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보입니다
성경: 마가복음 14장 10-21절(신 79쪽)
찬송: 279장(인애하신 구세주여; 통337), 265장(주 십자가를; 통199)
설교: 20181028.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약 10일 전에 뉴스로 올라와서 화제가 된 것들 중에, ‘스티븐 호킹이 남긴 마지막 말은 “신은 없다”’라는 제목을 단 기사들이 있습니다. 스티븐 호킹이에 대해 잘 모르실 수 있는데, 물리학 분야에서 특출한 사람입니다. 저도 과학이나 물리학 등에 대해 잘 몰라서, 이해하기도 어렵고, 설명 드리기도 어렵습니다만, 과학 분야에서 최고의 인물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대부분 동의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이 사람은 젊어서부터 심각한 장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루 게릭’ 병이라고도 하는데, 근육이 약해지고 작아지는 병입니다. 이것은 치료법이나 약이 없는데, 심해지면 움직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언어 장애, 호흡 곤란까지 일어나는 심각한 질병입니다. 21세에 이 병이 시작되어서 예상보다 훨씬 오래 산 76세까지 살았지만, 움직이는 것은 물론 말도 할 수 없어서, 기계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말도 목을 통해서 할 수 없어서, 특별한 장치를 이용해야 했습니다.
(스티븐 호킹 사진들)
이 사람이 올 3월에 사망했는데, 생전에 쓴 책이 이번에 나왔고, 이 책에서 신은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면서 다시 화제가 된 것입니다. 최고의 과학자,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이, “하나님이 없다”고 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스티븐 호킹 박사는, 살아 있을 때도 신은 없다는 주장을 많이 펼쳤습니다. 그런데 사망 후에 발간된 책에 나왔다고 다시 화제가 된 까닭을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걸 보고, 두 가지를 생각되었습니다. 하나는, 신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생각하고 싶은 사람들이, 이 사람의 말을 많이 이용하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 신이 없다고 했는데, 이것을 어떻게 반박할 것이냐?”며,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스티븐 호킹이 “신은 없다”고 하는 말은 예상 가능할 뿐만 아니라, 당연한 주장이라는 것입니다. 스티븐 호킹이 연구하고 발표한 분야는 과학, 물리학입니다. 여기에서 법칙이든지, 가설이이든지 인정받으려면 반드시 검증이 필요합니다. 바꿔 말하면, 검증되지 않는 것은 과학이나 물리학에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과학과 물리학의 기본은 언제나 숫자입니다. 수로 검증되고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인정되고, 그렇지 못 한 것은 인정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예 다룰 수 없는 분야입니다.
하나님을 과학에서 어떻게 연구하고 검증할 수 있겠습니까? 과학에서 다룰 수 없는 것들이 셀 수 없이 많죠? 사랑의 종류와 크기에 대해서는 다양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사랑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과학에서 사랑을 검증할 수 있을까요? 사랑의 크기를 숫자로 나타낼 수 있습니까? 일정한 형태와 성질을 갖지 않은 것들을 ‘추상적’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 과학에서는 검증할 수 없습니다. 미움, 아름다움, 정, 기쁨, 신뢰, 불신 등을 과학에서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것들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있냐 하는 것은, 과학으로 검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 등은 모두 믿음이냐, 불신이냐의 선택의 문제이지, 검증할 길이 없습니다.
기독교인들 중에, 하나님과 성경을 과학으로 입증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과 모임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성경의 사건과 기적 등을 과학으로 증명해 보이겠다며, 다양한 방법과 시각으로 해석하곤 합니다. 그 의도는 괜찮습니다만, 이것은 성경과 신앙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과학적으로 증명해서, 사실로 확인되면 믿고, 그렇지 않으면 믿지 말라고 주신 게 아닙니다. 몇몇은 그런 방법으로 증명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죄, 죽음, 믿음, 대속, 구원 등을 어떻게 증명하겠습니까?
하나님과 성경은 믿음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는 원리도 이것을 이야기해 줍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씀하시는데, 믿음은 바라는 것들을 보장해 주고, 안 보이는 것들까지도 믿음 때문에 확신하게 만들어 줍니다. 바꿔 보면,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과 말씀 속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고, 확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두 가지 사건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로 결심하고, 당시 예수님을 죽이려 애쓰던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금액과 방법을 논의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12절부터 시작된 것으로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유월절 명절을 지키셨다는 내용입니다.
이 두 가지를 따로 나누어 설교를 준비하려다, ‘성경에서 왜 이 두 가지 일을 이어서 기록했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유다는 3년 넘게 예수님을 따라다녔는데, 유월절을 앞두고 예수님을 팔기로 결행했고, 예수님은 제자가 자신을 판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여전히 유월절을 지키신다면 이를 통해 주시고자 하는 말씀이 있을 것입니다.
유월절에 대해서는 지난주에도 잠깐 말씀드렸습니다만, 모세가 이집트의 왕에게 가서 자기 백성들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하지만, 이집트 왕이 거부합니다. 바로 왕의 고집을 꺾기 위해 하나님은 10가지 재앙을 내리시고, 마지막으로 장자가 죽는 재앙을 내리십니다. 여러 재앙들을 내리신 까닭은 이집트 왕의 고집을 꺾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네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섞여서 함께 사는 것처럼, 멸망시키시려는 이집트 사람들과, 구원하시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같은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섞여 사는지라, 자칫 재앙을 받아야 하는 이들이 구원을 받고, 구원을 받아야 하는 이들이 재앙을 입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게 사람들의 눈으로 확인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 즉 출입문의 좌우 기둥과, 위 가로대에 바르는 집안에는 재앙을 안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는 게 어려운가요? 쉬운가요? 양을 잡고 피를 바르는 게 귀찮을 수는 있고, 또 양이 아까울 수는 있지만, 너무 힘들거나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더욱이 이것을 하면, 구원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재앙을 받는다는 것에 비춰 보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큰아들이 죽는 재앙을 피할 수 있는 것에 비하면, 너무 쉽고 간단합니다.
대가에 비하면, 거기에 들이는 수고와 노력이 너무 보잘 것 없습니다. 만약 가정에 누구 하나가 죽게 될 심각한 질병에 걸렸다면, 이를 고치고 해결하려고 모든 것을 희생하죠? 가진 집과 논밭만이 아니라, 할 수만 있으면 빚을 내서라도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장자와 가축의 첫 번째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양의 피를 문밖에다 바르는 거라는 겁니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도 ‘설마 저런 것으로 사람이 죽고 사는 게 결정될까?’ ‘괜히 아까운 양 한 마리만 죽이는 것 아닌가?’ ‘여러 재앙이 겪는 등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한데, 양의 피를 안 바르면 첫째들이 죽고, 바르면 산다는 게 정말일까?’ 하며 고민하고 갈등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각자의 기준에 따라 행동합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인 이들은 양의 피를 문틀에 발랐고, 합리적인 계산에 따른 이들은 터무니없는 헛소문으로만 듣고 흘려보냈을 것입니다. 괜히 양 한 마리 잡는 손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양의 피를 문틀에 바른 것도 아닐 것입니다. 이집트 사람들이라고 해서, 이것을 무시한 것도 아닐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흘려보내고, 양의 피를 문에 바르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본래 구원을 약속받았지만, 이것을 믿지 않았으니 재앙을 입게 되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재앙을 받아야 하는 이집트 사람들이지만, 그 동안 여러 재앙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알고, 마지막 재앙에 대한 경고를 듣고 믿어서, 양의 피를 인방과 문설주에 바른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랐기 때문에, 이집트 사람임에도 재앙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다는 예수님을 팔기로 하고, 예수님은 유월절 명절을 지킴으로써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은 믿음의 영역이라는 겁니다. 믿음의 영역에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을 이끄는 등불이고, 우리의 아픔과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열쇠가 됩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약속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어긋나지 않은 진리고,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그러나 계산과 눈의 증거로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은 모두 터무니없는 이야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문설주와 인방에 양의 피를 바르면, 장자와 짐승의 첫째들이 죽는 재앙을 피할 수 있다고 하는 것처럼, 경험과 증거도 없고, 납득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로 한 것도 역시 계산의 눈으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팔았다는 이유 때문에, 유다가 무척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돈주머니를 책임지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 주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이들의 모든 식사와 활동비까지 챙길 정도라면, 유다가 머리 좋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머리 좋은 유다가 왜 예수님을 팔기로 했겠습니까? 유월절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약속마저 자기의 머리로 계산하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사람의 눈으로 보니, 허망한 이야기로밖에 안 보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사람의 귀를 통해 들으려 하니, 헛소문으로밖에 안 들립니다.
유다는 3년 넘는 시간 예수님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함께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실 때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예수님이 영생과 구원에 대해 말씀하실 때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으로 간다는 약속도 자주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많은 기적을 보고, 자신이 행하기도 하고, 말씀을 듣고, 가르쳤지만,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돈을 다루고 계산하는 것만큼 확실하지 못 했습니다.
돈은 쓰면 적어지고, 덜 쓰면 더 쌓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것만큼 눈에 확실하고, 분명한 것도 드뭅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마저도 돈처럼 확실하고 분명하길 바랐습니다.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머리로 계산할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여주신 말씀과 약속들은 모두, 돈이나 숫자처럼 확인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가기 위해서는, 오직 믿음 하나만 있으면 된다니, 세상에 그런 게 이해가 됩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며 신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도 계산이 안 되는데, 그런 분이 돈과 권력을 가지고 오지 않고, 가장 가난한 동네의 가난한 목수 집안에 태어났다고 합니다. 세상을 구원한다는 분이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고, 또 3일만에 살아난다고 합니다. 요즘으로 표현하면 가룟 유다는, 과학의 눈으로 하나님의 약속과 예수님의 말씀이 검증되기를 바랐습니다. 과학적 검증이 주어질 수 있다면, 제자들 중에 가장 확실한 믿음과 행동을 보일 사람이 바로 유다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과 구원은 검증할 수도, 손으로 만질 수도, 눈으로 확인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볼 수 있고,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도, 가장 귀한 것들을 바쳐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시지 않고, 오직 믿음 하나만으로 결정된다는 이 말씀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마치 인방과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면, 재앙을 피하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하신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임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아서 결국 재앙을 입게 된 것처럼, 예수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했음에도 불구하고, 검증되지 않는다며 예수님을 팔기로 결심한 유다처럼,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하고, 신앙생활을 오래 한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을 보장하지 못 합니다. 지금 우리 속에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의 약속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 구원 여부를 판가름할 것입니다. 이것이 있으면, 비록 한 것 없고, 신앙생활 오래 하지 않아도 구원의 길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들을 확인해야만 믿고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약속들이 이해될 수 없는 것이라며, 더 확실한 길과 방법을 기다리며 머뭇거리는 사람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아무리 많은 선행을 행하고, 또 아무리 많은 예배를 드리고, 봉사해도 구원을 얻지 못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확인하고 검증한 자들이 얻는다고 하시지 않고, 믿음으로 얻고, 과학의 눈인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게 아니고,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계산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확인 가능한 게 아니고, 믿음으로 확신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매일의 신앙생활에서 필요한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오직 믿음 하나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봐야 하고, 믿음의 발걸음으로 향해 걸어가야 합니다. 믿음의 귀를 열어야 하고, 믿음의 감각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약속을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의 선물을 허락하십니다. 이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고, 갈 수 있습니다. 유다처럼 계산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들을 얻으려다 실패하는 신앙인이 되지 말고, 우리 모두가 오직 믿음의 눈을 통해 바라보고, 믿음의 손과 발을 통해 확신함으로써,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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