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200816)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삼상 31장 1-13절)

청명하늘 2020. 8. 16. 14:31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

 

성경: 사무엘상 311-13(461)

찬송: 317(내 주 예수 주신 은혜; 353), 310(아 하나님의 은혜로; 410)

설교: 20200816.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누군가가 사망해 장례를 치르면서, 장소와 시간 등을 알리죠? 과거엔 주로 직접 가서 전했겠죠? 여기서 조금 발달해서, 한때는 전화나 신문을 이용하는 방법도 많이 이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부고를 전하는 방법들이 훨씬 다양해지고 빨라졌습니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되어 있어서, 문자나 다른 서비스를 이용해 순식간에 널리 알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고를 전하는 모습을 보면, 간혹 특이한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부고에서 뭐가 가장 중요할까요? ‘누가? 어떤 사람이 사망했는지 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간혹 사망자의 이름으로 부고를 전하지 않고, 가족이나 자녀 등의 이름으로 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홍길동이라는 사람이 죽어 부고를 전한다면, 홍길동의 이름, 장례식장, 장례일정, 장지 등을 알려야죠? 그런데 이렇게 안 하고, 아들이나 자녀나 가족과의 관계로 알립니다. 아들 이름이 홍아무개면, ‘홍아무개의 아버지 별세등으로 알리는 것입니다. ‘OO의 장인’ ‘OO의 장모등으로 부고를 전합니다.

 

이처럼 사망한 사람의 이름 대신에, 아들딸이나 사위 등 가족의 이름으로 부고를 전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당사자가 아닌 가족의 이름으로 전하는 경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녀나 사위나 며느리가 대부분 대기업의 임원이거나, 고위관리직에 있는 사람이거나, 운동선수나 연예인 등으로 유명한 경우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단순히 누군가가 별세했음을 알리려는 목적보다는, 다른 의도가 있다는 뜻이죠? 가족의 이름으로 부고하면서 가족이 가진 직위와 직업 등을 통해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직위가 높고, 영향력이 크고 유명한 사람의 가족이 별세했으니, 많이 찾아오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를 보면서 속담처럼 떠오르는 말이 있습니다. ‘정승집 개 죽은 데는 가도 정승 죽은 덴 안 간다입니다. 같은 뜻인데, 약간 바꿔서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을 보기 어렵다고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실 정승집의 개는 아무것도 아니죠? 개가 벼슬을 하고, 권력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정승집의 개가 죽는 일 자체는 별것 아니지만, 그러나 정승이 가진 벼슬의 힘을 받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정승집 개가 죽은 것을 핑계 삼아서라도, 할 수 만 있으면 더 가까이하고, 잘 보이기 위해 애씁니다. 그래야 정승으로부터 도움과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승이 죽으면, 아무리 잘 보여도 더 이상 도움 받을 수 없습니다.

 

이를 통해 보면, 인간이 가진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밑바탕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면, 개의 죽음마저 슬퍼하는 척 합니다. 도움이 안 되면, 정승의 죽음마저 외면합니다. 아무리 큰 은혜와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앞으로 도움이 되지 못 할 것 같으면 모른 척합니다. 그래서 권력을 차지하고, 출세하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신앙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정승집의 개가 죽으면 문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그 동안 받은 은혜 자체를 기억하고, 감사하고, 더 이상 도움을 받지 못 한다 하더라도, 유족을 찾아가 위로를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이것이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사는 신앙인의 도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모든 권력이 끊긴 사람을 찾아가 은혜를 갚으려 애쓰는 사람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 화려하게 등장했던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세 아들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시작은 좋았지만, 점차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권력과 명예만을 위해 살다,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는 경우는 없죠? 사울도 그렇습니다. 자기 권력과 자리만을 위해, 하나님마저 버리며 권력을 붙잡고 왔는데, 그 마지막이 어떻습니까? 비참하기 짝이 없습니다.

 

웬만한 전쟁이라면 왕까지 나서지 않죠? 특히 적의 화살에 맞을 정도로, 적 가까이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왕이면서도 이 전쟁에 자기 세 아들과 뛰어 들어야 했습니다. 또 화살에 맞았지만, 도저히 피해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전투가 치열했고, 이스라엘이 절대적으로 밀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사울은 무엇을 생각하며 마지막을 맞이했겠습니까? 사울은 화살에 맞고도, 한참을 맨 정신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자기 부하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했지만, 그것마저 거부당해서 결국 스스로 칼 위에 엎드려 죽었습니다. 어디 활에 맞고, 칼에 쓰러지는 고통뿐이었겠습니까? 다윗을 죽이고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서라도, 반드시 붙잡고자 했던 왕의 자리가 얼마나 허무하게 끝날 수 있는지 뒤늦게 깨닫게 되었을 터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작은 것들에 집착하느라,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살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라를 강하게 만들고, 부자로 만들어 줄 것이라는 기대를 받고 왕에 오른 사울의 시대가, 전쟁터에서 허무하게가 끝을 맺고 맙니다. 웬만한 상황이었으면, 무엇보다도 왕의 시신이라도 챙기고, 장례를 치르겠지만,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배한지라 그럴 겨를이 없습니다. 그렇게 사울의 몸은 찢기고 잘리는 등 비참한 모습으로 밤새 놓여 있습니다. 다음 날 블레셋 군인들이 사울의 시신을 발견해, 갑옷을 벗겨 장난질하고, 시신을 성벽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이를 본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절망스러웠겠습니까? 좋은 왕이었든 그렇지 않든, 왕이 전쟁터에서 죽고, 시신이 적의 손에 농락당하는 것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몸부림쳤을 것입니다. 그 누구로부터도 도움을 받지 못 한다는 절망감이 가득했을 터입니다.

 

그렇게 절망스럽고 답답하고 슬픈 상황이 그려지는 중에, 갑자기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정말 멋지게 등장합니다. 사울이 죽어 비참한 모습으로 버려져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밤새 달려와서, 사울의 시체와 그 아들들의 시체까지 가지고 가서 화장한 후, 그 뼈를 나무 아래에 묻고, 7일 동안 금식했습니다.

 

길르앗 야베스 지역에서, 사울이 죽은 길보아 산까지의 거리가 약 21km정도 된다고 합니다. 이들이 달려온 시간대는 어두운 밤이었고, 게다가 당시 말이 워낙 귀했기에 대부분 걸어오느라 밤새 쉬지 못 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울의 시신을 찾으러 갔다가 적에게 발각되면, 본인들의 목숨도 위태로워집니다. 이럴 때 산 목숨부터 살아야지.”라고 말하죠? 세상을 이미 떠난 사람 때문에, 산 사람에게 피해와 아픔을 입히는 게 도움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죽은 목숨을 위해, 밤새 먼 길을 달려오고, 목숨을 걸고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이전에 사울로부터 은혜를 입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1장에 나오는 사건인데, 암몬이라는 민족이 길르앗 야베스 지역을 침략했습니다. 야베스 사람들이 나가서 화평조약을 맺으려 했으나 이것마저 거부당했습니다. 야베스 사람들은 멸망 직전에 처해 있습니다.

 

이 소식이 사울 왕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이때는 사울이 왕이 되었음에도, 왕위가 안정되지 못 했습니다. 여전히 불만 세력도 많고, 사울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때에, 수많은 군사를 이끌고, 먼 곳에 있는 길르앗 야베스까지 가서 도와주자는 명령을 내리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울은 여러 부담과 어려움을 물리치고,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구해 주었습니다. 이때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구하려, 사울과 군사들이 달려간 거리가 약 70km정도입니다. 안 쉬고 종일 달려도 이틀이 걸려야 닿을 수 있는 거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여전히 적군의 위험이 가득한 중에도 밤새 달려와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최선을 다해 장례를 치러 준 까닭이 이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사울이 군대를 급히 끌고 와서 구해준 때는, 정확한 시간을 알 수는 없지만, 거의 40년 전의 일입니다. 40년 전에 입은 은혜라면, 잊기 쉽죠? 보통은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기며 삽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 대부분도 기억 못 할 만큼 오래된 일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전쟁에서 패해 위험하다며 핑계하고 외면할 수도 있었습니다.

 

사울이 비록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악한 일을 많이 저지르긴 했지만, 사울로부터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뿐이겠습니까? 사무엘상 1447,48절에 사울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른 후에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곧 모압과 암몬 자손과 에돔과 소바의 왕들과 블레셋 사람들을 쳤는데 향하는 곳마다 이겼고, 용감하게 아말렉 사람들을 치고, 이스라엘을 그 약탈하는 자들의 손에서 건졌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사울이 위기에 처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구한 것만이 아니라, 이후에도 곳곳에서 위기에 처한 백성들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사울 가문의 권력이 기울어가고, 사울이 전쟁터에서 적의 손에 죽자, 그 누구도 사울 왕의 시신을 수습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죽은 길보아 산이 길르앗 야베스로부터 20km 떨어졌다면, 그보다 가까운 곳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가, 사울의 도움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터입니다. 그럼에도 그 누구도 사울의 마지막을 챙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으로부터 더 이상 얻을 게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길르앗 사람들만은, 한 시도 지체하지 않고, 밤새 적군들이 가득한 곳들을 지나쳐오고, 성벽에 매달려 있는 사울과 아들들의 시신을 내려 화장했습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로서는 끝까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면 신앙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쉽게 답할 수 있습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처럼 살아야 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익과 손해에 따라 시선을 달리합니다. 얻을 게 있고, 이익이 되면, 온갖 빌미로 연결시키고, 도움을 받으려 애씁니다. 그러나 더 이상 도움이 안 된다 판단하면 미련 없이 돌아섭니다. 오래된 관계마저 쉽게 끊고 피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은혜를 기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은혜를 돌에 새길 줄 알고, 원수를 물에 새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받을 줄만 알고, 이익이 안 되면 금세 돌아서는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사람들로 세상을 이어가시는 게 아닙니다. 야베스 같은 사람들, 은혜를 알고, 평생 감사하며 살면서, 은혜를 베푸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오늘 본문은 사무엘상의 마지막장입니다. 사무엘상은 사무엘 선지자의 출생으로 시작되어, 사울 왕이 전쟁터에서 죽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런데 만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아름답고도 자기 희생적인 이야기가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사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엄청난 기대를 안고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 세우시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다윗도 사울과 이스라엘을 위해 목숨 바치며 위해 앞장서 싸웠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하나님의 은혜, 다윗의 은혜, 백성들이 베푼 은혜까지 모두 잊고 배신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흘리는 사람이 되었고, 다윗이 혹시 자기 경쟁자가 될까 하는 시기심에 눈이 멀었습니다. 자기 권력을 위해 백성들에게 압박하며 괴롭혔습니다.

 

이처럼 큰 기대를 받고 화려하게 시작된 사울이 배신을 거듭하다 비참하게 마지막을 맞이하며 사무엘상이 끝나면, 얼마나 답답하고 마음이 무거워지는지 모릅니다. 아무런 희망과 기대마저 사라지고 맙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둡고 절망스러울 때, 수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단지 몇 명 때문에 뒤에 이어지는 사무엘하서를 희망차게 볼 수 있게 됩니다. 전쟁에서 엄청난 업적을 세웠기 때문이 아니라, 은혜를 잊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몇 사람 때문에 다시 새로운 소망으로 앞날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둡고 답답한 상황에서도, 밝고 멋진 앞날을 기대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대단한 사람들, 엄청난 업적으로 앞날을 세워 가시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있어야만 일이 해결되고, 소망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처럼 몇 사람으로 소망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자기 유불리에 따라 행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소망을 주시는 게 아니고, 은혜를 기억하며, 은혜에 감사하며, 기꺼이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소수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길르앗 야베스 지역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기를 원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어둡고 절망스런 세상에 밝은 빛으로 비추기를 바라십니다. 돈이 없어도,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처럼 살 수 있습니다. 권력이 없어도,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창하고, 엄청난 업적을 바라시는 게 아닙니다. 다만 지금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들에 충실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기적인 삶을 향해 가느라, 비겁하고, 옹졸하고, 어리석게 사는 게 아니라, 빛으로 살면서 담대하게, 결단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사람이 어둡고 답답한 세상을 밝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은 이런 자녀를 기뻐하시며, 은혜와 복으로 채우십니다. 이 길이 결국 승리하는 길이고, 성공하는 길입니다.

 

사울 왕처럼 너무 늦기 전에, 기회가 주어졌을 때, 삶의 방향을 되돌아보고, 잘못과 죄에서 멀어져야 합니다. 더불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처럼,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 이웃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간직하며, 이를 되갚을 만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를 통해 어둔 세상을 밝게 비추고, 이기심과 욕심으로 가득한 이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침으로써, 모두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은혜로 삶을 채워 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