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
성경: 사무엘상 7장 1-11절(구 418쪽)
찬송: 254장(내 주의 보혈은; 통186), 538장(죄짐을 지고서; 통327)
설교: 20190602.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지난주에 올라온 뉴스들 중에, ‘살인미수로 끝난 40대 사랑’이라는 제목이 있었습니다. 사건은 작년에 있었고, 사고에 대한 재판이 이번에 있어서 뉴스로 올라온 것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40대의 한 남성이 주점을 운영하는 여성과 연인관계로 지내왔다고 합니다. 주점은 술을 마시는 곳이고, 취한 사람들이 절제하지 못 하는 경우들이 많죠? 주인으로서 그런 손님들이 좋을 리 없겠지만, 장사하기 위해서는 그런 것도 감수하면서 어울려야 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남성은 이에 대해 질투와 집착이 심해졌습니다. 주점 내부에 감시카메라를 달아서 몰래 확인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다가 사고가 있던 그 날도, 주점 내부를 보니, 자신의 연인인 주점 사장이 남자 손님과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보고 격분해서, 주점으로 가서 연인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폭행했습니다. 이것으로도 분이 안 풀리자,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사 주점으로 가서 연인에게 뿌리고 불을 붙였습니다. 그나마 불이 붙은 연인이 급하게 주방 싱크대로 가서 불을 꺼서, 목숨은 건졌지만 화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법원에서는 살인미수지만 징역 6년의 실형을 선고했습니다.
‘전남친 만남에 격분... 둔기로 동거녀 살해 30대남 징역 30년’이라는 제목의 뉴스도 있었습니다. 30살의 남성이 한 여성과 동거했습니다. 그런데 여성이 이전에 사귀던 남자친구를 만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분노를 참지 못 하고, 둔기로 때려 숨지게 한 것입니다.
이 남성은 강도상해죄로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아서 수형생활을 했습니다. 형집행이 끝나고 8개월만에 다시 이런 사고를 일으켰습니다. 같은 사고나 죄라 하더라도, 누가 어떤 이유로 죄를 지었느냐에 따라, 형량이 달라지죠? 보통 다른 전과가 없는 초범이라고 하면, 실수의 가능성을 두어서 형량이 비교적 가볍게 내려집니다.
하지만 이전의 전과가 있으면 실수가 아니라, 고의적이라 여겨서 형량이 훨씬 커지게 됩니다. 특히 같은 죄가 반복되면, 형량은 더 커지게 됩니다. 이 남성은 징역 7년형이라 하면, 범죄를 여러 차례 저질렀거나, 아니면 도둑질을 하는 과정에서 피해자의 목숨까지 위험하게 만들 만큼 무서운 죄를 저질렀을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람이 출소한 후 채 1년이 안 된 시점에 이런 죄를 저질렀으니, 무려 30년이라는 엄청난 형량을 선고받게 된 것입니다.
7년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이런 것에 대해 잘 알았겠죠? 이 사람은 범행한 후에, 유서를 작성했다고 합니다. 이미 비슷한 전과가 있는 상황에서, 살인죄까지 저질렀으니, 형량이 얼마나 클지 잘 아니, 스스로 죽음까지 각오했다는 것입니다.
이 두 사건 모두 질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만으로도 크게 처벌 받는데, 사람의 목숨까지 빼앗는 것은 엄청난 죄이고, 형량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압니다. 그럼에도 이런 형벌을 계산하지 못 할 만큼 질투는 무섭습니다. 특히 두 번째 사건에서는 더더욱, 자기 인생 중 몇 십 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하거나, 아니면 자기 목숨을 버리게 될 것을 알면서도 무서운 죄를 저지르게 할 만큼 질투는 크고 무섭습니다.
질투가 이처럼 무서운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랑하는 사이에서 질투를 없애면, 이런 사건과 범죄가 없겠죠? 하지만 사랑하는 사이에 질투가 없다면,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될까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무슨 일을 하든 상관하지 않고, 관심이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라고 하기 어렵죠? 진정한 사랑은, 함께하고 싶어 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나만의 사랑을 받아주길 바라고, 나만 사랑해 주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러면 신앙에서 질투는 어떨 것 같습니까? 하나님이 가지신 여러 속성, 성품들이 있죠? 하나님께는 질투와 시기라는 속성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성품들 중에서 사랑과 인자와 자비와 용서를 많이 강조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용서해 주시고 사랑도 많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사랑에는 반드시 ‘나만의’라는 질투심이 있으니, 은혜와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도 질투가 많으십니다. 은혜와 사랑이 크신 만큼 질투가 크십니다.
성경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많이 나옵니다만, 성경 속 가장 큰 주제는,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질투 이야기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들이, 그것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며 살아가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은혜와 복을 더하셨는지가 한 줄기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줄기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이를 기억하지 못 하고, 감사하지 못 하고, 배은망덕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질투와 분노가 어떻게 내리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사랑과 은혜를 받았음에도, 모두 잊고 배신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진노하시다 못해 지치시고 포기하신 적도 있습니다. 이것을 ‘종교암흑기’라고 하는데,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 기간이 두 번 있었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 약 400년가량이고, 다른 한 번은, 오늘 본문의 사건이 있기 전까지의 사사기 시대입니다.
사무엘상 3장 1절의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신과 배덕에 지치시다 못해 아예 포기하시고, 침묵하신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았으면, 그에 합당하게 응답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은혜와 사랑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두고, 먹고사는 것, 많이 갖고 누리는 것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준다고 하는 이방신들에게 마음을 빼앗기로 말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정조(貞操)를 잃고, 영적 간음을 행한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오직 사랑과 은혜와 자비만 있고, 사랑하는 백성들에 대한 질투가 전혀 없는 분이라면, 이런 백성들을 어떻게 대하실까요? 그냥 그대로 놔두실 뿐만 아니라, 그래도 여전히 복과 은혜만 베푸셔야 하겠죠? 백성들이 무슨 일을 하든지, 좋은 것들만 주셔야 합니다. 바라는 것들이 이루어지게 하시고, 건강하게 하시고, 이스라엘 민족이 다른 민족들보다 강하게 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상대를 사랑하고 마음을 주는 데도 질투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사랑하지 않는 까닭이겠죠?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죄와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린 백성들을 그대로 놔두시지 않습니다. 때로는 다른 민족을 통해 징벌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재앙으로 채찍질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래도 안 되면 고개를 돌리시고, 아무것으로도 누구에게도 말씀도 안 하시고, 마음을 거두시게 됩니다. 질투의 하나님이, 사랑을 받고도 배은망덕하는 백성들에게서 아예 마음을 거두시는 것입니다.
이 과정이 오늘 본문 앞까지의 내용입니다. 한없는 은혜와 사랑을 주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블레셋이라는 다른 민족을 통해 벌하셨습니다. 영안이 열려 있는 사람들 같았으면, 이럴 때 자신들의 잘못과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설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강퍅해졌는지, 재앙을 받자 엉뚱한 해결책을 내놓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전쟁터에 가져오지 않아서 진 것이니, 언약궤만 가져오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겁니다.
진단이 잘못되었으니 해결책도 잘못됩니다. 하나님이 블레셋 사람들을 보내신 까닭은, 이스라엘 백성들 곁에 언약궤를 가까이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일상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뒤로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가축과 농사가 잘되게 한다고 하는 우상들의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블레셋 민족이 강하거나, 이들이 잘 해서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블레셋 민족이 언약궤를 빼앗아 간 이후의 모습에서 잘 드러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섬기는 다곤 신상이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자빠지고, 목과 팔이 부러지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가 가는 곳마다 견딜 수 없는 재앙이 내려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더 이상 버티지 못 하고,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이스라엘 지역으로 돌려줍니다. 결국 언약궤는 기럇여라림이라는 지역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2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게 됩니다.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은 계속되는 블레셋의 지배 때문에 고통이 너무 컸습니다. 풍요와 안녕을 약속한 우상을 섬기면 잘될 거라는 유혹에 빠져, 하나님 대신에 우상을 섬겼는데, 고통만 더 커지자, 그제서야 그 동안 자신들을 향해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크고 귀한 것인지 깨닫습니다. 자기들의 힘으로 사는 것 아니고, 우상이 약속한 것들로 사는 게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산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합니다. 사무엘이 백성들을 향해 가장 먼저 던진 말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만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블레셋 사람들의 억압으로부터 건져주신다는 것입니다. 당장 큰 고통인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건져주신다면, 그 외의 모든 문제와 아픔도 당연히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사무엘이 백성들에게 두 가지 조건을 요구합니다. 먼저는 이방 신들을 제거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만 마음을 두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두 가지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섬기고, 그 외의 어떤 것에도 마음을 나누거나 빼앗기지 말라는 한 가지 가르침입니다. 백성들은 사무엘의 가르침에 따라, 그 동안 더불어 섬겼던 여러 우상들을 제거하고, 오직 하나님만 순결하게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사무엘은 미스바라는 지역으로 온 백성을 모았습니다. 그곳에서 그 동안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나뉘었던 죄들에 대해 회개하게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모여 회개의 제사와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블레셋 사람들이 공격해 왔습니다. 하지만, 마음을 모으고, 하나님만 섬기면, 블레셋 사람들의 억압에서 벗어나도록 하실 거라는 사무엘의 말처럼, 하나님께서는 큰 천둥소리로 블레셋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셔서 물리치게 하셨습니다. 큰 천둥소리로 전쟁의 승패가 갈렸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으로 이긴 게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겼음을 뜻합니다.
이 과정에서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도 엄청나십니다만, 그만큼 그 백성들에 대한 질투도 크십니다. 복과 구원의 길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죽음과 멸망의 길로 가는데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을 그대로 놔두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이가 실패와 죽음의 길로 가는데도, 자비라는 이름으로 방치한다면 그것은 사실 사랑하지 않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그만한 질투를 보이신 하나님은 지금 우리도 똑같이 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님을 희생시키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가장 큰 소원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만을 참 신으로 믿고,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 정도로 절실하고 특별하다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질투도 그만큼 크고 무섭겠죠? 우리가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과 우상을 향하면, 먼저는 하나님의 마음이 너무 아프실 것입니다. 복과 구원의 길이 있음에도 눈감고, 오히려 죄와 죽음의 길을 향해 가니 하나님으로서는 또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우상이 대단한 것처럼, 우상이 자기 삶을 책임지고 이끌어 줄 것으로 착각하고 마음과 정신을 빼앗겨 사는 자녀들을 향해 또 얼마나 질투하시겠습니까?
우리의 마음과 잘못된 길에서 돌리기 위해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하심에도, 여전히 마음을 돌리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랑과 능력과 기회를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떠난 뒤의 삶이 어떠한지는 본문 속 이스라엘 민족의 삶이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거창한 것이나, 특별한 것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면 됩니다. 잘못 살아온 길에서 철저히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함께 섬겼던 우상들을 모두 제거하고 회개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거나, 혹은 하나님만큼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우리의 삶 속에서 흔적도 없이 제거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상이나 우상과 같은 생각과 계산을 뒤로하는 정도가 아니라, 삶의 모든 과정에서 완전히 버리고 온전하게 하나님께로만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만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질투 때문에 겪게 되는 하나님의 재앙과 진노를 피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의 가르침에 따라, 우상을 섬기며 살아온 것을 회개하고, 모든 우상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자, 하나님이 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통과 억압에서 건져 주신 것처럼, 우리의 삶도 책임지시고, 고통과 절망에서 건져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복과 평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구원과 영생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능력을 가지신 유일하신 분이시고, 그렇게 약속하실 만한 분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질투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복만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질투하시고, 싫어하시는 모든 생각과 모습을 철저히 회개하고 버리고, 오직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순결하게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아감으로써, 전능하시고 사랑이 가득하신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 삶의 모든 과정에서 날마다 승리하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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