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81104)깨지고 은혜를 기억하는 신앙(막 14장 17-26절)

청명하늘 2018. 11. 4. 20:18

깨지고 은혜를 기억하는 신앙

 

성경: 마가복음 1417-26(80)

찬송: 212(겸손히 주를 섬길 때; 347), 210(시온성과 같은 교회; 245)

설교: 20181104.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교회와 성경 속 이야기지만, 오히려 밖 일반 사회에서 더 많이 사용되고, 언급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상대가 안 될 만큼 불리한 싸움을 말할 때, 일반 사회에서도 다윗과 골리앗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치유라는 뜻의 힐링’(healing)도 교회의 영향으로 사회에서 많이 사용되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내용도 역시 일반 사회에서 많이 언급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식사하신 자리라고 해서, ‘최후의 만찬혹은 마지막 만찬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또 이것을 주제로 한 그림이 가장 유명한 그림들 중 하나입니다. 500년 전에 이탈리아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화가이자 학자가 있는데, 이 사람이 그린 최후의 만찬모나리자라는 그림과 더불어 가장 유명하고 비싼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림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몇 번은 보고 들었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사진-‘최후의 만찬’ ‘모나리자’)

 

오늘 본문의 내용이, 사회에서는 가장 비싸고 화려한 그림으로 기억될지 모르지만, 성경의 상황은 정반대입니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훨씬 더 무겁고 답답한 것들이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보내는 마지막 날로서, 위로와 사랑과 섬김이 가득해야 하는 자리인데, 오히려 긴장과 제자들의 어리석음과 욕심만 더 드러나는 자리에 불과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예수님의 시간으로 바꿔 보면, 이 세상에서 보내시는 마지막의 하루 전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요일로 보면, 예수님이 금요일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데, 본문의 일은 목요일 저녁에 있었습니다. 돌아가시기 하루 전에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모아놓고, 함께 식사하시는 자리입니다.

 

3년 반을 제자들과 함께하시고, 이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말씀을 가르치시고, 마지막으로 함께하실 수 있는 시간이라면, 제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 하실 일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에게 성만찬을 행하신 것은, 이것이 단지 유월절이라는 절기를 지키셨다는 의미를 넘어, 이것 자체만으로 우리에게 꼭 하고 싶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제자들이 마음을 하나로 모아 하나님의 일을 담당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족한 점들이야 워낙 많아서, 좋은 점들을 확인하는 게 더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속 성만찬과 연결해 보면, 제자들이 특히 부족한 것은 하나가 되지 못 하고,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으로 행동했다는 점입니다.

 

17절부터 시작된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하시면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제자들 중 한 사람이 자신을 팔 거라는 것이었습니다. 판다는 것은 배신하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고난과 죽음으로 내몬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미를 충분히 잘 알고 있었습니다. 10절에 보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 위해, 대제사장들에게 찾아갔던 것을 보면, 이미 예수님을 죽이려는 종교지도자들의 생각과 계획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만 알고 있었겠습니까? 매일 예수님과 동행하며 함께하다 보니, 다른 열한 제자도 분명하게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오랜 시간 동안 함께 먹고 자며 따르던 스승을 누군가가 배신하고 판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을 파는 유다는, 21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내리시는 화를 입게 될 것입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좋을 정도로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열한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열두 제자들 중 하나가 판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끝까지 찾아내고, 어떻게 해야 그 위기를 이겨낼 수 있는지 알아내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야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열한 제자들이 보이는 모습들은 엉뚱하기 짝이 없습니다. 제자들의 반응을 19절에서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근심한 것을 보면,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잘못이라는 것에는 모두 동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모두 나는 아니지요?”라고 묻는 것으로 끝나버렸습니다. 스승인 예수님이 위기에 처해 있고, 위기에 몰아넣는 사람이 동료들 중 하나라고 하는데도, 단순히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의 극히 개인주의적인 모습을 보이고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성만찬을 행하시면서 예수님이 떡을 주신 까닭을, 제자들의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모습을 말씀하시기 위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떡, 빵이 갖는 다른 특징도 있겠지만, 각자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모두가 하나가 된다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는 매일의 식사로 밥을 먹습니다. 성경 속 사람들은 주로, 밀을 가루로 내서 빵으로 먹었습니다. 매일의 식사라는 의미에서 보면, 쌀이나 보리로 밥을 해먹든지, 밀로 가루를 만들고, 그것으로 빵을 만들어 먹는 것이든지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성만찬에서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우리 방식대로, 쌀이나 보리 등으로 밥을 지으면, 밥알 하나 하나가 자기의 모습을 유지합니다. 입에 넣을 때까지 그것이 쌀인지, 보리인지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떡이나 빵을 만들 때는 이런 모습이 모두 사라집니다. 떡이나 빵을 만들 때는, 곡식을 그대로 삶거나 찌는 것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일단 곡식을 가루로 만들고, 이 가루들을 반죽하거나, 가루에다 필요한 재료를 넣고, 찌거나 굽는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게 바로 떡과 빵입니다. 떡과 빵에서 보면, 그것이 어떤 곡식으로 만들어졌는지, 재료의 본래 모습이 어땠는지 확인이 안 됩니다. 완전하게 가루가 되고, 또 그것들이 서로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보리로 만들어진 것인지, 밀로 만들어진 것인지조차 구분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유월절 성만찬을 통해 제자들에게 주시고자 했던 모습입니다. 세례식 때의 문답 중 성찬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이는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또한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것과,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것을 확인하는 예식입니다.”

 

우리는 각 개인의 신앙으로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 있고, 반대로 주님으로부터 꾸중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의 신앙생활을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팔든지 말든지, 예수님을 배신하든지 말든지, 자신만 아니면 된다는 식의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가, 결국은 예수님을 파는 데 있어 소극적인 동조가 되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것에 대해 암묵적 동조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이런 못된 습성과 잘못된 신앙생활을 보시며 얼마나 한탄하셨겠습니까? 그래서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제자들, 마치 밥알처럼 죽어서도 자기를 희생하지 못 하여, 흩어지고 나뉜 제자들을 보시면서, 가루가 되어 자신의 것은 온전히 없어져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려 하셨습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여전히 한 알의 곡식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만 그에 속하지 않으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으로 사는 성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파는 사람이 나만 아니면 된다고 여기는 제자들의 모습과 아주 흡사하지 않습니까? 정말 제자들이 예수님을 사랑했다면,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더 섬기며 가르침을 받고자 했다면,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의 어리석고도 소극적인 생각에만 그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교회를 보시며, 밥알처럼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삶이 아닌, 가루가 된 곡식처럼, 우리가 주님과 하나가 되고, 교인들이 서로 협력하기를 원하십니다. 자기만의 이익과 편의, 소극적인 생각을 모두 깨뜨리고, 가루가 되듯 하나가 되면, 더 아름답고, 더 많은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약속하신 큰 복을 누릴 수도 있습니다.

 

성만찬을 통해 주시는 두 번째 말씀은, 예수님은 부족하고 어리석은 제자들까지도 아끼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열한 제자들처럼 어리석고 이기적인 이들만이 아니라, 심지어는 가룟 유다처럼 앞장서서 배신하는 이를 위해서도 예수님은 살과 피를 내주십니다.

 

논어에서 공자가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獲罪於天 無所禱也)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이 나온 상황은 전혀 다릅니다만, 이 말처럼 오늘 본문 속 유다에게 꼭 맞는 말은 없을 것 같습니다.

 

유다는 자신의 가정과 생계를 뒤로하고 예수님을 따랐고, 재정을 담당할 만큼 신임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계산에 맞지 않고, 자기의 계획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스승인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가룟 유다의 삶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좋을 정도로 저주받았습니다. 어디 이것뿐이겠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짓고, 손해를 끼치면, 피해자에게 용서를 빌고, 손해 입힌 것에 대해서 배상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유다는 다른 누군가에게 죄를 지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거스르고, 하나님의 아들을 사탄의 세력에 갖다 바쳤습니다. 사람에게 죄를 짓는 것도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유다는 아예 하나님의 아들을 팔고 죽이는 일에 가장 앞장섰으니, 어디에서 누구에게 가서 용서를 바라며 빌 수 있겠습니까? 유다는 빌 곳조차 없는 너무 크고 무거운 죄를 저질렀습니다. 예수님을 팔기로 다짐하고, 행동하는 유다의 상황을 보면, 도대체 빌 곳 하나 없을 만큼 너무 크고 무서운 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자를 위해서도 자비와 은혜를 베푸십니다. 예수님이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시다 고백하면서도, 예수님의 그런 모습을 실감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는 것보다는, 그런 기도와 신앙고백이 익숙해져서 더 자주 사용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그저 입에 바른 소리에 그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저 좋은 말씀만 하신 게 아니고, 그 말씀처럼 직접 보여주시고, 행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을 파는 유다에게까지 사랑과 용서의 범위를 크고 넓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만찬을 행하시면서, 제자들 중 한 사람 유다가 자신을 팔 것임을 아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유다의 입장이었으면, 부끄러워서 그 자리에 오래 있지 못 할 것입니다. 또 제자에게 팔려야 하고, 또 그것을 아는 입장이라면, 절대 그 자리에 머물지 못 하게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여전히 성만찬 자리에서 가룟 유다를 쫓아내지도 않으셨습니다. 유다에게만 떡과 잔을 안 주신 것도 아닙니다. 23절에서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라는 말씀을 보면, 가룟 유다에게도 떡과 잔을 주셨고, 유다도 다른 제자들처럼 성만찬에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돈을 받고 자신을 파는 유다마저 불쌍히 여기시고, 자신의 몸과 피로 대신 희생하셔서 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큰 죄를, 그것도 하나님께 저저른 유다마저도, 주님은 버리지 않으신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와 자비와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많은 죄를 짓습니다. 사람에게 작고 큰 죄들을 짓곤 합니다. 또 하나님께도 죄를 저지를 때도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죄의 가운데 있는 사람으로서, 우리 스스로 생각해 봐도, 용서받지 못 할 죄를 짓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저지르기도 하고, 하라고 하신 것들을 행하지 않는 죄를 짓기도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잘되고 복받는 길이라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천국에 대한 소망마저 버리고, 대신 사악하고 욕심 가득한 길을 따라 살기도 합니다. 편하고 쉬운 것들에 눈을 고정하고 가다 보면, 어느새 하나님으로부터 너무 멀어져 버린 자신을 발견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이런 우리들까지도 기회를 주시고, 기다려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자신을 판 유다에게도 용서와 은혜의 떡과 포도주를 베풀어 주신 것처럼, 우리의 수많은 죄와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와 어리석음을 위해 대신 피를 흘리시고, 대신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저지른 수많은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여전히 빌 곳이 있고, 회개하고 돌아설 자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한 달에 한 번 성찬을 행합니다만,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매일 매순간 이를 기념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였으니, 자신만을 위하지 말고, 밀알이 가루가 된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봉사하며, 함께 믿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모두가 함께 구원의 자리에 이르도록 힘써야 합니다.

 

더불어 하나님은 우리가 무슨 죄를 저질러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 스스로도 부끄럽고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우리를 향해 베푸시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를 기억하고, 날마다 더욱 주님 가까이 다가서고, 주님의 은혜를 바라며 죄로부터 철저히 멀어져 살아야 합니다.

 

오늘도 성만찬을 통해 주시는 주님의 뜻과 말씀을 기억하고, 주님의 자녀답게 한마음으로 교회를 섬기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 안에서 살아감으로써, 날마다 주님이 베푸신 은혜와 복을 충만히 받고 살아가는 복된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