 배를 오래 몬 사람인지라, 안개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길을 찾을 거라는 예상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안개가 짙게 끼어서, 방향을 잃으면, 자신의 배가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를 모르니, 배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도 모르고, 그 앞에 무엇이 나올지도 모르기 때문에 굉장히 위험하다고 합니다. 잘못하다 큰 배들이 다니는 항로로 가다가 사고가 날 수도 있고, 바위 등에 부딪힐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나마 잠깐 작동 안 되던 스마트폰이 다시 작동되어서 지도를 보고 겨우 방향을 찾고, 조심스럽게 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봐도, 기기의 도움을 받을 수 없던 시절의 어부들에게는, 다른 그 무엇보다 눈으로 보고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볼 수 있어야, 배의 방향을 정할 수 있고, 암초나 장애물을 피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35절에서 호수 건너편으로 배를 출발할 때가 ‘그날 저물 때에’라고 하는 것을 보면, 바람이 크게 불 때는 이미 어두워진 상황입니다. 그 동안 어부로서 쌓아온 경험도, 지식도 전혀 쓸모없게 된 상황을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광풍이 크게 불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냥 ‘광풍’이라고만 해도, 그 때 불었던 바람이 거칠고 엄청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크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정도를 넘어섰다는 뜻입니다. 바다는 본래 파도가 높을 때가 잦고, 육지보다 바람이 거센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모습까지는 전혀 이상하거나 특별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모두가 아는데, 그 정도를 넘어섰기에, ‘바람이 거세다’라고도 하지 않고, ‘큰 광풍’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인들이 타고 있고, 게다가 어부들 출신인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는 상황에서 ‘큰 광풍’이라고 하고 있으니, 어부였던 제자들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바람이었다는 뜻입니다. 어부들은 거친 바다 일을 자주 해나가던 사람들인지라, 보통 성인들보다 힘이 더 셌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천하장사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광풍이 크게 불어오던 그 한복판에서 배를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겠습니까? 경험 많고, 힘센 어부들마저도 철저히 무기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부로서, 바다에 익숙한 사람들로서 갖는 경험도, 힘도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들의 경험과 노력이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상황이 되어서야, 제자들은 배의 뒷부분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이 전혀 다릅니다. 제자들은 각자가 가지고 있던 경험과 지식을 의지하다가 결국 실패하게 되어, 38절에서 “우리가 죽게 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 그대로 ‘죽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런데 같이 출발하고, 같은 배를 타고 계신 예수님은 배 뒤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육체를 가지고 계신 분으로서 아주 피곤하셨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제자들과는 달리 경험이나 지식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확신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제자들이 무서워한 것은 광풍 때문이 아니라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다를 잠잠하게 하신 후에 제자들을 향해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시니 바다를 떠나는 순간에 큰 바람이 일어날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자들과 더불어 배를 타고 떠나신 것은, 하나님께서 자연을 다스리시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자연마저도 다스리시기 때문이고, 큰 바람, 거친 파도를 통해, 사람의 경험과 지식이 얼마나 약하고 보잘 것 없는지를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은 경험과 지식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소망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지식과 경험이 사람끼리의 관계에서는 좀 힘을 쓰고,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결국 가장 중요하고, 우리의 목숨까지도 좌우하는 거대한 문제 앞에서는 정말 하찮은 것이고, 이런 것만을 의지하다가는 그 삶이 무너지고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제자들로 직접 경험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39절에서 예수님이 바람을 잠잠하고 고요하라고 말씀하시자,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에는 그 느낌이 크고 와닿지 않지만, 원어 성경을 보면, ‘큰 광풍’이라고 할 때도, ‘아주 잔잔하다’라고 할 때도 모두 같은 단어를 사용했는데, ‘아주 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부 출신 제자들마저도 감당할 수 없고, 경험해 보지 못 했을 만큼 거대했던 바람이, 예수님의 말씀이 말씀하시자, 잦아들고 조용해졌는데, 그 정도가 평소에 경험하지 못 했을 정도였습니다. 도저히 바다나 호수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고요하고 잔잔해졌습니다.
삶에서 우리는 참 많은 어려움들을 겪게 됩니다. 이 어려움과 고난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따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타고 계신 배에도 큰 광풍이 일어나고, 물결이 배에 차서 올라오는 것처럼, 예수님을 모신 우리 삶에도, 때로는 정신을 가다듬을 수 없을 정도로 큰 고난이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칠흑 같은 밤처럼, 한 치 앞을 볼 수 없을 만큼 어둡고 답답한 현실을 겪기도 합니다. 잡아먹을 것처럼 높고 험한 파도가 사정없이 덮쳐오는 것 같은 현실이 곧 우리의 삶의 자리일 때가 있습니다. 배에 앉아 있자니, 작은 배가 거친 파도에 곧 뒤집힐 것 같고, 바다로 뛰어들자니 나아갈 길마저 안 보이는 그 막막함이 우리의 전망일 수 있습니다.
이럴 때는, 그 동안 우리가 큰 자산처럼 여겨졌던 온갖 경험과 지식이 얼마나 작고 의미가 없는지 알게 됩니다. 인간의 모든 질병을 아는 의사라고 해도, 모든 질병을 고칠 수 없습니다. 의사들마저도 여러 질병으로 고통을 겪다 일찍 죽기도 하고, 아무리 건강하더라도 결국 죽기 마련입니다. 몸이 아무리 건강하고 튼튼한 사람도, 자기에게 다가오는 세월을 막을 수 없고, 죽음의 방향을 바꿀 수 없습니다. 세상에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정말 중대한 문제들 앞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사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권력이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세상의 모든 일을 뜻대로 바꾸거나 만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지식과 경험과 권력과 능력이 있어도, 할 수 있는 일이란 사실 아주 작고 미약한 것들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지식과 경험과 힘으로 사는 게 아니고, 결국 믿음으로 살고, 우리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게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 복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고집과 경험대로 가다가는, 이겨낼 수 없는 커다란 장벽과 파도에 부딪히게 되고, 그래서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월을 통해, 또 여러 지식과 지혜를 통해 우리는 좋은 경험을 많이 쌓게 됩니다. 이 경험이 우리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또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해 나아가도록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과 지식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사실 그리 대단하거나, 삶을 좌우할 만큼 크고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실패해도 그리 큰 지장이 없는 작은 일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정말 죽고 사는 문제를 결정하는 일, 우리의 앞날을 좌우하고, 우리의 영생을 결정하는 일에 있어서는, 우리의 지식도, 경험도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 합니다. 없어도 될 때는 언제나 곁에 있지만, 정말 꼭 중요하고, 내가 위험할 때는 저 멀리 사라져 버리는 비겁하고 이기적인 사람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능력은, 우리의 크고 작은 모든 문제까지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감각이나 경험을 의지하기보다는,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것을 고집하지 않고, 주님의 것을 의지하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의 것을 의지하다가는 세상의 거친 풍파로 인해 좌절과 죽음만을 경험하게 되지만, 주님을 의지하면, 우리를 뒤집고 죽일 것 같았던 삶의 온갖 문제들이, 경험하지 못 할 정도로, 상상하지 못 할 만큼 잔잔해지고 해결될 것입니다. 이것이 풍랑 속에 던져졌던 제자들의 경험한 사건이고, 우리를 향해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작은 지식과 경험에 의지하지도 말고,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함이 곧 우리의 힘이고 소망이 됨을 믿고, 주님 안에서 복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0170924)주님을 위한 빈자리를 마련해야 합니다(막 5장 14-20절) (0) | 2018.05.11 |
|---|---|
| (20170917)예수님 안에 있는 삶, 밖에 있는 삶(막 5장 1-13절) (0) | 2018.04.29 |
| (20170827)주님 것에만 집중하십시오(막 4장 33-34절) (0) | 2018.04.29 |
| (20170820)아직은 미약하지만 소망이 있습니다(막 4장 30-32절) (0) | 2018.04.29 |
| (20170813)열매를 고대하며 기다리십시오(막 4장 26-29절) (0) | 2018.04.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