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안에 있는 삶, 밖에 있는 삶
성경: 마가복음 5장 1-13절(신 60쪽)
찬송: 70장(피난처 있으니; 통79) 436장(주와 같이 길 가는 것; 통456)
설교: 20170917.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덴마크 사람으로서 여러 동화를 쓴 안데르센이라는 유명한 작가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쓴 동화들 중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들만 해도, 「백설공주」, 「성냥팔이 소녀」, 「벌거숭이 임금님」, 「인어공주」 등이 있습니다.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들 중에서, 이 사람만큼 유명한 글을 쓴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또 이 작가가 쓴 작품들 중에 「미운 오리 새끼」라는 이야기도 유명합니다. 이 이야기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어느 날 어미 오리가 둥지에 여러 알들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날이 되어서, 알들이 모두 깨고 새끼들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한 알에서는 새끼가 나오지 않고 그대로 있습니다. 이것을 본 어미 오리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며칠 더 참고 품었더니 드디어 알을 깨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가장 늦게 태어난 새끼의 모양이 이상했습니다. 자라면서도 그 모양새는 더 이상한 모양으로 바뀌었습니다. 몸집은 큰데, 너무 못나 보여서, 다른 오리들로부터 온갖 놀림을 받았습니다. 미운 오리는, 다른 오리들의 미움을 받다가 더 이상 참지 못 하고, ‘나는 왜 이렇게 못 생기게 태어나 미움만 받을까’ 하면서, 자신이 태어난 농장을 떠나 풀숲으로 갑니다.
풀숲으로 피했지만, 그 곳에서는 사냥꾼과 사냥개에게 쫓기고, 할머니 혼자 사는 집으로 피했지만, 그곳에서도 할머니가 키우는 고양이와 닭의 미움을 받아 쫓겨나고, 호수로 갑니다.
더위가 지나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면서, 호수에는 많은 백조들이 와서 아주 우아하고 아름답게 헤엄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백조들의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가까이 가지 못 합니다. 그 백조들도 자기를 못 생겼다고 미워하고 괴롭힐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머리를 푹 숙이다가, 자기가 백조의 모습과 같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랍니다. 자신이 너무 못 생겨서, 모두에게 온갖 미움과 괴롭힘을 받고 살아왔는데, 자신은 오리들 중에서 유독 못나고 못 생긴 오리가 아니라, 백조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봄이 되자, 날개를 퍼덕이게 되고, 결국 하늘을 아름답게 날게 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날고, 헤엄치는 모습을 본 다른 백조들이 다가와서, 처음 본 이 백조가 가장 멋지다는 칭찬을 해줍니다.
이 새는 본래 백조입니다. 백조는 몸집도 크고 예쁘고, 하늘을 날 수 있습니다. 백조에 비하면, 오리는 모양새도 부족하고, 몸집에 비해 날개가 너무 작아서 하늘도 날 수 없습니다. 새라고 포함시키기에도 이상할 만큼, 오리는 백조에 비해 못났습니다.
그럼에도 이 백조는 온갖 미움과 괴롭힘을 당합니다. 심지어는 오리로부터도 못났다고 괴롭힘을 당하고 도망치게 되고, 자신도 자기의 외모를 보며 슬퍼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겠습니까? 보통, 자랑하고 괴롭히는 쪽은 잘나고 많이 가진 쪽이고, 못나고 부족한 쪽은 미움을 받고 위축되곤 합니다. 그런데 이 백조가 오히려 못나고 부족한 오리들로부터 미움을 받습니다. 또 백조는 크고 우아한 날개로 아름답게 날 수 있습니다. 날개 모양만 있지, 날 수 없는 오리에 비하면 비교가 안 될 만큼 아름답습니다. 누군가에게 백조와 오리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대부분 백조가 귀하다며 선택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리들은 자기보다 더 잘나고 예쁜 백조를 무시하고 괴롭히고, 이 백조는, 다른 무엇 때문도 아니고, 오직 자기보다 못한 오리가 되지 못 한 것에 실망하고 좌절합니다. 자신이 남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쫓기는 까닭을, 자신이 좋은 오리의 모습을 갖추지 못 했기 때문으로 생각합니다.
왜 잘나고 예쁜 백조이면서도, 자기의 귀하고 예쁜 모습을 알지 못 하고, 못나고 부족한 오리 무리에 속하지 못 한 것 때문에 아쉬워하며 쫓겼을까요? 이 백조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고, 있지 않아야 할 곳에 머물렀기 때문이고, 자신의 고귀한 신분과 그 가치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런 무지와 착각 때문에, 오리가 곧 자신의 기준이고, 가장 큰 목표이자 행복이라 여기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우화’입니다. 사람이 아닌 것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의 행동이나 생각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동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삶이 실제 우리의 삶 중에 많이 나타납니다. 더 귀하고 좋은 것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 하고, 관심도 없고, 반대로 자기보다 못하고, 부족하고, 이상한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여러분 농사 지으시면서 농약하실 일이 많죠? 그나마 요즘 농약 기계들이 많이 발달해서, 큰 논밭도 몇 시간만에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고 하는 농약통으로 하면, 할 수 있는 양도 많지 않고, 힘만 들죠? 그런데 만일 농사나 농기구에 대해 잘 모르는 어린 자녀가, 누군가가 약통을 지고 농약하는 모습을 보니 굉장히 멋있고 재밌어 보입니다. 그래서 집에 와서 부모님께 지고 하는 농약통을 사자고 했더니, 부모는 그것은 일하기 힘들어서 없고, 경운기나 트랙터로 작동시키는 좋은 농약기계가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약통을 지고 일하는 모습에 빠져버린 자녀는, 좋은 농약기계에는 관심도 없고, 약통을 가지고 있는 이웃집을 부러워하며, 오직 지고 하는 농약통이 없다는 것에 실망하고, 부모를 원망하고 조른다면 어떨까요? 이 아이를 부족하고 어리석다고 하겠죠?
그런데 이렇게 어리석은 생각에 갇혀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또 이렇게 좁고 어리석은 생각에 갇혀 사는 신앙인들도 많습니다. 고귀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세상에 시선을 고정하고 사느라, 자신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생각하지 못 합니다. 세상이 주는 단 몇 년, 혹은 몇 십 년간의 허무한 기쁨에 걸음을 멈추고 있느라, 지금 자신이 향해 가야 하는 곳이 이 땅의 높은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임을 잊고 삽니다. 단지 몇 년 더 살고, 건강하게 살려는 욕심으로 가득 채우느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이 들어갈 자리가 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같은 삶의 과정과 결과는 너무나 뻔합니다. 고귀해서, 모든 새의 부러움을 받는 백조면서도, 오리처럼 살려다, 두렵고 쫓겼던 것처럼, 평생이 두렵고, 죄악에 쫓기게 되고, 한숨과 아픔에 파묻혀 살다가, 그 삶 전체가 결국 망가지고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사람이어야 함에도, 귀신에 붙잡혀 비참하게 살았던 사람의 모습이 나오고, 그렇게 비참했던 이가 주님의 능력을 통해 귀신에게서 벗어나게 된 모습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거라사라는 지방에 가시는데, 귀신 들려 무덤 사이에서 지내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이 사람에 대한 표현들을 보면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 사람,’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람이면 사람다워야 하고, 사람으로서의 존귀함이 있어야 합니다. 짐승이 아무리 예쁘고 귀하더라도, 절대 다다를 수 없는 고귀함과 존귀함이 인간에게 있고, 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람의 모습 속에서는, 존귀함이나 고귀함은커녕,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모양도 갖지 못 합니다. 무덤이란 살아 있는 사람이 있을 곳이 아니라, 죽은 후에야 가야 하는 곳입니다. 게다가 당시 사람들에게 무덤은 가장 더러운 곳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 죽어서야 가야 하는 곳, 그렇게 모두가 피하는 곳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산다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천천히 비참하게 죽어간다’는 말이 맞을 것입니다.
게다가 11절에 보면 거기에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돼지는 똥오줌을 싼 곳에서 먹고 자는 짐승이라 더럽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돼지가 가까이 할 수 없는 짐승으로 규정되어서 더럽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본문 속 인물은, 부정한 돼지들과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사람은 사람과 함께 있어야, 존중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사람과 지내지 못 하고, 가장 더러운 짐승과 함께 지내고 있으니, 돼지처럼 취급을 받은 것입니다.
더러운 귀신에 붙들려 사는 이 사람이 더러운 짐승과 함께 지내는 것만이 아니라, 이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 또한 온통 추한 것들뿐입니다. 이 사람은 바다를 건너 거라사 지방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동안 예수님은 병든 자들을 수없이 고치셨고, 귀신에 억눌려 고통을 당하던 자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귀신에 들려 무덤에 지내고 있던 이 사람도, 이제 귀신으로부터 헤어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사람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입니다.
이 모습이, 귀신이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거나, 부탁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귀신이 먼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그 신분과 정체를 밝혔습니다. 우리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했다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관습에서는, 상대의 이름과 신분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상대를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귀신이 예수님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라고 먼저 말했다는 것은, “내가 당신의 청체를 알고 있으니, 내가 당신을 이기고, 당신을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 그러니 내게 허튼 짓 하려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부른 것이 아니라, 7절에서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보통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없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디 보통 사람이 쇠고랑과 쇠사슬을 부술 수 있겠습니까? 보통은, 쇠사슬이나 쇠고랑은커녕, 철사로 된 것들마저 끊을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엄청난 힘이 사용되는 곳은 어떻습니까?
모든 사람은 큰 힘을 원하지 않습니까? 강한 힘을 갖기 위해서, 매일 몇 시간씩 힘든 운동을 하고, 몸에 도움이 되는 영양식을 챙겨 먹고, 몸에 해로운 것들은 피합니다. 강한 힘을 가지면, 그 힘들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고, 또 그것으로 긍정적인 일을 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힘들이 귀신에 의해 붙들려 이용되면, 결국 모든 것을 파괴하는 쪽으로 사용되고 맙니다. 특히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이나 물건도 아니고, 자기 몸에 상처를 내는 것에 그 힘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귀신의 방법이고, 귀신이 그 아래 두고 종으로 부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생각해 보면, 귀신 들린 사람들과 귀신의 힘이,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이롭게 하고, 잘되도록 돕는 일에 이용되는 경우를 본 적이 있습니까? 보통 사람으로서는 낼 수 없는 그 엄청난 힘을, 자동차 밑에 깔린 사람을 구하기 위해 이용하거나,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무거운 장애물을 치우는 데 사용한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도움을 주는 긍정적인 일에 사용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엄청난 힘으로 운동경기에 나가서 신기록을 따게 만드는 경우도 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귀신에게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파괴하고, 죽이려는 관심만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돕거나, 잘되도록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귀신에 들린 사람은, 그 강력한 힘을 다른 곳에 사용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돌로 자기 몸에 상처를 내게 했습니다. 큰 돌로 자기 몸을 때렸거나, 날카로운 돌 끝으로 자기 몸에 상처를 냈을 것입니다. 돌 자체만으로도 몸이 아플 텐데, 그 엄청난 힘으로 자기 몸을 다치게 했으니, 그 고통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컸을 것입니다.
만일 이 사람이 평생 예수님을 만나지 못 하고, 그래서 귀신에게서 놓이지 못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짐승보다 못하게 살다가 추하게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사람의 삶, ‘인생’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고귀함과 존귀함을 되찾게 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 하고, 예수님 안에 있지 않으면 그 삶이 얼마나 비참해지고 망가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 한 생명은, 마귀의 공격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지 못 한 이들이, 하나님 형상의 자리를 대신 채우려 하는 모든 것이 결국 그 사람의 삶을 망치게 됩니다. 돈이 그렇고, 세상적인 권력이 그렇고, 쾌락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희망과 소망이 있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 한 사람이 예수님을 통해 귀신으로부터 놓임을 받은 것처럼, 그 누구의 힘으로도 해결 받지 못 한 우리들의 문제가 오직 예수님을 통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못 만났으면, 평생 그렇게 모두에게 버림받고, 더러운 무덤에서, 더러운 돼지들과 함께 살다가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갈 사람이었지만, 또 평생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겠지만, 오직 예수님을 만난 후에야 새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모습을 찾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 안에 머물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고귀함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까? 주님의 자녀로서 귀한 신분임에도, 고귀함과 존귀함을 잊어버리고 마치 귀신에 속한 자처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걸음을 계속하고 있습니까? 주님 밖에 있는 세상의 것들을 부러워해서 이것들에 눈을 고정하고 또 품고 사느라, 하나님의 길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 밖에 있는 자들의 결말은 분명합니다. 후회와 슬픔으로만 가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우리는, 주님 안에 머무르며, 주님의 것을 소망으로 삼고, 주님의 방법으로 살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머물 곳은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세상 속이 아니고, 주님 밖에 있는 귀신이 아닙니다. 우리가 평생 머물러 살아가고, 영생을 바랄 수 있는 곳은 하나님의 품속, 주님 안입니다.
오늘도 삶의 모든 생각과 방법과 가치관이 우리의 생각이 예수님 밖에 있지 않는지, 예수님 아닌 세상적인 것에 의존하고 있지 않는지 생각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존귀한 자녀임을 기억하고, 존귀한 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모든 짐과 어려움을 해결 받는 귀한 삶을 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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