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70924)주님을 위한 빈자리를 마련해야 합니다(막 5장 14-20절)

청명하늘 2018. 5. 11. 23:11

주님을 위한 빈자리를 마련해야 합니다

 

성경: 마가복음 514-20(60)

찬송: 182(강물같이 흐르는 기쁨; 169), 436(나 이제 주님의; 493)

설교: 20170924.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저 개인적으로 어렸을 때 물에 대한 공포증이 있었습니다. 동네 앞에 있는 큰 냇가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큰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가, 옆 동네 형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 수 있었는데, 그때부터 물에 대한 공포증이 시작되었습니다. 공포증이라고 해서, 물만 보면, 떨거나 무서운 것은 아니고, 물에 들어가 노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수영도, 흔히 개헤엄이라고 하는 자세밖에 안 되고, 그래서 아무리 해도 몇 미터 이상을 못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7,8년 전 광주에서 있을 때, 수영을 배우기로 했습니다. 수영을 잘 하면 건강도 챙길 수 있고, 물에 대한 공포증도 이겨내고, 또 제가 물속에 빠졌을 때 수영으로 빠져 나올 수 있고, 다른 사람이 물에 빠졌을 때는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배워야겠다는 들었습니다.

 

수영장에 가서 수영을 배우는데, 제가 나름 운동신경이 발달해서인지, 물 공포증도 조금씩 사라지고, 또 수영을 빨리 배우고, 꽤 잘 하는 편이었습니다. 수영하는 방법이 크게 네 가지인데, 수영을 오래 한 사람들도 네 가지를 골고루 잘 하지 못 하고, 한두 가지만 잘 하고, 나머진 잘 못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저는 네 가지 수영법도 빨리 배우고, 골고루 잘 했습니다. 제 생각만 그런 게 아니고, 같은 시간에 배우는 팀이 15명 정도 되는데, 함께 배우는 사람들도 그렇게 말하고, 또 강사도 시범을 보여야 할 때, 제가 시범을 보이도록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렇게 나름 잘 하고, 열심히 해 가는데, 딱 한 가지가 안 되었습니다. 안 쉬고 멀리 오래 수영하는 겁니다. 수영장을 한 번 오가면 50미터인데, 수영을 잘 하는 사람은 안 쉬고 10,20번을 오갑니다. 한 시간 동안 500미터 천 미터를 안 쉬고 오가면서도 별로 지친 기색도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게 그렇게 안 됩니다. 물론 처음엔 25미터도 못 갔다가, 점차 그 거리가 늘어서, 몸이 좀 좋을 때는 150미터 정도 헤엄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편입니다. 그렇게 몇 개월 배운 후에, 수영을 그만 둘 때까지 저의 한계는 최대 150미터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난 후, 다른 수영장에서도 역시 안 된다고 실망하며 고민하다가 그 원인을 알게 되었습니다.

 

깊은 숨을 쉬기 위해서는 복식 호흡, 즉 배로 쉬어야 합니다. 아기들이 태어날 때는 이렇게 배로 숨을 쉬기 때문에, 몇 시간씩 울어도 목이 안 쉰다고 합니다. 그런데 커가면서, 성격들이 급해지면서 점차 호흡이 위로 올라가서 대부분 가슴으로 숨을 쉰다고 합니다. 배로 숨을 쉬면, 호흡이 느려지고, 공기를 많이 들이마시고, 내뱉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슴으로 숨을 쉬면, 호흡이 빨라지고, 들이마시고 내뱉는 공기의 양이 적어집니다.

 

제가 수영하면서도 배로 숨을 쉬지 않고, 가슴으로 숨을 쉬었던 것입니다. 가슴으로 숨을 쉰다는 것은, 숨 쉴 수 있는 그릇의 절반 정도에 공기를 넣어놓고, 나머지 절반만 가지고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는 것입니다. 물에 대한 공포증 때문에, 폐에 사용하지 않는 공기를 절반 정도를 채워놓고, 나머지 절반의 공간만으로 적게 들이마시고, 적게 내쉬었으니, 당연히 호흡이 딸리고, 다른 사람들만큼 멀리 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채우기 위해서는 먼저 비워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바꿔 보면, 비우지 못 하면, 아무리 좋은 것이 있더라도 채울 수 없습니다. 여름에는 대부분의 음식이 쉽게 상할 수 있어서, 냉장고에 보관해야 합니다. 그래서 날이 뜨거워질수록 냉장고는 이것저것으로 가득차기 마련입니다. 냉장고가 가득 차 있는 상황에서, 아주 비싸고 귀한 소고기를 잔뜩 얻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냉장고가 가득 차 있으니, 비싸고 귀한 소고기를 그냥 밖에다 놔두고 상하게 할까요? 그렇지 않죠? 냉장고 안에 있는 것들 중에서, 냉장고 밖에 있어도 괜찮은 것을 꺼내고, 소고기를 넣든지, 이것마저 안 된다면, 냉장고 안에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덜 귀한 것들을 버리고서라도 소고기를 보관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만 귀한 소고기를 오래 보관할 수 있습니다.

 

비워야 채울 수 있고, 귀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는 덜 귀한 것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일상에서만이 아니라, 신앙과 영적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덜 귀한 것을 버리지 못 해서, 우리 속이 온갖 잡다하고 하찮은 것들로 채워져 있고, 그러면서도 이런 것들을 버릴 만한 용기와 지혜가 없으면, 꼭 있어야 하고, 중요한 것들이 들어와 있을 자리가 없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그 삶은 보잘 것 없는 것들로만 가득한 삶이 되고, 하찮은 것들을 붙드느라, 정작 중요하고 귀한 것들을 버리는 어리석은 삶이 되고 맙니다. 그런 모습으로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서면, “어리석고 실패한 삶이라는 꾸중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들을 얻을 만한 기회가 왔음에도, 하찮거나 덜 중요한 것들로만 그 삶이 채워져 있고, 또 그러면서도 이런 것들을 먼저 버려야 좋은 것으로 채울 수 있음을 아는 지혜도 없고, 좋은 것을 위해 하찮은 것을 버릴 만한 용기도 없어서 실패하고 마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 이와는 반대로 소중한 것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고 있어서, 지혜로운 삶을 선택한 이들이 함께 등장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서, 예수님은 거라사 지방에 가셨는데, 그곳에서 무덤 사이에서 지내고 있는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이 사람을 사로잡고 있던 귀신은 군대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귀신의 수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귀신이 이 사람의 영혼을 사로잡아,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은 못 하게 하고,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만 시켰습니다. 이 사람은 귀신에 억눌려, 귀신이 시키는 대로 했으니, 그 삶이 얼마나 망가졌겠습니까? 삶이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군대 귀신 들린 이 사람을 구하시기 위해, 2천 마리의 돼지를 희생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이에 대한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후의 일은,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진행됩니다.

 

우리가 읽은 성경에서는, 예수님께 동네를 떠나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구분이 쉽지 않습니다만, 이 때의 일을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귀신들은 자기들을 돼지떼 속으로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 들린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돼지 2천 마리를 희생시키셨습니다. 이 광경이 얼마나 놀라웠겠습니까? 이 과정을 본 사람들이 동네 사람들에게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고 알려줬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동네 사람들이 확인하기 위해 사건의 현장까지 급하게 달려왔습니다. 와서 보니, 그 동안 무덤에서 지내며, 온갖 미친 짓을 해서, 온 동네의 큰 골칫거리였던 사람이 옷도 멀쩡히 입고, 온전하게 있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그 어떤 것으로도 이 귀신 들린 사람을 묶어 놓을 수조차 없었고, 동네 사람들을 두렵게 했던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전후 과정을 모두 확인한 사람들은 예수님께 자기 동네를 떠나달라고 했습니다. 차라리 돼지떼의 주인이라고 하면, 그나마 큰 재산을 잃은 마음 때문이라고 수긍이 되지만, 지금 예수님께 떠나달라고 하는 사람들은, 돼지 떼의 주인도 아니고, 돼지를 치는 사람들도 아닌, 전혀 상관없는 동네 사람들입니다. 자기 재산이 없어진 것도 아니고, 귀신 들린 사람이 온전해지면 안 되는 까닭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동네 사람들은 왜 예수님께 자기들 마을에서 떠나달라고 부탁했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자기들 삶에 들어와서, 자기들에게 말씀하시고 요구하시는 것들이 싫고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예수님의 것을 받아들일 만한 빈자리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들 속은 하찮은 것들, 욕심과 분주함으로 가득 차 있고, 그런 삶이 이미 익숙하고 편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가지고 계신 예수님의 권세도 두려웠습니다. 자기들의 삶이 변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두려웠습니다. 한 생명을 위해 그렇게 큰 희생을 치러야 하는 상황도, 그런 상황이 자기들에게까지 요구될 수 있다는 사실도 두려웠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얼마 되지 않는 재산마저도 언제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염려가 가득하였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놀라운 이적을 경험한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었지만, 예수님을 받아들일 만한 여유 자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 세상에 대한 염려, 생계에 대한 생각들,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할 수 없다는 이기적인 생각들이 가득 채워져 있으니, 예수님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진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 사람이 있습니다. 귀신이 들렸다 해방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그 동안 많은 귀신에 의해 붙잡혀 살았습니다. 그 속에 많은 귀신이 가득했으니, 사람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이 할 일은 하지 않고, 귀신이 하는 일들만 저지르며 살았습니다. 죽은 이후에나 가야 하는 무덤에서 더러운 돼지와 함께 살았고, 괴성을 지르며 자기 몸에 큰 상처를 냈습니다. 이런 일들은, 온전한 사람이라면 절대 하지 않는 일들입니다. 그만큼 이 사람은 귀신이 가득했기 때문에, 귀신이 시킨 대로 행하며 귀신처럼 살고 말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 귀신이 가득해서,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나 보호도, 사랑도 들어갈 자리가 없었지만, 예수님의 명령으로 많은 귀신이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다른 것으로 채우지 않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각오로 채웠으니,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귀신에 붙들림으로써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또 이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겠다고 말씀 드렸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집으로 돌아가 가족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신 큰 은혜를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 사람 때문에 근심과 염려로 인해 좌절해 있는 가족들에게 가서 기쁨을 주라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이 가족들도 예수님을 받아들일 만한 빈자리가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의 가족은 그 동안 염려하던 마음, 평생 지울 수 없는 부담으로 남아 있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가족들 중 귀신들린 사람이 있다면, 이 문제만큼 중요하고 큰 근심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영적으로 이미 죽었던 이 사람이 예수님을 통해 살아나고, 칠흑 같은 어둠으로 가득했던 가족들의 마음에도 드디어 빛이 들어오게 되었고, 근심 걱정만으로 가득했던 마음에도 빈자리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것으로 채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일 만한 공간이 준비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귀신이 쫓겨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다른 그 누구도 아닌 가족들에게 가서, 예수님이 자신에게 어떻게 행하셨고, 또 얼마나 큰 자비를 베푸셨는지를 알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똑같은 현장에서 같은 일을 겪었지만,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동네 사람들은, 자기들의 삶에 주님이 들어오시는 것이 거추장스럽고 싫어서 떠나달라고 했습니다. 자기들의 삶에 주님을 향한, 주님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기 싫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귀신 들렸었던 사람은, 자기의 생활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려 했습니다. 빈자리가 마련되었을 때, 그것을 다른 그 무엇으로 채우려 하지 않고, 주님의 것으로 채워 가려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두 부류 중에 어느 쪽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이 두 부류 중 어느 쪽에 가까운 것 같습니까? 대부분, 주님의 말씀과 능력을 듣고 알면서도, 새롭게 요구하시는 그 삶이 싫어서 떠나시라며 피하던 마을 사람들과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생활은 너무 분주하고, 너무 빡빡합니다. 이 일 저 일 가득하고, 일이 없을 때마저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바쁘고 빈 틈 없이 가득합니다. 생활만이 아니라, 머리마저 온갖 것들로 가득합니다.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 채우기도 하고, 실망과 아픔으로 가득 채우기도 하고, 때로는 시기와 미움으로 가득하기도 합니다. 어디를 봐도 주님의 말씀과 약속이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삶은 빡빡하고 분주하고, 마음은 너무 단단해져 있습니다. 이런 삶에는 주님이 들어와 사실 수 없습니다.

 

우리 삶 속에, 우리 마음속에, 주님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머무실 만한 자리와 공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삶의 여유 공간을 마련해 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그저 교회에 나와 시간에 맞춰 예배하는 것 자체가 신앙생활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 속에서 숨 쉬실 수 있도록, 우리 삶을 바꾸고 조정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정신없이 이것저것으로 바쁘고 마음 빼앗기면, 주님은 우리 밖에 머무실 수밖에 없고, 우리는 주님과 상관없이 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위한 자리와 여유를 만들라는 뜻이, 일상생활을 그만두고, 교회 일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한,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이 있고, 이 일에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만날 수 있는 예배할 시간만큼은 여유로 남겨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생각하고 계획해야 할 것들 많겠지만, 한 번씩 자기 삶이 어디를 가고 있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 감정들이 뒤죽박죽 할 때가 많겠지만, 욕망과 미움과 원망과 불평을 내려놓고, 주님의 것으로 채우려는 간절함으로 채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이 우리 삶속으로 들어오실 수 있고, 우리 속에서 호흡하실 수 있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각자의 여러 가지 생각들, 바람들, 계산이 많이 있겠지만, 이 모든 것에 집중하다 주님을 보지 못 하는 일이 없도록, 주님을 위한 자리, 주님이 함께하실 수 있는 삶의 자리와 여유를 만듦으로써, 주님의 간섭과 인도를 받아, 삶의 여정 가운데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인도하심 속에, 주님이 주시는 복과 은혜로 채워 나아가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