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90526)바르게 믿고 행하십시오(삼상 6장 10-21절)

청명하늘 2019. 5. 26. 22:10

바르게 믿고 행하십시오

 

성경: 사무엘상 610-21(416)

찬송: 434(귀하신 친구 내게; 491), 446(주 음성 외에는; 500)

설교: 20190526.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한 달 전에 제가 잠깐 입원했습니다. 퇴원했지만 몸이 회복되지 않았는데, 며칠 후에 어머니가 또 갑자기 몸이 안 좋으셔서 한 주간 입원하셨습니다. 짧은 기간에 병원이라는 곳을 몇 번 오가게 되었고, 여러 가지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병원이야 좋아서 가는 곳이 아니죠? 너무 아프고 힘드니, 낫고, 회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갑니다. 오히려 평생 한 번 가지 않고 사는 게 더 좋은 곳입니다. 살면서 병원이라는 곳을 찾아가지 않을 만큼, 아프지 않고, 다치지 않을 수만 있으면, 이것만큼 좋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몇 십 년의 시간이라는 시간을 살다보면, 아픈 곳이 생기고, 다치는 일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나마 회복할 수 있고, 치료할 수 있는 정도로 아픈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것이 이 땅에서의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병원에 오가면서, 가장 많이 한 생각은, 과정과 진행이 너무 복잡하고, 느리고 답답하다는 것입니다.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가고, 입원해야 할 정도면, 통증이 심하고 힘들다는 뜻이죠? 바라기로는, 병원에 가는 즉시로 치료를 받거나, 약을 줘서 통증을 빨리 없애줬으면 좋겠습니다.

 

병원에 가는 목적이 몸이 낫고 회복되는 것이고, 병원은 또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곳이니, ‘척 하면 척해서 치료해 주면 좋을 것 같은데, 병원에 가보면 어떻든가요? 참기 힘들 만큼 답답하고 느리죠? 아프다고 하면 빨리 진통제를 줘서, 통증부터 줄여주면 좋을 것 같은데, 의사나 간호사들은 너무 태평해 보일 만큼 느립니다. ‘병원에는 위급한 환자들이 많기 때문에 그런가?’ 하는 생각도 들고, ‘저 사람들이 자기 몸 아픈 게 아니니 저렇게 느리게 처리하는가?’ 하는 생각에 야속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병원에 가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통증을 줄여주는 게 아니죠? 당장 목숨이 오가는 상황이 아니라면, 빨리 치료하는 것보다는 여러 검사를 실시합니다. 혈압과 맥박을 확인하고, 엑스레이(X-ray) 검사, CT, MRI 등의 검사를 실시하고,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복잡하고 이상한 검사까지 실시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 병원에서는 당장 환자의 통증을 줄여주거나, 치료하는 것보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복잡한 여러 검사를 먼저 실시할까요? 무엇보다도 병의 원인을 찾는 게 가장 먼저고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병원에 통증을 없애주는 약이 얼마나 다양하게 또 많이 있겠습니까? 모든 환자들이 바라는 대로 통증 자체만 없애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진통제를 주는 것만큼 쉽고 간단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환자에게 진통제를 먹이는 데에야 당장 몇 초만에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좋은 병원에서 이런 식으로 하지 않죠? 왜 그렇습니까? 환자의 통증을 없애거나, 줄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병의 원인을 찾는 게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환자가 바라는 대로, 당장 통증을 줄여줄 수는 있지만, 시간이 좀 지나 진통제의 효과가 떨어지면 다시 아프게 됩니다. 통증이 다시 시작되면, 다시 진통제를 투여할 수 있지만, 이런 과정이 계속되고 반복되다 보면, 병은 더 커지고, 나중엔 손쓸 수 없을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병원에서도 환자들이 당장 진통과 안정을 원한다는 사실도 잘 압니다. 그러나 환자의 바람대로 진통에만 힘쓰다 보면, 나중엔 환자의 생명까지 보장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니, 통증이 생기는 원인을 먼저 찾으려 애쓰는 것입니다. 통증을 없애주는 것보다, 원인을 찾는 게 훨씬 힘들고 어려워도, 길게 보면, 이런 과정이 환자의 생명을 구하고, 건강을 회복시켜 줄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이것이 필요합니다. 당장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해결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큰 아픔과 어려움을 당하지 않고 평안하게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없다면, 이 땅에서 더 갖고, 누리고, 잘 먹고사는 것보다, 큰 아픔과 어려움 없이 사는 것보다, 영적 질병과 고통의 원인을 밝혀 아는 게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질병과 고통의 원인을 알았으면, 이를 치료하고 회복하기 위해 고쳐 나아가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이후에 주어질 삶에서 평안과 기쁨 속에서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길어서 10절부터 택했습니다만, 6장 전체를 통해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6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전쟁에서 이기려 가져갔던 하나님의 언약궤마저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뻐하며 언약궤를 가져갔지만,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언약궤가 있는 곳마다 심한 종기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이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돌려주기로 하고, 여러 절차를 통해 보내는 것이 16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17절부터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언약궤가 돌아오는 내용인데,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약궤를 들여다보다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됩니다.

 

언약궤를 빼앗은 블레셋 사람들이 자신들이 섬기는 다곤 신전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다곤 신이 이스라엘의 하나님보다 강해서 전쟁에서 승리한 거라 여겼습니다. 전쟁에서 이겼으니, 자신들이 섬기는 다곤 신에게 감사하고, 전리품으로 얻은 언약궤를 다곤 신에게 바친다는 뜻으로 다곤 신전에 두었습니다.

 

다음 날 가보니, 다곤 신상이 엎어져 있습니다. 어느 종교나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섬기는 신상과 물건 등을 거룩하게 다룹니다. 우연하게 넘어질 가능성이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들도 이상하게 생각했겠지만, 다시 반듯하게, 더 단단하게 세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날 가보니, 이번에는 다곤 신상이 엎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신상의 머리와 팔이 부러져 있었습니다.

 

더 큰 재앙은 다음부터 계속됩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두는 곳마다 하나님이 심한 종기와 환난을 내리셨다는 것입니다. 이 재앙이 얼마나 무서운지, 이를 피하고 해결하려고, 언약궤를 이곳저곳으로 옮겨갑니다. 그러나 옮겨가는 곳마다 재앙이 계속되니, 이들로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습니다. 이 과정을 앞장 511절 뒷부분과 12절의 이는 온 성읍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 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한 종기로 치심을 당해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는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언약궤를 이곳저곳으로 옮기고, 옮기는 곳마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재앙을 겪으며 7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렇게 더 있다가는 모든 사람이 죽거나 심한 질병에 걸릴 것이 두려워서, 언약궤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보내기로 합니다. 단순한 물건 같으면, 본래 주인에게 보내주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궤는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하는 것이고, 블레셋 사람들은 이를 절실하게 겪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고민하다가, 나름의 방법을 생각해 냅니다.

 

새 수레를 만들고 그 위에 언약궤를 실어, 젖이 나는 어미 소 두 마리가 끌도록 하는 것입니다. 젖이 난다는 것은 새끼를 낳은 지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이고, 송아지에 대한 애착이 가장 강하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송아지를 떼어놓으면, 어미 소는 자기 새끼를 생각하며 울며 돌아설 것입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은, 그렇게 두 어미 소가 새끼를 향해 돌아서지 않고, 곧바로 이스라엘 땅으로 가면, 자신들이 계속 겪었던 재앙이 하나님이 내리신 거로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말이 안 되는 거죠? 자기 새끼에 대한 애착은 본능이죠? 새끼 낳은 지 얼마 안 된 어미 소가, 사람이 끄는 것도 아닌데, 새끼를 뒤에 두고, 앞으로 향해 곧바로 가겠습니까? 아주 이상한 한 마리가 있어 그렇게 할 확률도 없다시피 할 텐데, 게다가 두 마리가 모두 그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다곤 신상이 언약궤 앞에서 자빠지고, 목과 팔이 부러지는 것을 보았고, 또 엄청난 재앙을 받았음에도, 아직도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시험해서라도 모든 일들이 우연히, 혹은 다른 이유로 생겼다고 생각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이들의 시험에도 불구하고, 어미 소 두 마리는 뒤에 둔 새끼들에 대한 마음에 울어대면서도,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곧장 이스라엘의 벧세메스 지역으로 갔습니다.

 

여기에서 보이는 블레셋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어떻습니까? 좀 이상하죠? 신을 왜 믿습니까? 인간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면 블레셋 사람들이 어느 신을 믿어야 할까요? 평생 다곤 신만을 섬겨왔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어떤 신이신지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섬기던 다곤 신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자신들을 괴롭혔던 재앙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돌아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블레셋의 지도자들은, 본문 16절의 블레셋 다섯 방백이 이것을 보고 그 날에 에그론으로 돌아갔더라는 말씀처럼, 자기들의 지역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도 알고, 그 능력이 얼마나 크고 무서운지도 잘 아는데, 믿으려는 생각은 전혀 없고,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자리에서 더 멀어집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이 모습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죠? 여러 이유를 대며, 믿음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고, 능력을 확인시켜 주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여야 믿는 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2029절의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는 말씀처럼, 보이지 않아도 본 것처럼 믿고, 만져지지 않아도, 만진 것처럼 믿는 것이 구원을 약속받을 수 있는 참된 믿음입니다.

 

확인되어야만 믿겠다는 것은, 사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믿지 않겠다는 다른 말에 불과합니다. 본문에 기록된 블레셋 사람들이 이것을 우리에게 확실하게 증명해 줍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을 전능하신 신으로 믿지 않을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 다곤 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부인할 만한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럼에도 이들은 죽음의 길에서 벗어나 돌아서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13절부터는, 언약궤를 돌려받게 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들이 나옵니다. 언약궤가 벧세메스 지역으로 오게 되는데, 이곳 사람들이 언약궤를 싣고 온 소를 잡고, 수레를 부셔 감사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것까지는 괜찮았습니다. 문제는 19절에 기록된 것처럼, 이 사람들이 언약궤를 쳐다봤다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곳 사람들을 징벌하셨고,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오만이라는 수에 괄호가 있는데, 원어 성경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긴 하지만, 당시에 성읍에 사는 인구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무안의 인구가 8만여 명이니, ‘오만이라는 수는 성경을 옮겨 적은 사람이 실수고, 이때 죽은 사람의 수가 칠십 명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죽은 사람의 숫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왜 이들을 징계하시고 죽이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먼저는 이들이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본래 언약궤는 하나님이 정해 주신 자리에 간직해야 하고, 특별히 선택된 제사장만이 담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벧세메스 사람들은, 자기들의 호기심과 재미를 위해 언약궤 뚜껑을 열고 안을 들여다봤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것을 무시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잘못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블레셋에 빼앗겨 7달이 지났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음에도, 언약궤를 옮기거나, 자기 욕심대로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쟁에서 이기고자 하는 욕심에 전쟁터에 가지고 갔습니다. 이것 자체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인데, 그토록 중요한 언약궤를 빼앗겼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되찾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쟁에서 승리할 만큼 중요한 것이라 하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 정도로 중요한 것을 빼앗겼다면, 목숨을 걸고 찾아와야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7개월이 지날 때까지, 전쟁하지도 않고, 그저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보면, 이들은 애초에 언약궤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상징물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게 하는 도구로도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기들 어려우니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의지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상 섬기 듯했고, 언약궤를 마치 부적처럼 여기고 말았습니다.

 

이들의 모습은 신앙인들이 조심해야 것들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함께하심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그저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이용한다거나, 하나님이 금하신 방법으로 섬기려 하면, 하나님은 불신자처럼 취급하실 것입니다. 이를 통해 복과 은혜를 받는 게 아니라, 자기들 욕심을 위해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어기고, 말씀하신 것과는 멀리 떨어져 산 이스라엘에 더 무서운 징계와 재앙을 내리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바르게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하나님을 우리를 구원하시고,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으로 정말 믿는다면, 그 말씀과 계명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자기 욕심과 욕망을 위해 말씀을 왜곡해서도 안 되고, 양심에 따라 주시는 뜻을 알면서도, 모른 척 무시하며 지내서도 안 됩니다. 또 하나님이 알려주시면, 겸손하게 또 순수하게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생명과 구원의 길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복과 은혜를 받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바르게 깨닫고, 깨달은 말씀대로 따라 살아감으로써, 날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평안하게 살고, 날마다 소망과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아 나아가는 복된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