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191110)하나님께 맞추며 사십시오(삼상 15장 17-23절)

청명하늘 2019. 11. 10. 15:24

하나님께 맞추며 사십시오

 

성경: 사무엘상 1517-23(433)

찬송: 285(주의 말씀 받은 그날; 209), 341(십자가를 내가 지고; 367)

설교: 20191110.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3,40년 전에는 요즘처럼 통신이나 영상이 발달하지 못 했죠? 유선전화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는 컴퓨터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직접 보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했습니다. 시골에서 볼 수 있는 방송도 KBSMBC 두 개가 전부였습니다.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본다는 것도 어려움이 많아서, 재밌는 영화를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는 명절이었습니다. 명절에 맞춰 방송국에서는 지난 영화들을 방영해 주었습니다.

 

이때 방송국에서 가장 많이 방송했던 내용은 무술영화였고, 특히 중국 무술인 쿵푸를 기반으로 한 홍콩영화였습니다. 이런 영화에서는 칼이나 창 같은 무기를 들고 싸우기보다는, 대부분 맨몸을 이용해 싸우는 쿵푸가 가장 많이 나왔습니다.

 

쿵푸가 정확히 무엇인지, 또 어떤 계파가 있는지 잘 모르면서도, 자주 보다 보니 알게 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것은 자연의 흐름에 따라 만든 것이 있고, 동물의 모양을 본따서 만든 것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게 되었습니다. 또 술 취한 사람의 흔들거림을 이용해 만든 취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이런 것이 있는 무술인지는 잘 모르지만, 큰 재미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런 영화를 볼 때마다 든 생각이, ‘쿵푸가 세상에서 가장 센 무술이구나. 저렇게 강한 무술을 배우면 천하무적이 되겠구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만 제대로 배우면, 칼과 창을 가진 사람들도 물리칠 수 있고, 심지어는 술에 잔뜩 취해도 수십 명을 물리칠 수 있으니, 세상에 이것만큼 강하고 좋은 무술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저만 가진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실제 쿵푸를 배울 수 있는 곳이 없어서, 책을 보고 배우려 책을 산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도 감동을 받아서 당랑권 교본이라는 책을 사서 몇 번 몸을 꼬아보기도 하고, 스텝도 좀 밟아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중국 무술에 대한 비판과 비난이 커졌습니다. 격투기를 배운 중국의 한 젊은 사람이, 중국 무술이 모두 가짜라며 공개적으로 비난했습니다. 단순히 비난에만 그치지 않고, 중국 무술의 대가들과 직접 겨루었습니다. 중국 무술의 대가들은, 자신들이 속한 무술을 오랫동안 연마해서 가장 완벽하게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릴 적에,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있습니다만, 그런 경기를 본 경우가 없어서 궁금하긴 하죠? 잠깐 겨루기 영상을 보실까요?(영상1)

 

어떤가요? 너무 쉽게 끝나고 말죠? 중국처럼 긴 역사를 가진 나라가 별로 없죠? 또 땅 크기가 얼마나 큽니까? 또 거기에 사는 사람의 수도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그렇게 땅이 넓고 인구가 많으면, 그만큼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도 많을 것이고, 그런 사람들이 몇 천 년 동안 연구하고 개발한 무술이 있을 거라 기대되지 않습니까?

 

하지만 실전에서는 도저히 상대가 안 될 정도였습니다. 그나마 기본적인 장비를 갖추고, 또 심판이 있어서 그 정도이지, 만약 목숨 걸고 싸우는 자리였으면, 목숨을 보장 못 할 만큼 쉽고 간단하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물론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멋지고 강하게 보이는 게 당연합니다만, 그럼에도 중국무술이 영상에서 보듯, 차마 무술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지경까지 이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격투기 전문가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다른 무엇보다도, 점차 보여주는 것에 초점을 맞춰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강하고 멋지게 보여주는 것에 힘쓰면서, 무술의 본래 목적과 의미를 잃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술의 목적은 남에게 멋지게 보이고, 강하게 보이는 게 아닙니다. 때로는 이런 부분도 필요할 수는 있지만, 이것이 가장 큰 목적이 되면 안 됩니다. 자기 몸을 단련해서 강해지거나, 건강을 위해 하는 것이 큰 목적이 되어야 하지, 남에게 멋지고, 화려하게 보이는 게 목적이 되면 무술이 될 수 없고, 흔히 말하듯 그저 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또 좋아 보이는 것에 너무 빠지게 되면, 그것이 현실인지 상상인지 구분 못 하게 됩니다. 이 증상이 더 심해지면, 나중엔 말도 안 되는 것을 현실로 착각하고 빠지게 됩니다. 무술을 수십 년간 수련하면, 몸의 기를 맘대로 이용할 수 있고, 그래서 손도 안 대고도 상대를 무찌를 수 있다는 사람들의 모습을 잠깐 보실까요?(영상2)

 

어떻습니까? 실제 저게 가능할까?’ 하는 생각부터 들죠? 자기들끼리는 아주 진지하게 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수련하면, 몸에서 강한 힘이 나와서 무찌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저렇게 하겠죠? 하지만 저렇게 손도 안 대고도 순식간에 여러 명을 물리칠 수 있다는 사람이, 실제 격투기를 훈련한 사람과 대련하면 그 결과가 뻔하죠? 무너지고 간단히 실패하게 됩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여기에서 겉모양과 형식보다는 속과 내용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겉모양과 형식이 아무리 그럴듯하고, 멋져 보여도, 그 속에 제대로 된 내용이 없으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망가지고 실패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울이 실패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까닭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래 힘써야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겉에 힘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순종하는 게 가장 먼저임에도, 사울은 이것을 잊어버리고,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 드리면 된다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왕이 된 후 아말렉 민족과 전쟁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앞에 기록된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모은 군사 수는 겨우 3천 명이었습니다. 적군은 이보다 10배 이상이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요나단을 통해 기적 같은 승리를 안겨다 주셨습니다.

 

그런데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사울이 모은 군사 수는 무려 21만 명이었습니다.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는 것이고, 그만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강하게 만드셨고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이스라엘을 강하게 하시고, 복을 주신 까닭이 있습니다. “여건이 안 된다” “힘이 부족하다” “적이 너무 강해 도저히 싸울 수 없다등의 핑계대지 말고, 넉넉하게 이기게 할 테니, 이 싸움을 하나님을 대신해 벌하는 것으로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싸움에서 이스라엘이 이겼지만,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두 가지를 어기고 말았습니다. 적의 왕을 살려둔 것이고, 좋은 가축들을 살려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앞 3절에서 지금 가서 아멜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고 명령하셨음에도, 왕도 살려두었고, 좋은 짐승들도 남겨두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전쟁으로 삼으라 하셨음에도, 철저히 자기 자신과 욕심을 채우는 전쟁으로 만들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더 심각한 문제는, 사울은 자신이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입니다. 사울의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이전에도 제사를 멋대로 드린 것 때문에 왕위를 다른 사람에게 주시겠다고 책망하셨음에도, 이번에 또 다시 더 심각한 죄를 저질렀으니, 하나님께서 얼마나 실망하시고 분노하셨겠습니까? 이 소식을 들은 사무엘 선지자는 마음이 너무 아파서 밤을 지새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만든 장본인인 사울이 한 일은 너무나 뜻밖입니다. 다음 날 일찍이 승전비를 세우러 길을 떠났습니다. 사울의 머릿속에는 오직 자기 이름을 널리 내고 자랑하고자 하는 것만 가득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에 급히 찾아온 사무엘 선지자를 보자, 사울은 13절에서 대뜸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행했다는 뜻이고, 그러니 하나님의 복을 받고 싶다는 것입니다.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는 의사들이 치료하기 가장 힘든 사람들은 중병에 걸린 사람이 아니라, 어리석은 자기 확신에 찬 사람이라 합니다. 질병과 관련해 의사는 그 누구보다 훨씬 더 잘 아는 전문가입니다. 그럼에도 환자들 중에서는, 의사 앞에서마저도 아는 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병원에 왔으면서도, 오기 전부터 병이 무엇인지, 원인이 무엇인지, 치료법이 무엇인지 모두 결정하고 찾아옵니다. 이런 사람은 의사가 무엇을 말해도 듣지 않고, 자기 뜻대로만 합니다. 그러니 의사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처방법도 없고 치료법도 없다는 겁니다.

 

사울의 모습이 이런 환자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았음을 알고 인정했다면, 회개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애쓰면 됩니다. 하지만 사울은 자신은 말씀대로 모두 이루었고, 순종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 고집 속에 갇힌 환자정도가 아니라, 그것도 중병에 걸려 있으면서도, 건강하다고, 치료받을 필요 없다고 고집하다 곧 죽게 되는 환자처럼 보입니다.

 

사울이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는 동떨어져 살면서도, 모두 순종했다고 착각한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무엇보다도 사울의 기준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좋은 제물로 제사 드리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착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우리의 판단과 계산과 기준을 뒤로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의 기준으로는, 더 좋은 제물로, 더 많은 제사를 드리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여겼습니다. 이렇게 기준이 잘못되었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뒤로하면서도, 적의 왕을 살려두었고, 기름지고 살진 짐승들을 남겨두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은 것쯤은, 좋은 제물 몇 마리로 제사 드리는 것으로 해결될 거라 멋대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사만 잘 드리고, 좋은 제물만 드리면 좋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무속신앙에서는 신을 이런 식으로 섬기죠? 그 신이 누가 되었든지, 어려움과 아픔이 있을 때 해결책은 언제나 하나입니다. 좋은 제물로 큰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큰 제사를 드릴수록, 많은 제물을 드릴수록 그 신들은 좋아하고, 아픔과 어려움을 모두 해결해 준다고 약속합니다.

 

사울의 수준은 딱 이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무엇을 명령하시든지 귀담아 듣지 않아도, 제사만 드리면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살든 좋은 제물만 몇 번 드리면, 하나님은 거기에 넘어가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두 행했다고 착각했고, 그러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사장이 아닌 자기가 나서서 제사를 드린 것도 그렇고, 제사 드리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모습을 봐도 그렇고, 사울은 겉과 형식에 집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엔 신앙이 좀 미숙해서 그런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중에도 이런 모습을 보였으니, 사울은 평생 이런 어리석고도 미숙한 믿음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 22절의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좋은 제물보다는 말씀대로 사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순종하며 사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은 겉이 아니라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의 외모와 형식이 아니라, 우리의 속과 마음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게 우리의 것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의 것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 보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외모와 형식이 아니라, 속과 마음과 중심을 하나님께 맞추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속과 마음보다는, 겉과 형식에 힘쓰다 보면, 우리는 어느덧 하나님과 상관없는 일에 힘쓰는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겉은 언제나 우리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합니다. 우리의 입맛에 꼭 맞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에 집중하게 되면, 어느덧 하나님을 믿는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닌, 이상한 자리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예배하러 교회에 나아오는 것도 중요하고, 예물을 드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제사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더 좋아하시고, 좋은 제물보다는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을 좋아하시는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바라십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는, 예배를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그대로 따라 수고하며 애쓰는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많은 것을 드리는 것보다는, 우리의 마음과 삶을 드리는 것을 더 좋아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만,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을 강하게 만들어서, 눈에 보이는 육체의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그러나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에서는 완전히 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땅에서는 왕의 자리에서 잘 먹고, 누리며 살았지만,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멸망당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사울과 같은 길을 걷지 않으려면, 사울의 실패를 기억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며 살아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맞춰 살아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삶이, 영생을 향한 우리의 과정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울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고, 말씀대로 실천해서, 날마다 살아가는 순간마다 하나님만이 주시는 복과 은혜로 채워 나아가는 복된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