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것들에 소망을 두고
성경: 사무엘상 14장 35-48절(구 430쪽)
찬송: 400장(험한 시험 물; 통463), 490장(주여 지난밤; 통542)
설교: 20191027.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고사성어 중에 ‘수주대토’(守株待兎)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의 송나라에 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일구는 밭 한 가운데 그루터기가 있었습니다. 그루터기란 나무를 베고 남은 밑동을 뜻합니다. 그루터기까지 모두 없애면, 밭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고, 작물을 심기에도 훨씬 좋습니다만, 밑동을 남기지 않고 베는 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농부가 밭에서 일하는 중에, 갑자기 토끼 한 마리가 달려오더니, 그루터기에 머리를 강하게 부딪쳤습니다. 나무의 그루터기는 크고 단단하죠? 그에 비하면 토끼는 작고 또 약합니다. 그래서 토끼는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농부의 입장에서는 좋은 일인가요? 나쁜 일인가요? 토끼가 농작물에 피해를 주면 주었지, 유익을 줄 일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한 마리라도 더 잡는 게 농작물에 피해를 덜 주는 일일 것이고, 게다가 좋은 고기를 얻었습니다. 농부는, 토끼를 잡으려 준비하지도 않았고, 도구를 만드는 수고를 들이지도 않았습니다. 농부가 토끼를 거저 얻었다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농부는 그때부터 괭이와 낫을 놓고, 그루터기 옆에서 토끼만 기다렸습니다. 일은 몸을 힘들게 하고, 그에 대한 보상 역시 많은 시간이 지나야 합니다. 그런데 그루터기 옆에서 가만히 있는 것은 어려울 게 없죠? 그냥 가만히 앉아 있다가, 부딪혀 움직이지 못 하거나 죽은 토끼를 주워 가면 됩니다. 이 농부의 판단으로는, 밭에서 일하는 것은 힘만 많이 들 뿐, 손에 쥐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이에 반해, 그루터기에서 토끼를 기다리는 것은, 힘은 안 들면서도, 귀한 고기를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일은 하지 않고, 토끼가 와서 부딪히기만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행동이 어떤 것 같습니까? 지혜로운 것 같습니까? 어리석은 것 같습니까? 아주 어리석은 행동이죠? 이게 왜 어리석은 짓일까요? 토끼 한 마리를 잡는 게 시간도 훨씬 적게 들고, 또 농산물에 비해 더 큰 가치를 가집니다. 하지만, 토끼가 나무에 와서 부딪히고 죽는 것은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들과 산에서 사는 토끼를 몇 번 본 적 있습니다. 직접 보기 전까지는, 토끼가 보이면 달려가서 잡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또 돌을 던져서 잡는 것도 머릿속에 그려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토끼의 움직임을 보고나서는, 그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수풀 속에서도 상상 이상으로 빨리 움직였습니다.
이처럼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토끼가,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 그루터기에 와서 부딪히는 일이 얼마나 드물겠습니까? 토끼가 어디에 부딪혀 다치거나 죽어서 주운 적은 물론이고, 그런 경우를 경험해 본 적도 없고, 그런 일을 겪어 본 사람을 만나거나,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이런 경우를 경험한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경우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농부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지만, 그러나 그것이 다시 일어나고, 가만히 앉아서 토끼를 얻을 수 있는 일이란 없다시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농부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다시 손에 괭이와 호미를 들고, 논밭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것입니다. 비록 농사는 시간이 많이 걸리고 힘들긴 하지만,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면 거의 틀림없이 뭔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농부는,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을 기대하며 살았습니다. 단 한 번의 기회를 선물처럼 여기며 감사하는 것은 괜찮지만, 거기에 자기의 모든 것을 쏟아 붓을 만한 일로 기대하며, 사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울 왕의 생각과 판단이, 토끼가 와서 죽기만을 기다리는 농부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블레셋 민족과의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블레셋은 이스라엘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군사가 많고 힘이 셌습니다. 그나마 왕의 아들인 요나단이 군사 한 명을 데리고 적진에 뛰어들어 적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당연히 이길 거라 판단한 블레셋 민족은, 겁을 먹고 자기들끼리 서로 해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곳저곳으로 도망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를 보고 용기를 내서 싸우려 다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이면서도 이스라엘에 도움이 안 되는 일을 명령합니다. 더 정확하게는, 도움이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차라리 이스라엘에 없는 게 나을 만큼 어리석은 명령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적을 온전히 무찌르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상황에 따라 한 끼 정도는 굶을 수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 한두 끼니는 큰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논밭에서 종일 힘쓰며 일하는 사람에게 한 끼니는 다릅니다. 밥을 안 먹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그만큼 적게 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물며 무기를 들고 나가 싸우는 것은 그 정도가 비교가 안 됩니다. 먹지 못 하는 군인이 어떻게 무기를 들고 싸울 수 있고, 강한 적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백성들은 왕의 명령인지라 이를 어길 수 없었습니다. 음식을 먹고 힘을 얻었으면, 도망치는 적과 싸워 물리칠 수 있었음에도, 종일 먹지 못 해 힘이 없어서 도망치는 적을 쫓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울 왕의 명령이 빨리 끝나기만을 넋 놓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의 어리석은 이 명령을 듣지 못 한 채 적진에서 싸웠습니다. 싸움에 지쳐 있을 때, 마침 가까운 곳에 있는 꿀을 발견하고 찍어 먹고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때서야 자기 아버지가 내린 명령을 알게 됩니다.
사울 왕은 도망치는 적을 쫓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아무런 것도 보여주시지 않고, 응답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사울은 그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지 제비를 뽑아 확인했고, 자기 아들 요나단이 음식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해서, 맹세대로 요나단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나마 백성들이 요나단 때문에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는 것을 들어 말려서 요나단이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문 47, 48절에서 “사울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른 후에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곧 모압과 암몬 자손과 에돔과 소바의 왕들과 블레셋 사람들을 쳤는데 향하는 곳마다 이겼고 용감하게 아말렉 사람들을 치고 이스라엘을 그 약탈하는 자들의 손에서 건졌더라”는 말씀으로 사울의 업적과 생애를 평가해 놓으셨습니다. 혼란스럽고 약했던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었던 것을 감안해 보면, 크고 놀라운 일을 해낸 것입니다.
사울 왕이 이처럼 크고 놀라운 일을 해낸 것이 어떤 것 같습니까? 물론 결과만으로 보면, 사울의 업적이 대단해 보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제사장만이 드릴 수 있는 제사를 직접 드린 것 때문에 이미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의 자리에 새로운 왕을 세우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왜 사울이 전쟁에서 계속 이기도록 하셨겠습니까? 이 과정에서 사울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뀐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 까닭을 살펴보다, 오늘 본문 첫 절인 35절 “사울이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으니 이는 그가 여호와를 위하여 처음 쌓은 제단이었더라”는 말씀과, 다음 장인 15장에서 사울의 행동을 통해 그 뜻을 알 수 있었습니다. 농부가 딱 한 번 찾아온 기회를 지속되고 반복될 거라 기대하며 살았던 것처럼, 사울도 헛된 기대와 판단에에 빠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울이 몇 살에 왕이 되었는지 기록되지는 않았습니다만, 아들 요나단이 무기를 들고 전쟁터에 나가 싸웠던 것을 감안해 보면, 사울의 나이가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때까지 제단을 한 번도 쌓지 않았습니다. 요즘으로 바꿔 보면, 예배 처소를 마련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제사에 참여하긴 했지만, 그러나 자신이 앞장서서 예배 처소를 마련하지는 않았습니다. 오죽했으면 오늘 본문 35절에서 이것이 사울이 처음 쌓은 제단이었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사울이 나이가 많아서, 그것도 전쟁의 위기에서야 급하게 제단을 쌓았던 이 모습은, 아브라함의 모습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룹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 고향과 부모 곁을 떠나 전혀 낯선 곳으로 향했습니다. 이때까지는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을 가장 먼저 생각하고 실천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천 년 정도 흐른 후에 등장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규정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사울이 처음 제단을 쌓았다는 것은, 그만큼 사울은 신앙생활에 대한 고민이나 관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습니다. 사울의 관심사는 오직 눈에 보이고, 손으로 확인 가능한 것들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울이, 어려움에 처해 급한 마음에 처음으로 제단을 쌓았더니 일이 잘되었습니다. 큰 위기에 처했던 이스라엘이 블레셋 군대를 물리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사울은 강한 적들을 하나둘씩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안정시키게 되었습니다.
사울의 이 모습을 보시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우리도 사울처럼, 우리 욕심과 뜻대로 살다가, 고난과 어려움에 처할 때만 하나님을 찾고, 도우심을 구하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미신적인 제단을 받으시고, 사울로 하여금 계속 이기도록 하셨겠습니까?
사울의 이 모습에서, 그루터기에 앉아 토끼를 기다리는 어리석은 농부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평생 경험하기 어려울 만큼 희귀한 일을 겪었으면, 다시 그것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기다리는 게 아니라, 거기에 감사하면서도, 더불어 마땅히 있어야 하는 자기 자리로 돌아서야 합니다. 그렇지 못 하면, 한 번의 선물이 아니라, 그것이 헛된 소망과 잘못된 믿음만 심어주게 되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울이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님을 실망시키고,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까닭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사울이 위기에서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더니, 위기에서 벗어나고, 계속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나라가 안정되고, 번성합니다. 여기에서 사울이 가져야 할 생각은, 무슨 일을 어떻게 하든, 제단을 쌓고, 제사만 드리면 된다는 생각이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처럼 어리석고, 잘못된 신앙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용서해 주시고, 다시 기회를 주셨음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를 향해 돌아서야 합니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이 주신 한 번의 기회를 전혀 엉뚱하게 받아들입니다. 어떻게 살든, 무엇을 어떻게 하든 하나님은 관심이 없고, 좋은 제물만 드리면 하나님이 좋아하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다음 장에 나오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하나 남기지 말라고 말씀하셨음에도, 사울은 좋은 제물을 남겨두었습니다. 그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 좋아하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런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평소에는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 없이 살다가, 어려움과 고민 중에 예배를 드렸더니 일이 잘될 수 있습니다. 여러 어려움에 처해 있다가, 능력 있는 목사를 초청해서 안수 기도를 받았더니 일이 풀리고 잘되었습니다. 신앙생활하는 분들 중에, 이런 일을 경험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간증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이 기회를 사울처럼 어리석게, 자기 고집 위에 두고 해석하고 받아들이면, 결국 사울과 같은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체험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기회와 선물임을 잊어버리고, 사울처럼, 엉뚱하게 해석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삶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갈림길에서 여전히 자신의 뜻과 계획을 하나님의 뜻보다 위에 두고 살게 될 것이고, 그러면서 도저히 안 될 것 같은 상황에 처하면, 그때 다시 한 번 예배하고 기도하면 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사울처럼 여전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는 관심도 없고, 최소한의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채. 해결할 수 없는 곤란함에 처하면, 능력 있는 목사를 불러다 안수 기도 받으면 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 과정이 한 번 두 번 반복되다 보면,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었음에도, 하나님으로부터 오히려 버림받게 된 사울처럼,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가장 먼저 쳐내시는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 좋은 제물로 제사하고, 크고 좋은 제단을 쌓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기억하며,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상과 다르시기에, 단지 많은 재물을 드리고, 좋은 것만 드리면, 그 삶의 과정들을 모두 잊어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기도를 좋아하시지만, 이보다 우리 속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삶의 길대로 살아가는 것을 더 좋아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우리의 삶속에서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회를 주심에 감사하되, 이를 자기 고집과 어리석게 풀이해서 하염없이 토끼를 기다리는 어리석은 농부처럼, 하나님이 거부하시는 제사만 드리다 버림받은 사울처럼 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바르게 판단하고, 그 말씀에 순종해서, 매일 좋은 열매를 맺고, 한 번만 주어지는 기회와 복이 아니라, 영원하고도 가장 좋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은혜로 삶을 채워 나아가시는 복된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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