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와 아량의 영역을 더 넓히고
성경: 사무엘하 2장 12-17절(구 465쪽)
찬송: 410장(내 맘의 한 노래; 통468), 288장(예수를 나의 구주; 통204)
설교: 20200913.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작년에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못 했던 코로나19가 우리 삶을 크게 흔들고 있습니다. 당연하다 못해, 일상에서 여러 가지를 두고 습관적으로 불평과 원망을 내뱉었는데, 그게 얼마나 호강에 겨운 소리인지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공기가 좋다 나쁘다 말하고, 황사와 미세먼지 등으로 투덜거렸는데, 이제는 그 수준에서라도, 마스크를 벗고, 하고 싶은 일 하고, 가고 싶은 곳 가고, 먹고 싶은 것 먹는 일상생활이 간절한 바람이 되었습니다.
전염병 때문에, 전쟁 중에도 쉬지 않았던 예배마저 중단하거나 방법을 달리 해야 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정부와 행정기관은 더할 나위 없고, 어려움을 겪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교회는 교회 대로 하고 싶은 말, 원망 섞인 말들을 하지만, 최근 확진자가 급격하게 늘게 한 원인이 된 까닭에, 오히려 사회로부터 손가락질과 미움을 받을 뿐입니다.
그나마 전염병 가운데서 한 가지 위안거리라 한다면, 이 질병이 우리나라에만 퍼진 게 아니고, 전세계 곳곳에 퍼졌고,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는 비교적 잘 막고 있다는 점입니다. 전세계에서 가장 강하고, 잘산다는 미국의 확진자 수가 무려 600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미국의 인구가 우리나라의 6배 정도니, 비율로 따지면, 우리나라에 100만 명의 확진자가 생긴 것이고, 3만 명이 이 전염병으로 사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염병이 길어지자, 많은 사람들, 이 속에는 일부 목회자들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는데, 원망과 불평 섞인 말들을 많이 쏟아냅니다. 국내 확진자보다 해외 유입 확진자가 많았을 때 하던 주장으로서, 국내에 들어오는 모든 경로를 막자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리고 정부가 전염병을 이용해 국민을 통제하려는 목적으로 과장하고 있다면서, 스웨덴 방식으로 대처하자는 주장도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스웨덴은 좀 독특한 방식으로 대처했습니다. 다른 나라들 대부분 봉쇄 정책을 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들어오는 것도, 나가는 것도 막았습니다. 또 자국 내에서는,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지 못 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스웨덴만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스웨덴이 이 방식을 시도한 까닭은, 집단 면역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집단 면역’이란 어느 질병이 많은 사람에게 퍼지면, 그 중에 병을 버틸 만한 면역 기능이 생긴다는 이론입니다. 코로나19에 대한 백신도 없고, 치료제도 없는 상황에서, 이렇게 하면 대부분 사람에게 면역 기능이 생겨, 더 이상 이 전염병으로 고통을 당하지 않게 된다는 이론입니다. 꽤 좋은 주장으로 볼 수 있습니다. 뉴스에 의하면, 미국에서도 이 방법으로 바꿀지 고민한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두 의견 모두 일리가 있죠? 확진자가 해외에서 유입되면, 검사해서 찾아내도 격리하고, 치료하는 데 많은 비용과 노동력이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확진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후에 확진될 수 있고, 또 이들로 인해 전염될 수 있으니, 차라리 외국에서 들어오지도 못 하게 하고, 나가지도 못 하게 하면, 이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정부가 이 두 가지 방안을 거부한 까닭이 무엇일까요? 정부가 바보가 아니고, 듣는 귀가 없지도 않는데, 왜 이 두 가지 모두를 시행하지 않을까요? 이유가 분명합니다. 이 과정에서 희생자가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정부가, 해외에서 오는 사람들을 막지 않은 까닭은, 해외에서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이들의 90% 이상이 우리나라 국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전염병을 가지고 온다거나 혹은 전염 가능성 때문에 모든 입국을 막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치료할 만한 능력과 시설이 안 된 나라에서 큰 고통을 당할 수 있고, 사망할 수도 있습니다. 국내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해 정부가 자기 나라 국민을 버리고 희생하는 게 맞는 일입니까?
스웨덴처럼 집단면역이 생기도록 통제하지 말고, 일상생활을 하도록 하자는 의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몸이 약하거나 연세 많은 분들이 가장 먼저, 또 많이 피해를 입게 됩니다.
해외 유입을 막자거나, 집단면역 체제로 바꾸자 하는 사람들도 이를 잘 압니다. 그럼에도 이를 주장하는 까닭은, 고통과 희생을 남의 이야기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 자신의 가족, 자녀, 부모나 사랑하는 이들이 해외에서 고통을 당하고, 죽어가는 입장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피해가 없고, 내 가족에게 피해가 당연히 없을 거라 계산하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펼칩니다.
그러나 전염병이 사람을 가려서 걸리지 않습니다. 코로나19가 특정 사람만 선택해서 엄청난 고통과 후유증을 남기거나 죽게 만들지 않습니다. 해외에 있다가, 전염병에 걸려 치료 받지 못 하고, 우리나라에도 들어오지 못 하는 사람이 내 가족일 수 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일 수 있고, 내 이웃일 수 있습니다. 집단면역을 시행하다 전염되고, 큰 고통을 당하다 죽는 사람들 중에 내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해외 유입자를 막자는 주장이나, 집단면역을 실시하자는 주장은, “나만 아니면 된다”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못된 계산에서 나왔습니다. 자기와 자기 가족의 목숨만 귀한 줄 알고, 남의 아픔과 고통에 대해서는 귀를 막는 악한 생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좋을 때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며 좋아하다가, 죄를 범해 하나님께 꾸중과 벌을 받을 것 같자,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고 화살을 돌린 아담의 죄성이 지금 이 시대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자기 목숨, 자기들 목숨만 귀한 줄 알고, 남의 목숨을 귀한 줄 모르는 사악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 오늘 본문에서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이 전쟁 중에 사망하고, 그 동안 사울을 피해 있던 다윗이 자기가 속한 유다 지파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의 아들은 나머지 지파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둘로 나뉘고, 왕도 둘이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싸울 수밖에 없죠?
기선제압을 위해 잔인한 싸움을 만들어 냈습니다. 양쪽에서 열두 명씩 군인들을 보내서 싸우게 하는데, 일반적인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열두 명씩이니, 서로 한 명씩 맞붙는데, 서로 머리를 잡고, 칼로 서로의 옆구리를 찌르게 하는 싸움이었습니다. 피하거나 도망할 수 없게 해서 결국 거기에 참여한 모든 군인들이 죽게 만들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싸움을 만들었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군사들이 그렇게 죽으면 명예가 높아집니까? 그렇게 죽는 게 멋있습니까? 그렇게 잔인하게 죽으면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를 행한 이들이 생명 귀한 줄 모르는 원시 민족이거나, 이방 민족이라면, 그냥 욕하면 끝나지만,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긍심이 대단한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처럼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힘과 용맹함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은, 남의 목숨 가지고 장난치는 사악함 때문이었습니다.
이 싸움을 두 사람이 주도했습니다. 먼저는 북쪽의 아브넬이 제안했고, 남쪽의 요압이 이에 응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요즘으로 보면, 국방장관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싸움에서 죽은 24명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점을 보면, 특별하지도 않고, 권력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군대에 있으니, 위에서 명령하면 따를 수밖에 없었겠죠? 아브넬과 요압은 청년들의 목숨을 자기 힘과 용맹함을 과시하는 데 이용했습니다. 그것도 아무 의미 없는 일에 악용했습니다. 청년들의 목숨으로 장난친 일밖에 안 됩니다.
이들이 이렇게 아까운 생명으로 장난친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자기에게는 아무런 희생과 아픔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바꿔 생각해 보면, 만약 그 청년들 중에, 자기가 아끼는 사람이 있거나, 자기의 가족이 있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죽을힘을 다해 막으려 했겠죠?
이후에 나오는 요압의 모습에서 이게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남쪽 다윗 편의 국방장관이 요압이었습니다. 요압에게는 두 동생이 있었고, 오늘 본문 바로 뒤에 막내 아사헬이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사헬은 달리기를 아주 잘 했습니다. 같은 민족이지만 남북이 서로 싸우게 되었는데, 아사헬이 북쪽의 국방장관인 아브넬을 잡으려 쫓아갔습니다. 아브넬은 자기를 잡으러 오는 아사헬을 죽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통일이 되었을 때, 다윗 쪽의 국방장관인 요압에게 원한을 살 필요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계속 쫓는 아사헬에게 다른 곳으로 가라고 충고했습니다. 하지만 아사헬은 자기 발이 빠르다는 사실을 알고, 좀 더 달리면 아브넬을 잡아 공을 세울 수 있을 것 같아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브넬은 창으로 아사헬을 죽이게 됩니다. 아브넬로서는 충분히 배려했고, 그럼에도 아사헬이 포기하지 않아서 생긴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압이 자기 동생이 죽은 것을 보고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청년 24명이 죽는 일을 너무 쉽고 간단하게 생각할 정도였으면, 자기 동생 하나 죽는 것도 비슷하게 보는 게 정상이죠? 하지만 청년들이 의미 없이 죽는 일에 대해서는 눈 하나 깜짝 안 하던 요압이지만, 전투 중에 자기 동생을 죽인 아브넬에 대한 깊은 원한을 품게 됩니다.
어느 정도냐면, 다윗이 남북이 통일되도록 모든 조건을 만들어서, 북쪽 국방장관이 다윗에게 와서 조율하고, 곧 통일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요압이 다윗 왕도 무시하고, 속여 아브넬을 불러내서 살해합니다. 오늘 본문의 일이 있은 지 7년가량 지난 후의 일입니다.
아브넬은 요압의 동생을 속여 죽이지도 않았고, 비겁한 방법으로 죽이지도 않았습니다. 전쟁이라는 게 목숨을 걸고, 남을 죽여야 내가 사는 무자비한 일 아닙니까? 게다가 아브넬은 몇 번 충고하고, 죽이지 않으려 했음에도, 아사헬이 자기 다리 믿고 욕심을 부리다 죽었습니다. 원한을 가질 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요압은 이를 마음에 깊이 새기고, 결국 이 원한을 갚습니다.
이런 사람이 왜 자기에게 속한 열두 청년들은, 흔히 ‘개죽음’으로 표현되는 죽음으로 몰았습니까? 왜 모두 죽을 게 분명함에도 그렇게 서로 잔혹한 싸움을 명령했겠습니까? 한 가지 이유밖에 없습니다. 자기와 자기 가족의 생명은 그 무엇보다 귀하게 여기면서도, 다른 이들의 생명에 대해서는 하찮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기와, 자기 가족의 아픔에 대해서는 양보할 줄 모르면서도, 남의 아픔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관심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본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남의 아픔과 고통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이익과 욕심에 따라 삽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신앙인들만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신앙인들은 세상의 방식이 너무 잔인하고 잘못되었다고 비난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남의 아픔과 어려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자기 이익에 혈안이 되었다 하더라도, 신앙인만은 이런 수준, 이런 태도로 살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12절에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를 성경 전체 말씀 중에서 ‘황금률’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도 남에게 기대하는 대로, 남에게 행하며 사는 게 율법서와 예언서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에서도 가장 잘 드러납니다. 죄 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을 보내셨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자기 아들의 고통과 죽음보다 인간의 아픔을 더 크게 보시고, 더 안타까워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픔, 아들의 아픔을 먼저 생각하셨으면, 우리에게는 구원과 소망이 없습니다.
이 과정들을 보면, 본문에서 청년들의 목숨을 자기들의 힘을 자랑하는 데 이용한 권력자들은 전혀 신앙인답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수준에 이르지 못 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돌을 던지고 십자가에 매단 사람들, 당시 힘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이 꼭 이랬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현재 많은 기독교인들, 목회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나만 아니면 돼”라는, 지극히 이기적인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이 같은 방식은 하나님 앞에서 아량이 부족한 게 아니고, 아예 용서받을 수 없는 악행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방해하는 큰 죄악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답게 화해와 자비의 범위를, 나와 내 가족과, 내 사랑하는 이들에 제한하지 말고, 관심과 사랑의 영역을 더 넓히고, 이웃의 아픔과 고통마저 더 간절하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말씀대로 사는 길이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복을 받을 만한 길입니다.
내 욕심에 따라 살고, 사랑과 아량과 자비의 영역을 좁혀 사는 건 하나님의 은혜와 사역을 방해하는 어리석은 길입니다. 남의 아픔과 고통마저 아파하며, 함께할 줄 알아야만 하나님이 인정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자기중심에서 벗어나고, 이웃을 위해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날마다 덧입는 자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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