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71029)예수님은 구원자로 오셨습니다(막 6장 1-6절)

청명하늘 2018. 5. 14. 20:30

예수님은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성경: 마가복음 61-6(62)

찬송: 438(내 영혼이 은총; 495), 265(주 십자가를; 199)

설교: 20171029.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얼마 전에 아는 분을 1년여 만에 뵙고, 교회와 신앙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그분의 장인의 신앙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동안은 장인, 장모님과는 다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었는데, 어떤 이유로 본인이 다니는 교회로 모셔서 함께 신앙생활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함께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앙에 대해 여러 가지를 질문했는데, 대답하시는 것들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겁니다. 두 분은 30년 가까이 열심히 교회 다니셨고, 지식이나 학력 수준도 높은 편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두 분이 계속 신앙생활했던 교회는, 중대형 교회고, 또 교회 교육을 잘 시키는 교회로 이름이 난 교회였습니다. 두 분 모두 30년 가까이 신앙생활을 했고, 학교장을 지내실 만큼, 신앙생활 기간이나 지식 수준에서도 미숙한 수준을 넘어, 성숙과 완숙의 수준까지 다다라야 하는 때입니다. 또 전에 오랫동안 다닌 교회에서도, 신앙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또 중요한 것들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또 설교를 통해서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장인께 예수님이 지금도 정말 살아 계실까요?” 라고 물으면, “지금까지 살아 계실 리가 있나?” 라고 답하고, “우리의 몸이 죽으면 어디로 갈까요?”라고 물으면, “우리가 죽으면 끝이지, 다음 생이나 영생이 어디 있나라고 답한다는 겁니다. “지금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까요?”라고 물으면, “그걸 어떻게 알아?” 식으로 답하셔서, 질문을 던진 이분이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겁니다.

 

이런 답은, 교회에서 가르치고 정해진 답을 못 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 오래 다녀도,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를 이해하지 못 하고, 답하지 못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 계신다는 것,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 삶에 함께하신다는 것, 우리의 몸이 죽으면, 믿음에 따라 다음의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은, 신앙생활의 목적이자, 신앙의 기본 중 기본입니다.

 

바꿔 보면, 예수님이 살아 계시고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음을 믿으면, 우리 몸이 죽은 후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이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신앙생활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교회에 나오고, 예배에 참여하고, 설교를 듣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헛수고에 불과합니다. 냉정하게 보면, 시간낭비고, 아무리 좋게 본다 하더라도, 정신 수양와 위안에 도움이 되는 정도거나 취미생활밖에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몇 번 드리는 게 좋은지, 어떤 날, 어떤 시간에 예배하고, 어떻게 기도하는 게 좋은지 안 좋은지를 따지고 계산하기 전에, 우리의 신앙을 돌아봐야 합니다. 지금 무엇을 믿고 있는지,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교회에 나와 예배하는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보고 있습니까? 지금 예배하러 나아온 우리는, 무엇을 목적으로 예배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주실 것으로 생각합니까?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 정도로 여겨집니까? 어렸을 적에, 바라는 좋은 선물을 가져다 줄 거라 여겼던 산타클로스 정도입니까?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해 주시는 분이고 수단입니까? 아프고 병든 몸을 낫게 해줄 수 있는 의사와 같은 분으로 여겨집니까? 아니면 힘들고 어려운 내 일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해결사와 같은 분으로 여겨집니까? 내가 잘되고 성공할 수 있도록 지지하고 후원해 주는 분 정도입니까?

 

물론 예수님은, 때론 우리의 바람을 이루어 주시기도 하고, 아픈 몸을 고쳐 주시기도 하고, 돈을 벌 수 있도록 하실 수도 있고, 문제와 어려움을 해결해 주실 수도 있지만, 그러나 주님은 이런 목적으로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단지 이런 목적과 수단으로 여기며 믿는 것은, 신앙을 이제 시작한 초보 신앙인에게나 있을 법한, 너무 낮은 수준이고, 어쩌면 믿음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수준입니다.

 

어떤 목적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든, 이제 중요한 것은, 주님을 바르게 알고, 바른 믿음으로 믿고, 바른 걸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를 가볍게 여기고, 미신이나 맹신의 수준에 머무르다가는, 아무리 많이 예배하고, 기도하고, 오랫동안 신앙생활해도, 결국 주님과 상관없거나, 주님으로부터 버림받게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고향을 방문하셨는데, 고향 사람들로부터 오히려 배척받는 장면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내용이, 앞에 있는 세 사건들 뒤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고향을 방문하시기 전에, 예수님이 거라사 지방에서 군대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셔서, 한 생명을 구하셨습니다. 그리고 건너편으로 오셨을 때, 12년 동안 혈루증 때문에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여인이,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았더니 그 병이 나았습니다. 그리고 이미 죽은 회당장의 어린 딸을 살리셨습니다.

 

이 세 가지 사건을 읽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성경은 왜 이 세 사건을 연이어 기록했겠습니까? 이 세 사건의 한 가지 공통점이라고 하면, 예수님의 신성, 즉 예수님이 인간 너머의 능력, 하나님이 가지시는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겁니다.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은, 무덤 사이에서 지냈는데, 그 힘이 너무 세서, 그 누구도 휘어잡을 수 없었습니다. 쇠고랑과 쇠사슬로 묶어도, 이것을 끊고 다시 무덤 사이로 갔습니다. 그 누구도 귀신의 엄청난 힘을 이겨낼 수 없었습니다. 그저 그 피해가 자기들에게 오지 않기를 바라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곳에 가시자, 귀신이 먼저 예수님을 향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결국 예수님의 명령에 강하고 많았던 귀신들은 모두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 누구도 쫓아내지도 못 하고, 휘어잡지도 못 했던 이 귀신의 힘을 예수님은 어떻게 이기고 쫓아낼 수 있었겠습니까? 귀신이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라고 했던 것처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시니 사람으로서는 해낼 수 없는 일들을 해내십니다.

 

건너편으로 오신 예수님이 회당장의 집으로 가시는 과정 중에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인을 만납니다. 이 여인은,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으며, 많은 의사를 찾아갔지만, 병은 오히려 더 심해졌고, 재산을 모두 잃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잡으면, 병이 나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고, 또 그 믿음대로 자기의 병이 나았습니다.

 

병에 관한 한 의사는 전문가들이고, 능력자입니다. 그럼에도 이 여인의 병을 못 고쳤는데,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것만으로 병이 모두 깨끗해졌다는 사실도 역시 예수님이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혈루증으로 고통을 당하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고 병이 낫는 중에, 위급했던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예수님이 회당장의 집에 도착하셨을 때, 당시 관습대로, 사람들이 죽은 아이를 위해 통곡하며 떠들어댔습니다. 아이가 죽은 것을 이미 확인했다는 것이고, 사람의 경험과 지식에 따르면 죽은 게 분명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아이가 죽지 않고 잔다고 말씀하시고, 세 제자와 함께 들어가셔서 이 아이를 살리셨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인간의 몸을 가장 잘 알고, 큰 질병을 고칠 수 있는 유능한 의사라고 하더라도, 이미 죽어 몸이 식어버린 사람을 고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아이를 살리셨습니다. 사람을 살리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사람의 능력을 넘어 하나님의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줍니다.

 

세 가지 사건이 모두 예수님이 가진 능력과 권위가 사람의 것을 넘어서고, 하나님의 것과 같음을 알려주고, 더불어 예수님을 간절하게 찾는 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예수님과 대화는 기대조차 하지 않고, 옷자락이라도 만지길 간절하게 소망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 역시 예수님의 도움을 받고 싶어서, 예수님이 아직 마을에 들어오시지 않고, 바닷가에 계실 때 찾아가 엎드려 간청했습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나, 회당장 야이로에게 예수님은 유일한 희망이었고, 그만큼 간절했습니다.

 

이 과정을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향으로 가게 되었을 때 어떤 마음이었겠습니까?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에 대해 잘 알고, 또 예수님이 다른 어느 곳보다 더 사랑하실 것이니,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크게 환영하고, 그곳에서 엄청 기적이 일어날 거라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에 대해 소문만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병이 낫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으니, 예수님의 고향에서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알고, 믿어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거라는 게 우리의 계산이고 판단입니다. 제자들의 생각도 역시 그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고향에서는, 일이 모든 이의 기대와 계산과는 정반대로 진행됩니다. 그곳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아픔과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고 부탁하는 게 아니고, 동네 사람이기 때문에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을 인정하고 환영하기는커녕, 오히려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몇 명의 환자에게 안수해서 고치시고 고향을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대하는 고향 사람들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의 능력과 지혜와 권위를 몰라서, 이렇게 소홀히 대하거나, 달가워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회당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동안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을 소문으로 모두 들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2절에서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잘못된 자기들의 기준을 내세워서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자기들이 가진 판단과 계산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결과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손해 보셨습니까? 예수님의 사역에 방해가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모든 피해와 손해는 철저히 고향 사람들의 몫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전혀 상관없던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과 믿음만으로도 귀신이 쫓겨나고, 병이 낫고,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면,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면, 몇 배의 복과 은혜를 누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향 사람들은, 다시 올 수 없는 기회의 소중함도 모르고, 그렇게 자기들의 선입견 속에 예수님을 무시하고, 달가워하지 않아서, 예수님은 겨우 몇 사람의 환자만 고치고 고향을 떠나셨습니다. 가장 큰 은혜, 큰 사랑, 큰 복을 받을 기회를 얻었음에도, 환자 몇 명 낫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예수님 고향 사람들과 같은 모습은 없습니까? 우리가 본문 속으로 들어간다면, 혈루증을 앓는 여인과 회당장 야이로처럼 예수님을 맞이할 것 같습니까?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처럼 대할 것 같습니까?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선입견과 고집에 눈이 가려서, 이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귀한 예수님의 능력과 구원하시는 목적을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자기들의 잣대로 예수님의 능력과 신분을 맘대로 재단하다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과 그 능력을 보면서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의 경험과 기준으로 잣대질해서 예수님이 오심을 너무 보잘것없는 것으로 제한하는 고향 사람들의 모습은, 지금 우리들의 신앙생활 속에서도 똑같이 반복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모습이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여러 신들 중 한 분으로 알면서, 이 신을 믿으나, 저 신을 믿으나 어차피 길은 하나라고 생각하면서, 그저 착하게 살면 일이 잘되고 복을 받는 것이고, 교회에 나와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까닭은,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알면서도, 능력 있는 의사 정도로 여기는 고향 사람들의 고집과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병을 고치고, 마음의 평안을 주시기 위한 목적으로 오신 게 아닙니다. 돈을 잘 벌게 하고, 일이 잘되도록 하시기 위해 오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을 그런 수준으로 낮춰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능력있는 분으로 오신 게 아니고, 사람으로서는 이겨낼 수 없고, 얻을 수 없는, 죄와 구원과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신들 중 하나가 아니라, 예수님이 아니면, 죄를 씻을 수 없고, 그래서 결국은 죽음 뒤에 영원히 고통 속에 살게 됩니다.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예수님에 대한 바른 믿음이 없으면,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마음의 평안이나 위로를 받기 위해 주님을 믿는 게 아니고, 내 병이 낫고, 부자가 되고, 성공하도록 도우시는 분 정도로 믿는 게 아니고, 주님이 아니면 몸이 죽은 이후에 약속된 영생의 자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에,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주님의 그 능력과 구원자로서의 권위를 인정하며 유일한 길, 유일한 진리, 유일한 생명으로 믿는 것입니다.

 

예배의 자리에 자주 앉아 있는 것보다, 오랫동안 신앙생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에 대한 바른 믿음으로,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내 이익과 성공을 위해 주님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게 아니고, 주님의 약속과 능력을 목적으로 삼고, 나의 삶을 수단으로 낮추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 앞에 나아오되, 우리의 신앙생활과 생각을 돌아보고, 주님이 원하시는 길로 믿고 따라가고, 주님이 유일한 구원의 통로이시고, 이를 위해 오셨음을 믿고 살아감으로써, 구원과 영생의 복과 더불어, 우리 삶 가운데서도 주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평안하고 복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