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200927)하나님의 약속에 시선을 고정하고(삼하 3장 1-11절)

청명하늘 2020. 9. 27. 13:41

하나님의 약속에 시선을 고정하고

 

성경: 사무엘하 31-11(466)

찬송: 438(내 영혼이 은총; 495), 400(험한 시험 물; 463)

설교: 20200927.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요즘은 거의 매일 같이 차를 탑니다. 차에 익숙해진 까닭 때문인지, 차 성능이 좋아졌기 때문인지, 이것도 아니면, 저 개인에 한정된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예전에 비하면 멀미하는 경우가 많이 적어졌습니다. 예전엔 단체가 몇 시간 거리를 차로 이동하게 되면, 가장 먼저 멀미약을 준비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멀미약을 먹거나 붙여본 지 꽤 많은 시간이 흐를 만큼 멀미에 대한 염려도 적어졌고, 직접 경험하거나 본 경우도 적습니다.

 

그렇다고 멀미에 대한 염려마저 모두 사라진 건 아닙니다. 많이 타보지 않은 배나 기차를 타거나, 몸이 좀 안 좋은 상황에서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할 때는 꽤 긴장도 되고, 염려도 됩니다. ‘혹시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런데 약을 먹거나 붙이지 않고도, 멀미를 피할 수 있는 쉬운 방법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정면을 멀리 보는 것입니다. 버스를 탄다면, 가능하면 앞자리에 앉아 앞을 보되, 그것도 최대한 멀리 보는 방법입니다. 연세 많은 분들이 앞자리가 편하다시면서 앞자리에 앉으시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의자야 앞이나 뒤나 같습니다. 다만 연세 많은 분들은 앞자리에 앉아야만 멀미를 덜 하게 된다는 사실을 체험으로 알고, 앉습니다.

 

중간이나 뒷자리에 앉으면 앞 의자나 앞 사람의 뒤통수밖에 안 보입니다. 자연스레 창밖으로 지나치는 풍경을 보게 됩니다. 지나치는 풍경을 보면, 차가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실감됩니다. 간판의 글자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빠릅니다. 하지만 차 앞을 보면서, 그것도 시선을 멀리 두면 어떤가요? 차가 빨리 달리는지 체감이 안 됩니다. 먼 산이 한 순간에 지날 만큼 차가 빠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같은 차, 같은 성능을 가진 의자에 앉고, 같은 도로를 달리더라도, 어디에 시선을 두느냐에 따라 몸은 전혀 다르게 느낍니다. 순식간에 지나치는 옆을 바라보면, 차의 속도를 거세게 느껴 멀미하게 되고, 정면을 꾸준히 바라보며 바라보면, 속도를 훨씬 덜 느끼고, 멀미도 피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간은 멈추지 않고 지나갑니다. 이 땅에 태어나 산다는 게, 마치 인생이라는 도로를 달리는 차에 오른 승객과 같습니다. 어느 자리에 앉느냐에 따라, 심한 멀미로 몸서리치고, 고통스러운 여정이 될 수 있고, 반대로 순탄하고 안정된 여정이 될 수 있습니다. 어느 차를 타고, 어디를 향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느 곳에 시선을 고정하느냐 하는 문제도 더할 수 없이 중합니다. 시선을 어느 곳에 두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각기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온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다윗이고, 다른 사람은 이스보셋입니다. 둘은 걸어온 과정만 다른 게 아니고, 삶을 바라보는 자세와 기대마저 전혀 달랐습니다.

 

다윗은 정직하고 믿음에 따라 살았습니다만, 믿음에서마저 큰 위기를 겪었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고난의 시간을 살아갈 때, 이스보셋은 왕자로서 편하게 살았습니다. 이스보셋은 사울의 넷째 아들이었습니다. 당시는 장남이 다음 왕이 되는 게 일반적이었으니, 이스보셋으로서는 왕이 될 기대를 갖지 못 했겠지만, 왕자로서 다른 누구보다 편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으로 사울 왕이 세 아들과 함께 갑작스럽게 전사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의 계산과 판단으로라면, 이 변화로 다윗과 사울 가문의 상황이 전혀 바뀌어야 합니다. 그 동안 온갖 억울한 일을 겪었고, 그러면서도 끝까지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을 지켰던 다윗의 삶은 풀리고 잘되어야 합니다. 반면에 사울의 가문은 아예 망해 사라져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대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형편은 예전보다는 분명 나아졌지만, 우리가 당연히 여기는 정도의 수준은 아닙니다. 10년이 넘게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었으면, 이제는 나라 전체를 다스릴 왕으로 세워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이 다스리게 된 지역은 이스라엘 땅의 12분의 1밖에 안 되었습니다. 우리 기대치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이스보셋은 어떤가요? 자기 아버지 사울이 4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잘 다스렸으면, 이스보셋에게 기회가 주어져도 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울만큼 왕의 자리에 부족한 사람도 드뭅니다. 그럼에도 사울은 40년을 왕으로 지냈습니다. 그리고 전투에서 세 아들과 함께 죽었으니, 사울 가문이 완전히 망해야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이루어졌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의 가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넷째 아들인 이스보셋이 다음 왕으로 세워졌는데, 그것도 다윗보다 10배 이상의 땅을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을 볼 때, 누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말하고, 신실하게, 의롭게 살면 복과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을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보기에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 한 다윗이지만, 다윗은 점차 잘되는 과정 중에 있다는 것이고, 충분한 벌을 받지도 않고, 여전히 누리고 잘되는 것 같은 사울 가문은 점차 기울어져 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계산대로 한 순간에 잘되고, 한 순간에 망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그 기울어짐은, 하나님의 신실함만큼이나 변치 않고, 지속되었습니다. 다윗은 점차 나라의 영역을 넓히더니, 둘로 나뉜 나라를 하나로 만들어 왕이 되었습니다. 이에 반해 수고하지 않은 열매를 수확한 것처럼 보였던 이스보셋은 결국 철저히 망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이 2절부터 이어지고 있습니다.

 

2절부터 5절까지는 다윗이 여러 아내와 그로부터 나온 아들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남녀가 부부가 되도록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그럼에도 2절부터 다윗의 여러 아내들을 기록한 까닭은, 그만큼 다윗의 가문이 강해지고 잘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특히 세 아들과 함께 전쟁터에서 죽게 된 사울의 입장과는 대조됨으로써, 다윗이 그만큼 잘되고 성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에 반해 수고하지 않은 열매를 얻은 것처럼 보이는 이스보셋, 사울 가문의 마지막 불씨가 망해가는 과정이 6절부터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 아버지 사울과 세 형이 전쟁에서 죽자 이스보셋이 왕이 되었습니다. 이 내용이 앞장 28,9절에 사울의 군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이 이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데리고 마하나임으로 건너가 길르앗과 아술과 이스르엘과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씀처럼 이스보셋에게 아브넬은 건국 공신이자, 자기의 자리를 있게 만든 기반이기도 하고, 없어서는 안 되는 기둥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둘의 관계는 7년 반가량 지속되었는데, 한 가지 일 때문에 틀어지기 시작합니다. 이스보셋이 아브넬에게 당신이 어떻게 내 아버지의 첩을 범할 수 있습니까?”하고 비난했고, 이 일로 인해 이스보셋의 가장 확실한 기반이 무너지고, 결국 이스라엘 전체가 다윗의 통치 아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을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더 기다리게 하신 까닭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다윗에게 더 좋은 것으로 보상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다윗이 더 참고 기다리면, 온전한 이스라엘을 만들어 다윗에게 맡기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약 7년 반 가량 더 기다리는 시간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윗은 이스라엘 곳곳에 남아 있는 사울의 잔존 세력과 직접 싸워야 합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박정희의 독재, 전두환, 노태우의 군사 정권 이후 30년 가까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당시 독재와 군사정권의 잔재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죠? 심지어는 독립된 지 75년이 지났음에도, 35년의 일제강점기 시대의 잔재가 사회 곳곳에 남아 있다고도 말합니다. 그만큼 권력의 영향력은 강합니다.

 

이를 보면, 사울의 영향력은 어떻겠습니까? 사울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서 무려 40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당시는 왕이 곧 법이던 시대입니다. 이렇게 40년을 다스렸는데, 사울이 죽었다고 그 영향력과 잔존세력들이 완전히 사라졌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울과 어울렸던 사람들, 사울처럼 생각하는 사람들, 사울 밑에서 누리며 살았던 사람들은 이스라엘 전체에 독버섯처럼 이미 퍼져 있습니다.

 

이럴 때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린다고 해서, 사울 편에 있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새로운 사람들이 될 수 없고, 새로운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이미 사울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다윗이 이를 힘으로 바꾸고 고치려 하면 반드시 수많은 갈등과 다툼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7년 반이라는 시간을 두게 하시고, 이 시간 동안 이스보셋이 다스리는 나라를 안정되게 하셨고, 이후에 하나님의 때가 되어 결국 다윗이 다스리도록 만드셨습니다.

 

사울이 죽은 이후에도 여전히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다윗이 좌절하지 않을 수 있던 까닭을 한 마디로 정면을 향해 멀리 보았기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상황과 형편에 따라 금세 웃다가, 뜻대로 되지 않음에 금세 우는 사람이 되지 않은 까닭은, 다윗은 지금 처한 형편과 처지만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시선, 하나님이 결국 이루시고, 만드시고, 주실 거라는 약속 하나에만 시선을 고정하며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조금 좋아지면, 하나님이 내 편에 계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며 좋아하다가도, 내 뜻과 계획에서 조금만 어긋나도, 금세 안색을 어둡게 하고, 근심과 걱정에 휩싸이면서, 결국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힘든 게 바로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은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처럼, 믿는다고 군사들의 손에 넘겨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우리의 구원자로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옥에 갇히고, 온갖 고문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하지 않습니다. 조금 어려운 점이라고 해봤자, 요즘 전염병을 확산되는 데 일조한 사람들이라는 비난을 받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정말 어렵고 힘든 일은, 우리 속에 하나님의 약속을 정말 믿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일이 잘되고 성공하더라도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내 계획과 뜻보다 일이 더디는 것은 물론이고, 무너지고 실패한다 할지라도 믿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우리의 생각대로 잘 안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라는 게 변덕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일이 조금 잘되면, 꽤 괜찮은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 같다가도, 조금만 더디거나 내 계획과 예상에서 어긋나면, 믿음이 없는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시선을 우리 가까운 곳에 두고 살기 때문입니다. 내 주위 사람들이 목표가 되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돈이 기준이 되고, 많은 이들의 계획과 목표가 곧 나의 계획과 목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사람의 기준이 되고, 사람들이 품고 있는 것들이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새 우리 속에 하나님의 자리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가까운 곳에 시선을 고정하며 살면, 우리는 어느새 영적 멀미를 하게 될 것입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의 모습에 우리 영혼도 중심을 잡지 못 하고, 이리 저리로 흔들리게 될 것이고, 그러다 더 심해지면 넘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의 약속에 두면, 우리의 영혼은 안정을 찾게 됩니다. 우리 주위가 아무리 빨리 지나고, 아무리 많이 출렁거린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목표에서 바라보면, 사실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의 약속에 고정하고 보면, 지금 어렵고 힘든 게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우리의 마음과 뜻을 맞춰 놓고 보면, 지금 잠시 힘든 것도 복된 길을 향한 한 과정이고, 지금 잘 안 되고 실패하는 것도, 더 복되고 잘되는 과정 중 하나일 뿐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내리막길이냐, 오르막길을 걷고 있느냐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삶이 향하는 곳입니다. 복과 은혜와 영생을 향한 과정이라면, 지금의 고난이 우리를 실패로 끌고 가지 못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향한 과정이라면, 지금의 아픔이 우리를 멸망으로 이끌지 못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믿음과 소망의 길을 걸어가는 이에게는, 지금 당장의 고난도 잘되기 위한 과정이고, 지금 당장의 아픔마저도 위로와 은혜를 누리기 위한 한 과정일 뿐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다윗처럼 점차 좋아지는 것이고, 이를 기억하며 사는 것입니다. 정말 나쁜 것은, 사울 가문처럼 점차 기울어지는 것이고, 그러면서도 이를 돌이키지 못 하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에 따르면, 반드시 이리저리로 흔들리며 방황하게 되고, 실패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의 관점에서 보면, 좀 부족한 것 같고, 내 뜻대로 되지 않은 것 같은 것마저도 하나님의 은혜를 향한 과정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의 눈을 하나님의 약속에 고정하며 삽시다. 주위 형편과 사정에 우리 눈을 두고 살면,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 손에 쥐는 것에 따라 흔들리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약속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지 못 하게 됩니다.

 

다윗은 납득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고, 고난 뒤에도 충분하지 못 한 보상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향해 시선을 고정함으로써, 더 좋은 것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손에 있는 것과 지금 당장의 것들에 휘둘리지 말고, 하나님의 선한 인도하심을 믿고 살아감으로써, 좋은 것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누리며 살아 나아가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