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기
성경: 사무엘상 17장 1-11절(구 435쪽)
찬송: 321장(날 대속하신 예수께; 통351), 350장(우리들이 싸울 것은; 통393)
설교: 20191208.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언젠가 다른 목회자들과 함께 1박 2일로 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말은 ‘수련회’인데, 실제는 관광이나 단합대회에 더 가깝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습니다. 관광지에 가서 하룻밤 묵고, 단풍으로 유명한 곳에 가서 몇 시간 등산하는 게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게는 그 이틀의 시간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너무 힘들었습니다. 여기에서 가장 먼 곳까지 좁고 불편한 차에서 앉아 오간 것도 그 까닭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일정이나 불편한 의자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저를 힘들게 했던 것은 가까운 자리에 앉아 함께 갔던 두 목사님들과의 대화 때문이었습니다.
가는 중에 식사하면서 갑자기 정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가장 많은 다툼을 만들어 내는 주제들 중 하나가 정치에 관한 것이죠? 정치적 판단은, 한 번 틀에 박히면, 무슨 일이 일어나고, 무슨 말을 들어도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그냥 상대하지 않는 게 가장 좋습니다.
이를 알기에, 목사님들과 함께했던 자리에서도 정치 이야기를 꺼낼 이유도 없고, 바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두 목사님이 이틀 동안 오가는 차 안에서, 또 함께 배정된 숙소에서까지 계속 정치와 전직 대통령에 말을 꺼냈습니다. 이분들이 전직 대통령들에 대한 평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이승만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박정희, 박근혜에 대한 것입니다.
이승만 씨에 대해서는, 독립을 위해 인생을 바치고, 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위인이라고 했습니다. 박정희는 우리나라 곳곳이 단풍에 물들 수 있도록 산림사업에 힘썼고, 고속도로 등 나라 발전을 이뤄냈다는 것입니다. 또 그의 딸 박근혜도 일을 잘 했는데, 국민들이 일부 사람들의 음모에 속아서 불법으로 탄핵되어 감옥에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어찌되었든 수련회에서 함께했던 분들이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계속 이야기해서 기분도 상하고, 마음을 무겁게 했습니다. 물론 정치적 신념과 판단은 개인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보는 시각이 모두 맞고, 그래서 저와 다른 목사님들의 판단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싫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힘들고, 한편으로는 어이없었던 것은, 그분들이 그와 같은 판단을 내리는 근거와 기준이 모두 유튜브 영상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연세가 많으신 분들은 모르실 수 있습니다만, ‘유튜브’는 인터넷을 통해 올리는 개인 방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 방송은 많은 장비와 인력이 있어야 합니다만, 유튜브를 이용하면, 간단한 준비를 통해 아무나 방송할 수 있습니다. 원한다면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나 설교를 방송하고 저장해서 원하는 사람이 볼 수 있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아무나 쉽게 만들 수 있으니,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거짓 뉴스’가 만들어지기 쉽고, 또 여기에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기준이나 규제가 없으니 훨씬 더 심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를 보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방송만 보고, 또 그것을 무조건 진실로 받아들입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고 검증하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기울이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눈에 어떤 안경(렌즈)을 쓰느냐에 따라 전혀 달리 본다는 점입니다. 사람마다 각자 자기 눈은 정상이고, 자기가 보는 게 맞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쓰고 있는 안경의 도수와 크기와 종류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연세가 많은 분들은 대부분, 멀리 있는 것은 잘 보이지만, 가까운 것이 안 보여서 돋보기를 쓰시죠? 다른 안경은 안 쓰고, 돋보기안경만 쓰신 분은, 돋보기가 사물을 정확하게 볼 수 있게 만든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돋보기는 멀리 있는 것은 잘 보이지만, 가까운 것은 제대로 볼 수 없는 분들에게만 꼭 맞는 것입니다.
저처럼 안경을 벗어도 가까운 것은 잘 보이지만, 멀리 있는 것은 제대로 볼 수 없는 사람에게는 돋보기안경이 아니라, 오목 렌즈 안경을 써야 합니다. 그래야 멀리 있는 것까지 뚜렷하게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제가 여러분이 쓰시는 돋보기안경을 쓰면, 저는 걸음을 내딛는 것도 어렵고, 글씨마저 읽기 어려울 만큼 어지러울 것입니다. 연세 많은 분들이 제가 쓰는 오목 안경을 쓰셔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어떤 종류의 안경을 쓰느냐에 따라, 같은 조건에서 같은 것을 보더라도, 전혀 달라진다는 것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을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믿음의 눈’으로 삶을 보고 행하며 사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재라서, 영적 세상을 생각하고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눈 위에 어떤 종류의 안경을 쓰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과 과정들이 전혀 달라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땅에 꼭 맞는 안경을 쓰고 살아갑니다. 이 안경은 지금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땅을 잘 보고, 뚜렷하게 보도록 만들어 줍니다. 정확히는 이 땅의 것들만 잘 보이고, 뚜렷하게 보도록 합니다. 대신에 이 땅 너머 멀리 있는 세상에 대해서는 더 흐릿하게 만듭니다. 더 심해지면 다음 세상을 완전히 지우게 만들어서, 이 땅만이 전부이고, 다음 세상, 영원한 세상은 없는 것처럼 안 보이게 하고, 잊고 살게 합니다.
그래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의 안경을 통해서만 잘 보입니다.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는 서로 끝에 있습니다. 가까운 세상을 바라보는 안경을 쓰면, 멀리 하나님 나라를 보기 어렵고, 멀리 볼 수 있는 안경을 쓰면, 가까운 세상이 눈에 안 들어옵니다.
또 이 두 가지를 모두 잘 보게 하는 안경은 없습니다. 가까운 것을 잘 보게 하는 안경을 쓰고, 멀리 있는 것을 잘 보이게 하는 안경을 겹쳐 쓰면, 가까이 있는 것도, 멀리 있는 것도 잘 보일 것 같은데, 사실은 가까운 것도 잘 안 보이고, 멀리 있는 것도 안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기 위해서는, 세상의 안경을 벗고, 새로운 안경을 써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믿음의 안경입니다.
이 땅에서 태어나, 주어진 시간만큼 살다 삶을 마치는 것에는 차이가 없지만, 그러나 어떤 안경을 쓰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과 너비와 깊이가 전혀 달라질 것입니다. 세상의 안경을 쓰고 살면, 세상에 맞는 사람이 될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두렵고 실패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쓰고 살면, 하나님 나라에 꼭 맞는 사람이 될 것이고, 하나님의 보호하심 덕분에, 세상이 주는 어려움과 아픔을 넉넉히 이기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오늘 본문에서 등장하는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이 실패하고 두려워하는 까닭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세상의 안경을 쓰고, 세상의 길대로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적인 블레셋이 공격해 왔고,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진 골리앗이라는 거인이 선봉에 섰습니다. ‘골리앗’이라는 이름이 거대하고 강한 힘을 대표할 만큼, 골리앗의 체구는 거대했고, 골리앗이 갖춘 조건이 대단했습니다. 큰 키는 물론이고, 입은 갑옷의 무게만 해도 50kg이 넘었습니다. 보통 사람은 입으면 발걸음을 떼기도 쉽지 않을 만한 무게이고, 또 거대한 무기를 가졌고, 옆에서 방패로 막는 사람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골리앗은 크고 강할 뿐만 아니라, 또한 빈틈이 없어 보입니다. 창과 칼로 뚫을 수 없는 갑옷을 온몸에 둘렀고, 다리에는 각반을 찼고, 방패만 들고 골리앗을 지키는 방패 전담 부하가 있으니 공격할 곳이 안 보입니다. 골리앗이 자존심 상하게 하는 온갖 말을 내뱉어도, 그 누구 하나 나서지 못 하고 모두 움츠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인 사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길 만한 방법이 전혀 안 보일 만큼 골리앗의 체구와 무기는 크고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말씀은, 이스라엘 모든 백성과 사울 왕이 골리앗을 보고 겁을 먹고 숨은 까닭은, 골리앗의 강함과 무서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사탄과 세상의 눈으로 보고 겁을 먹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울이 이스라엘 왕이 된 후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크게 이긴 적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13장에서, 당시 이스라엘에는 겨우 3,000명의 군사뿐이었으나, 블레셋은 전투용 마차만 해도 삼 만이고, 기마병이 육천 명, 또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보병으로 공격해 왔습니다. 모두가 싸울 용기조차 없을 때,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믿음으로 나아가 싸워서 결국 모두 무찔렀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후에 이스라엘도 강해져서 군사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아졌습니다. 15장에서 이미 21만 명의 군사를 가졌습니다. 3천 명으로, 수만 명의 블레셋을 이긴 적이 있고, 이제는 자기 군사가 이십 만 명이 넘는데도, 골리앗 한 사람 때문에 겁을 먹고 싸울 생각조차 못 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아무리 강해도, 한꺼번에 달려들면 이길 장수가 없습니다. 한 장수가 아무리 싸움을 잘 해도, 어떻게 수 천, 수 만 명을 상대해 이길 수 있겠습니까?
전쟁에서 골리앗 한 사람과, 수만 명의 군사 중에 한 쪽을 선택하라고 하면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생각할 필요도 없는 문제죠? 제가 지휘관이나 장군이라면, 이 정도가 아니라, 골리앗 한 사람과 일반 군사 열 명 중에서도, 열 명의 군사로 싸우기로 선택할 것입니다. 틀림없이 이길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지혜를 모으고, 같이 힘을 쏟으면 한 사람의 강함을 쉽게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훨씬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골리앗이라는 장수 하나 때문에 겁을 먹고 포기하고 있습니다. 싸울 만한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고, 골리앗의 거대함과 강함 때문이 아닙니다. 왕부터 백성들 모두가 믿음의 눈을 벗고 세상의 안경을 썼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로 왕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욕심과 판단대로 행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자,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니어도, 충분히 살만 할 거라 생각했던 사울의 판단은 틀렸습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지 못 하게 되자, 그 자리에 악령이 들어와 주인노릇 합니다. 믿음의 눈이 아니라, 세상과 악령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안경을 벗고, 세상에 맞는 안경으로 바라보니, 이미 이긴 적도 있고, 충분한 힘과 조건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골리앗의 거대함과 강함만 보입니다. 골리앗의 거대한 체구, 골리앗이 가진 크고 강한 무기, 칼과 창으로는 뚫을 수 없는 골리앗의 갑옷만 보입니다. 믿음의 안경을 벗었으니, 그 너머에서 함께하시고 지키시고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능력을 볼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구원과 영생을 향한 우리의 영적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과정 중에 있는 이 땅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눈에 어떤 안경을 쓰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같은 자리, 같은 것을 보더라도, 전혀 다른 판단을 내리고, 전혀 달리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안경을 벗고, 세상의 안경을 쓰면, 우리가 처한 불리한 조건과 상황만 보일 것입니다. 가난이 보이고, 여기저기 아픈 몸만 떠오를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불리한 상황 때문에 수고하고 애써도 안 된다며 먼저 포기하고 좌절하고 말 것입니다. 신앙생활 해봤자 달라진 게 없는 것 같고, 하나님 나라를 향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가치 없어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의 안경을 벗고, 믿음의 안경을 쓰고 바라보면, 이 땅에서 겪은 과정들과 고난이 그리 거대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 내가 갖고 누리는 것들이 대단해 보이지 않고, 내가 처한 상황과 어려움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거대하고 강하고 어려워 봤자’로 보일 것입니다.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시는 하나님이 내 편에 계시면, 골리앗의 덩치와 무기가 눈에 안 들어오는 것처럼, 이 땅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것들이 하찮아 보이고, 당연히 이길 만한 것들,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처한 상황과 어려움에 좌절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라도 소망을 갖기 위해서는, 세상을 향한 안경을 벗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안경으로 바꿔 써야 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고, 하나님 편에 서고 보면, 골리앗과 같은 어려움과 고통과 슬픔은 어차피 우리를 더 잘되게 하는 도구에 불과할 것입니다. 골리앗이 아무리 크고 강해도, 결국 다윗의 이름을 알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는 도구에 불과했던 것처럼, 지금 우리의 아픔과 어려움은 모두, 우리 삶을 잘되게 하고, 하나님 나라를 향한 과정에 쓰이는 불쏘시개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골리앗을 마주한 것 같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가난일 수도 있고, 질병일 수도 있고, 여러 복잡하고 얽힌 관계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지워지지 않는 상처와 아픈 기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의 안경을 쓰고, 이를 바라보면, 넉넉히 이길 만하게 보일 것입니다. 세상의 안경으로는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이 내 편에서 나를 위해 싸우심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 편에서 싸우시면, 아픔과 어려움이 아무리 커봤자, 다윗의 물맷돌에 한 방에 쓰러지는 골리앗처럼, 이기고도 남을 것이고, 결국 우리의 삶을 복되게 하는 도구로 쓰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믿음의 안경을 벗고, 하나님을 떠남으로써, 실패한 사울처럼 되지 말고, 믿음의 눈을 통해 그 너머에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언제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구원을 받고, 이 땅에서도 복을 받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전하는 귀한 통로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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