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확신의 돌을 놓아가십시오
성경: 사무엘상 7장 12-17절(구
찬송: 287장(예수 앞에 나오면; 통205), 347장(허락하신 새 땅에; 통382)
설교: 20190609.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최근 우리나라의 큰 고민들 중 하나는 인구 노령화와 감소입니다. 초중학교를 다닐 때만 하더라도, 오히려 인구가 너무 많아, 몇 십 년 이후에는 온갖 문제가 발생할 거라고 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인구를 줄이는 게 미래를 위해 가장 좋은 대비로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당시 인구와 관련해 나온 표어들 중에 유명하고 많이 이용되었던 것은 ‘아들 딸 구별 말고 하나만 낳자’였습니다. 그래도 인구가 너무 많다며 심지어는 ‘한 집 건너 하나만 낳자’는 표어까지 나왔습니다. 그때는 가족이 많으면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인구가 줄어든다고 하고, 이제는 아이를 많이 낳는 게 애국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아이를 많이 낳도록 하기 위해 여러 정책이 세워지고, 정책대로 안 되어서 근심거리로 남아 있습니다.
인구가 얼마나 크게 줄었는지를 제가 쉽게 체감할 수 있는 것들 중 하나가, 다녔던 중학교 학생 수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당시는 한 학년에 220명 정도고, 전교생이 650명가량 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금 찾아보니 전교생이 겨우 27명이라고 합니다. 당시에 비하면 20분의 1도 안 되는 수죠?
학생 수는 크게 줄었지만, 반대로 크게 늘어난 것은 자동차 등 교통수단입니다. 당시는 자가용을 가진 집은 거의 없었고, 통학 시간 내에 있는 한 두 대의 시내버스를 이용하거나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곤 했습니다. 다른 날에는 차에 사람들이 많은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참을 수밖에 없었지만, 문제는 토요일처럼 읍내의 고등학생들까지 함께 끝날 때입니다. 이때는 읍내의 고등학생과 중학생들까지 함께 타니, 위험해 보일 만큼 학생들을 가득 싣고 다녀야 했습니다.
집에서 중학교까지의 거리가 7km정도 되는데, 저는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곤 했습니다. 좀 늦어서 쉬지 않고 빨리 달리면 10분 약간 넘는 정도에 도착하는 거리니 먼 거리는 아니죠? 그런데 비가 오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는 버스로 통학할 수밖에 없습니다.
버스로 학교를 갔는데, 돌아오는 시간 버스에 사람이 너무 많이 타서 못 타는 경우는 다음 시간까지 기다리기도 하고, 토요일처럼 시간 여유가 있으면 걷기도 했습니다. 7km정도니 걸으면 한 시간 정도 걸립니다. 요즘이야 운동 삼아서 그렇게 걷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때는 버스를 못 타서 걷는 것이니, 귀찮고 지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앞 동네에 사는 한 친구가 걸어서 오가는 걸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해서 물어봤습니다. 그 친구의 말에 따르면, 그냥 걷기만 하면 귀찮고 지루할 수밖에 없으니, 중간 중간에 목표물을 몇 개 정한다는 겁니다. 학교에서 집이라는 한 목적지를 정하면, 너무 지루하고 시간도 오래 걸리니 힘들다는 겁니다. 그러니 1km정도마다 목표물을 하나씩 정합니다. 1km는 볼 수 있고, 1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빨리 도착할 수 있으니 지루하지 않겠죠? 그렇게 작은 목표점들에 도착하면, 그 다음 중간 목표를 정하고, 이렇게 몇 번 하다 보면 최종 목적지인 집에 도착하게 된다는 겁니다.
특별할 것도 없고, 비법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지만, 나름 괜찮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걸어야 하는 거리와 시간이 줄어드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느낌은 전혀 달라집니다. 어차피 같은 거리를 같은 시간 걸어야 할 바에야 덜 지루하게 걷는 게 나은 것 아니겠습니까?
집이라는 최종 목적지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만 생각하고 가다보면 너무 지루하고 답답합니다. 기대치는 저 멀리에 있고, 몸은 그곳에 미치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중간의 작은 목적지들을 정하고, 걸으면 무엇보다도 성취감을 빨리 얻을 수 있습니다. 10분마다 성취감을 얻을 수 있고, 남은 거리도 그만큼 희망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작은 목적지에 도달해서 성취감을 얻으면, 그것 자체가 큰 힘이 됩니다. ‘이 정도 걸었으니, 앞으로 남은 거리도 기꺼이 걸을 수 있다’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가장 어렵다는 시작점을 이미 지나왔으니, 앞으로 남은 거리도,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줍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이 땅은 죄가 가득한 곳이고, 영원한 곳이 아니기에, 영원히 살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기로 다짐하고, 그곳을 향해 갈 수 있는 하나님의 지도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은 아주 먼 곳에 있습니다. 세상 그 어떤 곳보다 멀리, 그래서 많은 시간과 노력이 곳입니다. 누가복음 17장 21절에서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만,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완성되거나 도달했다는 뜻은 아니라,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목표로 해야 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도착하는 것은 길고도 먼 과정입니다. 몇 십 년이라는 인생 모든 순간마다 쉼 없이 걸어야 하는 곳입니다. 그곳을 향한 길이 평탄한 것도 아닙니다. 마태복음 7장 13,14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는 말씀처럼, 좁고 험하고 더딘 길입니다.
그럼에도, 마가복음 10장 29,3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그만한 수고와 어려움을 들여서라도 향해 나아갈 만한 곳입니다. 아니 이만한 이익이 되는 투자와 방법도 없습니다.
이렇게 좋은 하나님의 나라고, 꼭 까야 하는데, 그 과정이 험하고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험하고 너무 긴 과정이라 마음이 쉬이 지칩니다. 험한 길을 걸어야 할 때마다 본향인 하나님의 나라가 너무 멀어 보입니다.
이렇게 멀어 보이고 지치기에, 때마다 필요한 게,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중간 목적지들, 그리고 그곳을 하나씩 헤쳐오고, 이겨왔다는 성취감입니다. 중간 목적지는 최종 목적지는 아니지만, 바른 방향으로 나아아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도구이기도 하고, 더불어 그 동안 하나씩 이겨냈던 과정들을 통해 앞으로 헤쳐야 할 장애마저 이길 수 있다는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지나온 작은 목적지들과 과정들을 볼 때마다, 좌우로 흔들리지 않고, 최종 목적지를 향해 곧바로 나아갈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줍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벤에셀이라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지도에서 벗어나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이들의 모습에 아예 포기도 하셨습니다. 때로는 이웃 민족들을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채찍질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무엘이라는 좋은 지도자가 이스라엘에 세워졌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미스바라는 곳에 모이게 하고, 그 동안 하나님을 등지거나, 하나님을 섬기되 우상을 함께 섬겨왔던 죄악을 철저히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가르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곳에 모이자,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라 생각했는지, 블레셋 민족이 다시 공격해 왔습니다. 당시는 이스라엘 민족이 블레셋 민족에게 억압을 당하던 시기라 두려움에 떨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오히려 블레셋 민족을 멀리까지 몰아냈을 뿐만 아니라, 그 동안 빼앗겼던 여러 지역까지 되찾게 됩니다.
이렇게 그 동안 자신들을 괴롭혔던 블레셋 민족을 물리치고 난 후, 사무엘은 돌을 하나 가져다 놓고,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뜻으로 ‘에벤에셀’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작은 돌은 아닐 것 같고, 요즘의 표지석 이상의 크기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왜 특별한 의미를 담아 에벤에셀이라는 돌을 세웠겠습니까? 단지, 몇 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억압했던 블레셋을 물리치고, 억압에서 벗어났다는 기쁨을 나타내기 위해서이겠습니까? 이것도 나름의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충분한 답은 못 되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승리한 전쟁은 수없이 많음에도, 그럴 때마다 표지석을 세운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이 블레셋 민족을 물리치고 특별히 에벤에셀이라는 돌을 놓은 까닭은, 이를 통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어떤 결과를 얻는지 알려주고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싸움 이후에도 이스라엘은 여러 민족과 계속 전쟁을 벌여야 합니다. 전쟁이라는 게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반드시 아픔과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이스라엘 민족도 전쟁을 겪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또 싸움이 격해질수록 지난날의 찬란했던 승리에 대한 기쁨도, 쓰라린 패배에 대한 기억도 점차 흐려지고 무뎌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흐르고, 기억들이 흐려진다 하더라도, 마음을 다잡고 새롭게 할 작은 목표와 기억이 필요합니다. 사무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에벤에셀이라는 돌을 놓아 기념하는 까닭도 바로 이것입니다. 에벤에셀이라는 돌 자체는 최종 목표가 아닙니다. 이 돌이 놓인 곳이 이들이 다다라야 하는 마지막 자리도 아닙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아픔과 어려움을 당하고, 하나님이 함께하심에 대한 기억이 흐려질 때, 하나님이 주신 목표들이 더 멀어지고 흐릿해질 때라도, 이 돌을 보면서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주어졌는지, 그리고 어긋나지 않고 이루어졌는지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것에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헛되거나 거짓 약속을 하신 적 없고, 약속하신 것을 어기지도 않으셨음을 에벤에셀이라는 돌을 통해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에벤에셀이라는 믿음의 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약속받았지만, 이미 그곳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아직은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하고, 이 과정들을 하나님나라를 향하도록 잘못된 것들을 고쳐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여정이 간단하고 짧으면 문제될 것 없습니다. 단 번의 승리로 끝나는 것이면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을 얻고, 이르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과정에서는 영적 전쟁을 끊임없이 벌여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사탄과 그 무리들과 이기거나 죽는 영적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사탄의 무리와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우리 스스로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와의 싸움조차 이기지 못 해서, 실패하고 패배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반드시 해내야겠다’고 다짐해도, 해내지 못 할 뿐만 아니라, 그 다짐 자체마저도 오래 가지 못 하는 경우들이 참 많습니다. ‘절대 하지 않겠다’고 결심해도, 어느새 정반대로 행하는 내 모습들을 보며, 한숨 쉬고, 낙망할 뿐만 아니라,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결심마저 기억 저편으로 넘기고 마는 경우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래서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는 사탄 무리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의 편에서 싸울 분이 필요합니다. 이 싸움이 승리로 끝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편에서 싸울 분은 사탄보다 강해야 하고, 변덕스럽지 않아서, 약속한 것들을 반드시 지키는 분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승리로 이끌어 주실 분, 약속한 것은 절대 변질시키지 않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게 에벤에셀에 새겨진 뜻입니다. ‘도움의 돌’을 통해 사무엘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가르침과 약속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돌을 어디에 놓고 있습니까? 그 돌이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기억하는 믿음의 돌입니까? 그 돌을 놓은 자리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자리에 놓였습니까? 만약 지금 죽을힘을 다해 놓은 돌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아무리 크고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욕심과 욕망만 새겨진 돌이라면, 사탄이 기뻐할 만한 기념비에 불과할 것입니다. 믿음의 자리에서 벗어난 돌이라면, 결국 조롱거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하며 놓은 에벤에셀을 지금 우리도 하나씩 놓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에 대한 확신을 조금씩 더 많이, 더 크게, 더 넓게 놓아갈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워지게 됩니다. 이 돌들 자체가 목표와 목적지는 아니지만, 아픔과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에벤에셀을 보면서, 하나님이 함께하심과 변치 아니하심과 이기게 하시는 능력이 우리의 마음을 다잡게 하며, 새롭게 할 것입니다. 말씀과 뜻에 따라 사는 자녀를 반드시 하나님이 도우시고, 지키시고, 이기게 하신다는 이 믿음의 돌이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와 복된 삶으로 이끌게 하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이런 영적 싸움에서 이기는 것을 습관으로 만들어 가다 보면, 우리 삶 전체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인정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삶의 여정이 하나님의 나라에 다다름으로 끝나도록, 매일 하나님의 도우심의 돌을 놓아감으로써, 모든 아픔과 어려움을 이기고, 매일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복과 은혜를 체험하고 승리하여, 하나님이 약속하심을 증거하는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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