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200802)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따라 사십시오(삼상 30장 16-31절)

청명하늘 2020. 8. 2. 14:38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따라 사십시오

 

성경: 사무엘상 3016-31(460)

찬송: 288(예수를 나의 구주; 204), 211(값비싼 향유를 주께; 346)

설교: 20200726.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도심에서 아주 빠르게 성장한 몇 교회들이 이용한 전도법이 있습니다. 전도를 많이 한 사람들에게 아주 큰 상을 주면서, 전도를 많이 하도록 자극을 주고, 경쟁을 일으킵니다. 큰 상이라 하면, 상품권이나, 전자렌지, 김치냉장고, TV 등 가전제품 정도로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작은 교회들로서는 이 정도도 대단하고 어렵지만, 큰 교회에서 내거는 전도상은 이와는 비교가 안 됩니다. 수백 만 원 하는 해외여행을 보내기도 하고, 더 크게는 승용차로 시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상상이 안 되죠? 하지만 이렇게 해서 성장한 교회의 이야기를 들은 지가 벌써 20년이 넘었습니다.

 

이렇게 전도상을 크게 시상하면 경쟁적으로 전도하겠죠? 이렇게 열심히 전도하면, 수십 명, 혹은 수백 명의 교인들이 늘어날 수 있습니다. 몇 년만에 큰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또 전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장점이 있죠? 속되게 계산하면, 투자할 만한 가치가 충분합니다. 몇 주 혹은 몇 달 열심히 하면, 많게는 수천만 원짜리 자동차를 얻을 수 있으니, 들인 수고와 시간에 비해 보상이 꽤 괜찮습니다.

 

일부에서는 이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도 내기도 합니다만, 교회나 교인들이 내세우는 명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을 그 무엇보다 사랑하시죠? 천하보다 생명이 귀하다고 말씀하실 정도입니다. 이 때문에 전도상이 하늘에서 가장 크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귀한 생명을 구하는데, 나쁘지도 않고, 남을 해치는 일도 아니니, 경쟁심을 이용해도 이상하거나 잘못되지 않았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전도법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합니다. 물론, 교회에 왔다고 해서, 구원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교회에 와야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점도 분명합니다. 좋은 경품을 내걸고 경쟁적으로 전도하게 만들면, 거의 틀림없이 문제들이 생깁니다. 어찌되었든 사람을 많이 끌어들이기 위해, 말 그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가족과 친척과 지인들을 불러들이는 건 물론이고, 다른 교회에서 신앙생활 잘 하는 이들을 데려오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시간과 횟수에 따른 돈을 지불하고 데려오기도 합니다.

 

이처럼 큰 상품을 걸고 경쟁적으로 전도하도록 장려하는 교회와 목회자들이 내세우는 말씀은 마태복음 1112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입니다. 침노하는 사람이 빼앗는 천국이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침노하려 애써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하면, 전도상만이 아니라, 천국에서도 가장 큰 상을 받게 된다고 풀이합니다.

 

하지만 이 본문은 해석이 아주 어렵습니다. 여러분께는 설명드리기 어렵습니다만, 이 본문 하나만으로, 더 큰 상을 받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경쟁을 펼쳐야만 하고, 가장 좋은 결과를 거둔 사람이 천국에서도 가장 큰 상을 받고, 이 땅에서 성과가 좋지 않은 사람은 천국에서도 가장 작은 상을 받는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하고, 전도하도록 경쟁을 부추기는 방법의 또 다른 부작용과 문제는, 오늘 본문과 연결해서 드리고자 하는 말씀인데,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를 잘못 이해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이 직원 10명을 둔 공장의 사장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10명 중에 어떤 사람이 가장 마음에 들까요? 당연히 일을 잘 하는 사람이 가장 예쁘죠? 반대로 일을 못 하는 사람은 밉습니다. 일을 잘 하는 사원에게는 상여금을 더 주고 싶죠? 많은 이익을 남겨 주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일을 못 하는 사원에게는 상여금은커녕 주기로 약속한 봉급도 아깝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적게 주고 싶죠? 이익을 적게 남겨 주기 때문입니다. 또 더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다면, 큰 상을 걸고 경쟁시키는 방법을 이용하겠죠? 1등 한 직원에게 상여금이나 큰 상품을 약속하면, 직원들은 서로 경쟁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더 열심히 일할 것입니다.

 

하지만, 10명의 직원을 둔 사장이지만, 직원 모두가 자녀라면 어떨까요? 입장이 크게 달라지죠? 단순히 일을 잘 한다고 더 예뻐하고, 일을 못 한다고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월급이나 상여금을 주는 기준도 달라집니다. 일을 잘 하고, 못 하고, 이익을 많이 남기고, 못 남기는 것만을 기준으로 삼지는 않습니다. 부모의 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는 어떤 눈으로 보실까요? 사장의 눈으로 보실까요? 아니면 부모의 눈으로 보실까요? 하나님은 손익계산을 기준으로 우리를 보시겠습니까? 아니면 사랑과 자비의 잣대로 우리를 판단하시겠습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복은, 자녀를 경쟁시키고, 싸움시켜야만 줄 수 있을 만큼 작고, 적고, 하찮지 않습니다. 기업이나 교회가 자꾸 경쟁시키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함께하는 모든 사람에게 넘치게 줄 수 있을 만큼 상이 넉넉지 못 하기 때문이고, 직원들에게 많이 줄수록, 회사와 사장이 적게 가지기 때문입니다. 직원들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직원이 많이 가지면, 한 쪽의 다른 직원은 적게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도 가진 게 얼마 없고,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게 적다면, 자녀들을 죽도록 경쟁시켜야죠? 그래야 조금이라도 이익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의 크기만큼, 모든 자녀에게도 주실 수 있고, 그러면서도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이를 통해, 사업과 사랑의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사업에서는 경쟁이 좋은 방법이지만, 사랑에서는 자비와 아량이 더 중요합니다. 나의 이익만을 목적으로 삼는 사업에서는, 양보하면 내 몫이 적어지고, 손해가 되기에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랑에서는, 내 몫이 적어지고, 내가 손해를 입어도, 남이 잘되기를 바라기에, 양보와 자비가 아주 중요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 전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무섭고 차가운 주인처럼 여겼습니다. 일을 잘 하고, 많이 할수록 기뻐하시고, 더 큰 상을 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을 못 하고, 적게 할수록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벌을 내리신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은 차갑고 무섭고, 이익과 손해에 따라 반응을 달리하시는 분이 아니라, 아버지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아끼신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있는 자격은, 능력 있고, 일 잘 하고, 실적이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는 요한복음 112절 말씀처럼, 오직 믿음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일꾼이나 하인으로 보시지 않고, 아들딸로 보십니다. 계산에 따라 사랑과 미움을 달리하지 않으시고, 그냥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행동하고 대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바처럼, 이웃을 사랑하고, 관대하게 대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웃을 경쟁상대로만 보는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철저히 손익계산으로 판단하곤 합니다. 나와 함께하는 가족과 동역자로 보지 않고, 내가 밟고 넘어서야 할 대상으로만 여깁니다. 내가 더 많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는, 경쟁해야 하고, 침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에게 손해 끼치는 것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오늘 본문에서도 등장합니다.

 

다윗이 블레셋의 편에 서서 싸우려 나가 있는 중에, 아말렉 군대가 모든 재물과 가족을 가지고 갔습니다. 다윗은 이런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묻고 600명의 군사를 데리고 급히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군사들이 많이 지쳐 있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빨리 움직일 수 없는 부하 200명을 남겨두고, 400명만을 데리고 급히 쫓아가, 아말렉 군사들을 물리치고, 빼앗긴 가축과 재물과 가족까지 하나 빼놓지 않고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환호하며 뒤에 남아 짐을 지키던 200명이 있는 곳에 이르렀지만, 몇 사람 때문에 분위기가 험악해졌습니다. 자신들은 지친 몸을 쉬지도 못 하고 더 먼 길을 달려갔고, 목숨 걸고 싸웠으니, 노략한 물건들을 자기들만 갖겠다 합니다.

 

이 사람들의 주장이 어떻습니까? 모두가 똑같이 며칠을 제대로 쉬지 못 하고 달려왔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피곤하고 힘든 것은 똑같습니다. 이럴 때 선택할 수 있다면, 어느 쪽이 편할까요? 남아서 짐만 지키는 쪽일까요? 더 달려간 쪽일까요? 뒤에 쳐져서 짐을 지키는 쪽이 위험할까요? 앞으로 더 달려가 적군과 싸우는 편이 위험할까요? 고민할 필요 없을 만큼 답은 분명합니다. 둘 중 하나라면, 뒤에 남는 편이 나쁠 것 없고, 앞으로 나아가 싸우는 쪽이 좋을 바 하나 없습니다. 공로로 따져도 당연히 더 달려가 목숨 걸고 싸운 군사들이 몇 곱절 큽니다.

 

그런데 이런 군사들의 주장을 하나님은 어떻게 여기실까요? 22절에서 이들을 악한 자와 불량배들이라고 부르시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자들을 악하게 여기시고, 불량배처럼 미워하십니다.

 

반면에 다윗은 업적과 공로로만 따진다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지만, 자비와 화평을 크게 여깁니다. 다윗의 수고와 공로가 얼마나 컸는지, 되찾은 모든 것을 20절에서 이는 다윗의 전리품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단순히 수고와 공로의 크기로만 계산한다면, 다윗은 모든 가축과 재물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자기 혼자만 차지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나누자고 합니다. 다윗은 부하들을 경쟁시켜 더 많이 가지려 하지도 않았고, 공로와 업적에 따라 차별적으로 상을 주지도 않았습니다. 목숨 걸고, 더 나아가 싸운 군사들에게도 넉넉히 나누어 주었지만, 연약함 때문에 뒤로 처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 경쟁에 뒤처지는 사람들, 큰 도움이 안 되는 이들에게도 넉넉히 나누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악하고 불량한 자들처럼이 아니라, 다윗처럼 사랑과 자비를 베풀며 살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 앞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윗과 부하들이 포로로 잡혀간 가족을 되찾기 위해 급히 아말렉 군대가 간 곳으로 향하던 중에 쓰러져 있는 사람 하나를 발견합니다. 주인마저 버릴 만큼 병이 깊습니다. 이후로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 하고,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어서, 아무 쓸모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평온한 때라면, 쓰러져 있는 사람을 돕고, 음식 주는 일이 당연하죠? 하지만 다윗은 지금 일상적인 상황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가족을 살리기 위해, 절박하게 초를 다투며 쫓아가야 할 때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자기의 음식을 나누어 줄 뿐만이 아니라, 이 소년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려 줍니다. 음식과 시간을 하찮아 보이는 소년에게 베풉니다.

 

다윗이 사랑과 자비를 베풀자, 이 소년은 다윗에게 가장 중요한 정보를 알려 주었습니다. 아말렉 군대가 간 방향과 목적지입니다. 다윗이 이 소년의 이야기를 듣지 못 했으면, 3일 먼저 출발한 아말렉 군사들이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다윗이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자비와 사랑을 베풀었더니, 이것이 다윗과 가족을 살리는 길이 되었습니다.

 

자기가 더 많이 가지기 위해, 경쟁을 앞세우며 사는 이들, 탐욕스럽게 사는 이들과 다윗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악한 자들과 불량배들은 경쟁심으로 살았습니다. 남이 많이 가지면, 자신들이 적게 가질 수밖에 없다고 계산했습니다. 자신이 더 가지려 하면, 남이 가지지 못 하게 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들을 함께하는 사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동족으로 봤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으로 봤습니다. 이런 시선으로 바라보니, 목숨 걸고 나아가 싸운 군사들도 자기 사람으로 보이지만, 중도에 지쳐 포기한 군사들도 자기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다윗이 이처럼 넓은 아량으로 관대하게 대할 수 있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23다윗이 이르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넘기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 하리라는 말씀처럼,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음을 알고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탐욕과 경쟁으로 살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인정하는 신앙인은 넉넉한 마음과 양보로 삽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다윗처럼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악한 불량배처럼 살고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 하면서도, 내 욕심에 따라, 남의 소중한 것마저 빼앗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악한 자들로 보십니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수고하고 애썼다며, 내 주머니의 소중함만 알고, 남의 고통과 가난함과 어려움을 외면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불량배로 보십니다. 그러나 다윗처럼 경쟁하려 하지 않고, 욕심내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닮아 행하며 살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우리에게도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업적과 공로가 아니라, 그 안에 품고 있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사랑하시고 아끼시듯, 함께하는 교인들과 이웃을 사랑하고 아끼며 살아야 합니다. 내가 조금 덜 갖더라도,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향한 자비와 사랑의 마음을 품고, 다윗처럼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부르시고, 자녀답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공로와 업적보다, 우리 안에 자비와 사랑과 관대함이 있는지를 기준으로 말씀하십니다. 이 약속에 따라 살면, 하나님은 이를 반드시 기억하시고, 우리에게 복으로 돌아오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다윗과 함께한 군사들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우리의 욕심의 그릇을 줄이고, 모든 사람에게 자비와 은혜를 전함으로써, 다윗에게 더하신 하나님의 넓은 사랑과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사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