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200830)성령님의 마음으로(삼하 1장 17-27절)

청명하늘 2020. 8. 30. 13:56

성령님의 마음으로

 

성경: 사무엘하 117-27(463)

찬송: 387(멀리 멀리 갔더니; 440), 288(예수를 나의 구주; 204)

설교: 20200830.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최근 저는 다른 때에 비해 아주 바쁘게 보내고 있습니다. 시골에 있는 작은 교회 목사라 보통은 일이 많지 않습니다. 부임 초기라면, 새롭게 바꾸고 해야 할 일들로 바쁠 수는 있습니다. 저는 이런 경우에 해당하지도 않는데 매일같이 밖을 나가고 있습니다.

 

그 동안은 비교적 교회 내에 머무는 편이었습니다. 교회에만 있다가, 갑자기 밖을 자주 나가는 것을 보시고, ‘저 목사가 늦바람 났나?’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른 바람이든, 늦바람이든 바람나도 괜찮은 상황입니다만, 사실 바람나서 그런 건 아닙니다.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바쁜 까닭은 선거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출마한 건 아니고, 출마한 분을 돕고 있습니다.

 

전에는 아주 얌전하게, 또 주로 교회에서만 지내다가, 이번에 선거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본 다른 분들도 꽤 낯설어 합니다. 그러면서 몇 분으로부터, “다음에 정치할 계획이냐?” “다음에 임원이나 회장이 되려 준비하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를 위해 지금부터 함께하며 준비하느냐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럴만한 능력도 없고, 여건도 안 됩니다. 혹시 할 만한 여건이 된다 하더라도, 정치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습니다.

 

어느 모임이든, 책임자에 오르고 싶어 하는 마음이 명예욕이라 한다면, 저는 명예욕이 적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책임자와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고 싶은 명예욕이 적은 것보다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품을 만한 그릇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선거 운동을 함께하다 보니,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많은 이야기를 듣습니다. 좋은 생각을 가진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 기쁘고 또 힘이 생기죠? 여러 사람들의 좋은 이야기들을 많이 들으면, 마음도 좋고 행복해지죠?

 

하지만 현실에서 마주하게 된 사람들의 모습은 전혀 그렇지 못 합니다. 들려오는 이야기 역시, 보고 배울 만한 좋은 것보다는, 마음 상하게 하고, 받아들이기엔 터무니없을 만큼 황당하고 이상한 경우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많습니다. 오죽 했으면, 함께 다니는 분께 선거 운동 때문에 다니다 보니, 사람들의 밑바닥을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염치와 양심이 없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또 수용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정치는 기본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만을 선택한다면 경쟁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좋은 사람, 좋아하는 이들을 가까이하는 것은 물론, 나 자신과 관계가 나쁜 사람들에게도 다가가야 합니다. 아무리 싫은 사람을 만나더라도, 싫은 티를 내서도 안 되죠? 거짓 웃음으로라도 포장해야 합니다. 좋아하는 척, 반가운 척이라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게 잘 안 됩니다. 사람이 좋은 점만 가지는 경우도 없고, 반대로 나쁜 점만 있는 사람도 없죠?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도 역시 분명, 내가 보고 배울 만한 부분을 가지고 있을 터입니다. 사람을 골라 만날 수 없다면, 다른 이들의 좋은 면들을 찾고, 이것으로써 기억하면 됩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게 안 됩니다. 억지로 웃지도 못 하고, 싫어하는데도 좋아하는 척 하지도 못 합니다. 이것 때문에 저는 정치나,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일은 하기 어렵다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 입장이기에 이렇게 포장을 못 한다, 억지웃음을 못 한다 변명합니다만, 사실 이는 됨됨이가 작다는 뜻을 에둘러 말한 것에 불과합니다. 됨됨이가 크지 못 하니, 저의 짧은 생각으로 남을 재단합니다. 나의 그릇으로 담을 수 없으니, 상대가 지나치게 나쁘다고도 하고, 밑바닥이 훤히 보인다고 말할 뿐입니다. 받아들이고 함께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멋대로 판단할 뿐입니다.

 

됨됨이가 크고 대단한 이들이라고 해서, 언제나 좋은 사람들만을 만날 수는 없죠? 언제나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또 본인이 좋아할 만한 사람들만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정확하게 선을 긋고 통계를 낼 수는 없겠지만, 됨됨이의 수준으로 판단하면, 제가 만나는 사람들의 수준이나, 넉넉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 만나는 사람들이나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포장할 수 없다며 받아들이지 못 하는데, 됨됨이가 크고 대단한 사람들은 그런 이들까지 받아들입니다. 더 정확히는, 저처럼 됨됨이가 작은 사람이 내세우는 기준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까지 포용하고, 그러면서도 남이 가진 좋은 점들을 찾고 기억할 줄 압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오늘 본문에서 그릇의 크기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넓은 사람 다윗의 모습이 나옵니다. 다윗이 블레셋의 시글락이라는 지역으로 망명해 있는 동안에, 다윗을 그토록 미워하고, 또 죽이려 애썼던 사울 왕이 자기 세 아들과 함께 전쟁에서 죽게 됩니다. 이 소식을 이스라엘 쪽에 속해 싸운 아말렉 청년이 며칠 동안 쉬지 않고 달려와서 전해 주었습니다.

 

다윗은 이 군인의 죄 때문에 처형하고, 사울과 그 아들인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며 추모시를 지었습니다. 여기에서 다윗이 얼마나 큰 그릇인지, 얼마나 넓은 아량을 가진 사람인지 잘 드러납니다.

 

성경을 읽지 않은 이들도 다윗을 잘 알죠? 거인 골리앗과 싸움 때문에 가장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가장 좋은 왕으로 기억됩니다. 신앙인들에게는 예수님의 조상으로 기억되기도 하고,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과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윗이 죄가 없이 평생 정직하고, 깨끗하게 산 것은 아니죠? 순결함만으로 판단한다면, 이집트의 총리를 지낸 요셉이 훨씬 더 나은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도력의 관점에서도, 다윗보다 나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세는 자기 민족을 해방시킨 인물입니다. 백성들을 이끌고 홍해를 건넜고, 광야에서 40년을 함께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모세를 통해 얼마나 많은 이적이 나타났습니까? 손만 들면, 이집트 사람들에게만 10가지 재앙이 일어났습니다. 홍해가 갈라졌고, 바위를 치자 물이 나왔고, 모든 백성들이 배불리 먹을 만큼의 메추라기와 만나가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다윗을 통해 기적이 나타난 적은 없습니다. 아무리 넓게 인정한다 할지라도, 어린 소년으로서 거인 골리앗과 싸워 죽인 게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큰 업적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뒤에서는, 두 번이나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끊임없이 다윗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도 다윗을 사랑하시고,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족보로 보면, 예수님이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업적과 순결함만으로 판단할 때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을 만하지 못 함에도, 이처럼 위대한 신앙인으로 인정받고 복을 받는 까닭들 중 하나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처럼, 다른 사람이 가진 좋은 점들을 볼 줄 알고, 인정할 줄 알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서, 사울 왕이 전투 중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이때 다윗은 사울의 추격을 피해 도망 다니다 블레셋으로 망명해 시글락이라는 지역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사울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은 기뻐하거나, 이 소식을 전해 준 이를 칭찬하지 않고, 사울 왕을 죽였다고 거짓말한 군사에게 분노하며 처형을 명령합니다.

 

이 과정을 정치적인 행동으로 볼 여지도 있습니다. 다윗도 사람인 이상, 자신을 억울하게 괴롭히고 죽이려 한 사울이 좋을 리 없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죽인 것도 아니니, 하나님이 벌을 내리셨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보는 눈이 있으니, 일부로 안타까운 척하며, 소식을 전한 군사를 죽임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윗 자신의 그릇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려 계산한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게 보통 사람의 모습이고 한계죠? 사실 기회를 두 번이나 얻었음에도, 자신의 손으로 해치거나 죽이지 않는 것만 해도, 다윗이 칭찬받을 만합니다.

 

그런데 사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며, 사울을 죽였다 거짓을 꾸며 말한 군사를 죽인 다윗의 행동이 계산적이거나, 남을 의식해서 한 행동이 아님을 오늘 본문에서 확인됩니다.

 

다윗은 사울 왕과 그 아들 요나단이 함께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죽음을 슬퍼하는 시를 지었습니다. 다윗이 요나단의 죽음을 이 정도로 슬퍼하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다윗도 요나단에게 좋은 친구였지만, 요나단은 다윗에게 친구 이상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다윗을 위해 목숨 걸고 아버지를 설득하려 했고, 다윗이 피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넓게 보면, 왕의 자리를 다윗에게 양보했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위해 희생했으니, 다윗이 그 죽음을 슬퍼하고, 애도하는 게 당연하죠?

 

하지만 다윗은 사울의 죽음마저 진심으로 슬퍼하고, 그 죽음을 안타까워합니다. 요나단은 죽어서는 안 되지만, 반대로 사울은 죽어 마땅합니다. 아주 악하거나, 사이가 안 좋을 때 저주를 담아 하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이 죽으면 떡을 돌리고, 잔치를 벌이겠다.” 다른 사람의 입장은 다를지 모르지만, 최소한 다윗에게 사울은 죽어 마땅한 사람입니다. 죽으면 잔치를 벌여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기뻐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안타까워하고, 슬퍼합니다. 사울과 다윗의 관계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마치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이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사울을 대단한 용사로 높입니다. 사울이 좋은 결과를 얻어냈다고도 하고,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한 사람이었다고 노래합니다. 24절에서는 사람들에게 사울을 애도하며 울라고 합니다.

 

이 정도를 보면, 다윗이 사울의 죽음을 입술로만 슬퍼하거나, 속마음과는 달리 겉모양만 가식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의 죽음은 물론, 자신을 원수로 여기고 죽이려 혈안이 되어 쫓아다녔던 사울의 죽음마저 진심으로 슬퍼합니다. 그 마지막이 비참하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합니다.

 

다윗이 원수였던 사울의 죽음마저 안타까워하고 슬퍼하는 수준에 이른 까닭이 무엇일까요? 다른 무엇보다도 다윗의 마음과 아량이 대단히 크고 넓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라고 해서, 우리가 갖는 미움과 원망과 복수심이 없을 리 없습니다.

 

특히 사울에게 다윗은 생명의 은인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골리앗 앞에서 겁을 먹고 모두 숨어 있을 때,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르지 않았다면, 그 모든 화살이 왕에게 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울이 왕위를 계속 지키기 어려웠습니다. 사울이 악령에 휘둘렸을 때도, 다윗이 악기로 연주해 진정시켜 주지 않았더라면, 역시 왕위를 오랫동안 유지하지 못 했습니다. 누가 미친 사람을 왕으로 계속 모시고 섬기고 그 명령을 받으려 하겠습니까?

 

생명을 구해 주는 은혜를 베풀었음에도, 백성들이 다윗을 더 높이 칭찬한다는 이유 단 한 가지 때문에 사울은 다윗을 죽이러 다녔습니다. 다윗이 사울로부터 죽음의 위협을 계속 겪어야 했던 이유는 사울의 시기심과 질투심뿐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사울의 이런 나쁜 점만 보지 않았습니다. 그 너머에 있는 사울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왕이라는 점을 봤고, 사울이 가진 용맹함을 기억했고, 아들을 향한 사울의 사랑을 봤습니다.

 

다윗의 위대함이 이것입니다. 골리앗을 물리친 것보다, 사울이 행하는 악한 행동마저도 하나님의 눈으로 볼 줄 알고, 사울 안에 있는 보잘것없는 것마저 찾아볼 줄 아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넓은 안목으로 사울마저 품을 수 있는 까닭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성령의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성령의 열매로 말씀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 25, 26절에서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보면, 사울은 헛된 영광을 구하느라, 서로 노엽게 하고, 질투한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전혀 맺지 못 했니다. 이에 반해, 다윗은 성령으로 삶을 얻었음을 알아,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 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다윗을 향해 그토록 많은 복과 은혜를 베푸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1,000년 전에 산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전해 주신 말씀처럼, 성령님과 함께하며, 성령의 열매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삶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신을 향한 욕심을 줄여가며, 동시에 남을 향한 포용과 용서의 폭을 점차 넓혀 가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들을 좋아하는 것, 안 좋은 사람을 싫어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을 향한 소망을 안고 사는 우리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하루아침에 천사처럼 될 수는 없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아프고 답답한 일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일에 신앙들이 포함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따라 살 길은 사울의 삶이 아니라, 다윗의 삶입니다. 하나님이 복 주시는 길은 사울처럼, 헛된 욕망에 휩싸여, 서로 노엽게 하며, 서로 질투하는 게 아니라, 다윗처럼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사는 길입니다.

 

억울하고 답답하고, 이해할 수 없는 온갖 일들을 겪었음에도,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 살아가며, 용서와 화해와 자비를 베풂으로써,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사랑으로 복을 받은 다윗처럼, 우리의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고, 행하며 삶으로써,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받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