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71022)주님의 것을 소망하며 기다리는 신앙(막 5장 35-43절)

청명하늘 2018. 5. 11. 23:46

주님의 것을 소망하며 기다리는 신앙

 

성경: 마가복음 535-43(61)

찬송: 405(주의 친절한 팔에; 458), 218(네 맘과 정성을; 369)

설교: 20171022.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한 동기가 서울에서 교육전도사, 부목사로 사역할 때 큰 교회에서 중고등부와 청년부를 담당하면서 겪은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입학하기 어려운 대학교나 대학원 입시 결과가 나오는 순간부터 학부모와 학생들이 난리라고 합니다. 어려운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그만큼 열심히 공부하고, 그래서 합격한 것 때문에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죠?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대학, 들어가기 어려운 대학을 보통 서울대학교라고 하죠? 서울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얼마나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지 모두 압니다. 그래서 그런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면, 당사자도 그렇고, 그 가족도 기뻐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그런데 동기의 이야기는, 합격한 당사자나 그 가족이 아니라, 좋은 대학교, 대학원에 들어가려고 준비하는 사람들이 더 난리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서울대학교에 들어간 당사자가 좋아하는 것보다, 서울대학교에 들어가고 싶고,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과 그 부모들이 더 난리라고 합니다. 좋은 대학, 대학교에 들어가려 준비하는 사람들이 왜 더 난리일까요? 그것은 좋은 학교에 이미 합격한 사람이 공부하며 사용했던 방석을 차지하기 위해서라는 겁니다. 서울대학교에 합격한 사람이 앉아 공부했던 방석에는 합격의 기운이 흘러서, 그것을 얻어 앉아서 공부하면 더 잘 되고, 그래서 합격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더 재밌는 사실은, 자신이 원하는 학교에 합격하기 위해, 앞서 합격한 사람들이 쓰던 물건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바로 교회 안에 있던 학생들, 그리고 신앙생활을 아주 열심히 하는 믿음 좋은 부모들의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게다가 이같은 모습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많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신학대학교들 중에서도, 들어가기 어려운 학교가 있는데, 이 학교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못해, 먼저 합격한 사람들이 앉았던 방석, 앉아 공부했던 자리, 사용했던 물건들을 차지하면, 합격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이런 것에 혈안이 된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과연 이것을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뭔가 기독교 신앙보다는 미신에 가까운 모습처럼 여겨집니다. 특히 하나님의 일꾼이 되려고 준비하는 이들이 그런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이 답답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런 모습이 기독교 신앙에 맞는지, 잘못되었는지를 따지지 않고 보면 어떻습니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믿음의 행동, 바람직한 믿음으로 볼 수 있을까요? 이와 비슷한 모습들이라고 하면, 기도원이나 예배당에서 더 큰 은혜를 받는 자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나중엔 이 자리를 놓고 싸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더 큰 은혜와 복을 차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을 생각하면 어떤 것 같습니까?

 

크고 좋은 것을 얻고자 하는 모습은 영적 갈급함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모습에는 치명적인 약점, 단점,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복을 인간의 좁은 생각에 한정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사랑과 복은, 성도들끼리 치열하게 경쟁하고, 다투고 이겨야만 겨우 얻을 수 있을 정도로 작고, 적고,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온 우주를 만드실 만큼 크신 것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은혜와 사랑과 복은, 온 우주의 모든 사람에게 넘칠 만큼 주어도 그래도 남을 만큼 무한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복과 능력이 이처럼 무한하고 영원하심을 알고 믿으면, 신앙생활이 달라집니다. 먼저는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지 않고, 시기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크고 많은 복과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질투하지 않습니다. 경쟁은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긴장하게 만들고 피곤하게 만듭니다. 그럼에도 경쟁하는 까닭은 그렇게 해야만 더 크고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쉬엄쉬엄 가고, 꼴찌로 가도 똑같이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다면, 피곤하고 힘들게 뭐 하러 괜히 경쟁하고, 서로 다투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영원하고 무한하고 가장 좋은 것이라는 것을 알고 믿으면 나타나는 두 번째 변화는, 주님의 때를 기다리며 조급해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꾸 조급해지고, 초조해지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내 뜻과 계획대로 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여기기 때문이고, 또 그러면서도 내 뜻과 계획대로 안 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것은 언제나 가장 좋고 무한하고 영원함을 인정하면, 내가 계획했던 일들이 뜻대로 안 되어도, 내가 만들고자 하는 삶의 틀이 틀어지고 무너지는 것 같아도, 이것 때문에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비록 내가 만들고자 했던 틀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내 것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좋은 하나님의 틀이 만들어질 것이고, 그리고 그것이 결국엔 내 삶에도 더 복되고 좋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것이 이처럼 크고 위대하고 무한함을 알기에,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거나 시기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능력을 가장 가까이서 경험하게 된 야이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에 있던 귀신들린 사람을 자유롭게 하신 후에, 건너편으로 오셨을 때에, 회당장인 야이로가 너무나 다급하게 예수님 앞에 찾아왔습니다. 자기의 딸이 곧 죽을 지경이니, 오셔서 구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하지만 다급한 야이로의 마음과는 달리 예수님의 발걸음은 너무나 느리고 더딥니다. 주위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몰려든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느리고 더딘 예수님의 걸음이 그나마 야이로의 집을 향한 듯하더니 그만 멈추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혈루증을 앓는 여인이 나타나서 몰래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았더니 그 믿음대로 병이 나았고, 예수님이 이 여인의 일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시고, 그 믿음을 칭찬하시게 된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자기 딸이 곧 죽게 되었다며 예수님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의 이야기, 그리고 그 사이에 갑자기 등장하는 혈루병을 앓는 여인의 이야기는, 지역 이름과 인물에 대한 설명이 조금씩 다르지만, 마태복음 9, 누가복음 8장에도 똑같이 등장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만약 우리가 야이로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했을까요? 지금 딸이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다른 해결책이 전혀 없습니다. 다급하게 예수님을 만나 간절하게 도움을 청해 집을 향합니다. 그런데 주위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예수님의 걸음은 더디기만 합니다. 예수님의 발걸음이 더딘 만큼 딸은 죽음을 향해 곤두발질 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느린 걸음으로 집에 가까워지는 듯하더니, 웬 여자 거지가 나타나 완전히 멈추고 말았습니다.

 

야이로와 전혀 상관없는 우리가 보더라도, 혈루증을 앓는 이 여성의 모습이 답답하고 못마땅해 보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무슨 일로 어디를 향해 가시는지, 가까이에서 보고 들었던 이 여인도 분명하게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회당장의 어린 딸, 열두 살인 어린 아이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여성 본인은 열두 해 혈루증을 앓았습니다. 병으로 고통스러웠지만, 어찌되었든 회당장의 딸보다 훨씬 오래 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열두 해 동안 이 병을 앓았다는 것은, 지금 당장 죽고 사는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위독한 어린 아이를 살리신 후에, 예수님을 붙잡고 도움을 구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이 여인은, 오랜 병 때문에, 완전히 거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빈털터리에다, 당시에는 남성에 비해 여성은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여성은 부정한 몸인지라, 사람들 앞에 나타나거나, 사람들 가까이 가서는 안 됩니다. 사회적 신분, 재산, 종교적 상황이나, 다급함과 간절함이나 그 어떤 것을 보더라도, 혈루증 여인이 나서면 안 되는 상황입니다. 바꿔 말하면, 지금 회당장이 이 여인을 꾸짖고 내쫓더라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봐도 너무나 답답하고 미운 이 여인의 행동에 대해, 야이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어린 딸이 죽어가고 있는데, 이럴 때 나서냐고 꾸짖지도 않고, 부정한 몸이면서도 왜 사람들 가까이 왔냐고 책망하지도 않고, 때와 장소를 분별하라는 싫은 소리도 한 마디 하지 않습니다.

 

야이로의 이 모습을 보면서, 믿음의 크기와 사람 됨됨이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믿음이 웬만한 사람이었으면, 예수님의 시간과 능력을 두고 이 여인과 경쟁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실제로 야이로의 상황은, 예수님의 시간과 능력을 두고 이 여인과 전쟁이라도 벌여야 할 입장입니다. 예수님이 늦어지거나, 그 능력이 약해지면, 자기 딸이 죽을 상황이고, 예수님이 제 때에 도착하시고, 그 능력이 제대로 발휘되면, 자기 딸이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야이로는, 그렇게 다급하고 어려운 상황이면서도, 이 여인과 경쟁하거나 다투지 않습니다. 원망하거나 책망하지도 않습니다. 자기 딸이 죽어가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이처럼 행동한 까닭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능력과 사랑과 자비가 한없이 크다는 것을 알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혈루증 여인을 먼저 고치시면, 자기 딸이 죽는 게 아니라, 혈루증 앓던 여인을 고치신 예수님이 딸의 생명마저도 구해주실 수 있을 만큼, 주님의 능력과 은혜와 사랑은 한 없이 넉넉하고 크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딸을 먼저 구해야 한다며 혈루증 여인을 꾸짖거나 비난하고, 경쟁하거나 다투거나 시기하지 않고, 주님의 능력과 사랑을 함께 나누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이것만 보더라도, 이단들이 말하는 144000명 안에 들어가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들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복은 속 좁은 우리들의 계산만큼 작지 않습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보이는 두 번째 모습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믿음으로 나타납니다. 당시 그 고장에서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던 회당장 야이로가, 젊은 예수님을 찾아 엎드린 까닭은, 예수님이 아니면 자기 딸이 죽을 게 뻔했기 때문입니다. 바꿔 보면, 자기 딸을 살리기 위해 야이로는 이미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본 것입니다. 소문난 의사를 불러보기도 했고, 똑똑한 사람들, 경험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해보기도 했지만, 딸이 죽어가는 것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군대 귀신들마저 내쫓아내셨다고 소문난 예수님이 마지막 희망입니다. 배에서 내려 바닷가에 계신 예수님을 뵙고, 자기 딸을 살려 달라고 엎드려 구합니다. 야이로의 계획은, 어린 소녀가 죽어간다는 것을 예수님이 들으시고, 주위 사람들에게 설명하시고 발걸음을 재촉하셔서 자기 딸을 살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이로의 이런 계획은 시작부터 어긋나고 말았습니다. 주위에 사람들은 몰려드는데, 예수님은 이 사람들을 물리치시지도 않고, 갑자기 웬 거지꼴을 한 여자 하나가 나타나 예수님의 더딘 걸음마저 아예 멈추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더디어진 발걸음에 따라, 딸의 심장이 약해지고 느려지는 것처럼 보이고, 혈루증 여인 때문에 멈춘 예수님의 발걸음 때문에 딸의 심장이 멈춘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예수님께 뭐라고 했을까요? 아마 예수님이 사람들 사이를 빨리 빠져 나오지 않으신 것, 또 하찮은 거지로 인해 걸음을 멈추신 것으로 원망하며, 빨리 가시자 재촉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딸의 위독함을 알면서도, 다른 일을 먼저 챙기느라 결국 자기 딸은 고통스럽게 죽었다며 원망하고 불평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회당장 야이로는, 일이 자기 계획과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지만,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시는 과정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하찮아 보이는 혈루증 여인 때문에 지체되는 동안, 딸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을 때조차도 예수님의 방식과 늦은 걸음에 대해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다리고, 예수님의 계획이 이루어질 때까지 묵묵히 참고 기다립니다. 믿고 따를 뿐입니다.

 

일이 자기의 좋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 철저하게 실패의 길로 가는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야이로가 주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은 까닭은, 그 무엇보다 예수님의 능력과 사랑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자기의 계획과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그래서 결국 실패하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그러나 그것은 끝난 게 아니고, 다만 우리의 길과 계획이 끝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것이 끝난 자리에서 비로소 주님의 능력과 계획이 시작되고, 주님의 계획과 뜻과 능력은 우리의 것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크고 완전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계획이 성공하고 주님의 뜻이 늦춰지는 것보다는, 우리의 삶이 무너지고, 계획이 틀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주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 비교가 안 될 만큼 우리에게 유익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본문 속에서 나타나는 야이로는,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집까지 오신 것만이 아니라, 이미 죽은 자기 딸까지 살려 주셨습니다. 이처럼 야이로가 주님의 특별한 사랑과 능력을 받은 까닭은, 야이로가 그만한 믿음으로 성숙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능력과 사랑과 은혜는 너무 작고 적어서 죽을힘으로 경쟁하며 먼저 차지해야만 얻고, 늦거나 경쟁에서 물러나면 얻을 수 없는 게 아니라, 무한함을 알고, 자기의 욕심과 욕망의 그릇을 채우려 남과 경쟁하려 하지 않았고, 그 믿음으로 남을 배려하고 참고 인내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비록 자기의 뜻과 계획이 틀어지고 실패했어도, 더 좋은 주님의 뜻과 계획을 인정하며 참고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과 능력을 풍성히 받기 원합니다. 그리고 이를 얻을 수 있는 길을, 본문 속 야이로의 모습을 통해 말씀해 주십니다. 주님의 무한한 능력과 사랑을 인정하기에 남과 경쟁하거나 다투지 않는 것이고, 내 것만 채우려 하지 않고, 하늘의 것을 바라며, 남을 배려하고 참고 인내하는 것이고, 주님의 뜻과 계획이 더 좋음을 인정하며, 기다릴 줄 아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여정 가운데, 야이로처럼 더욱 성숙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살며 믿음으로써, 오늘도 주님이 베푸신 은혜와 사랑 속에 더욱 복되고 기쁨이 가득하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