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대로 사는 신앙인
성경: 사무엘하 3장 12-21절(구 467쪽)
찬송: 393장(오 신실하신 주; 통447), 311장(내 너를 위하여; 통185)
설교: 20201011.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사회법에서 규정하는 죄가 다양하죠? 또 죄를 저지르면, 법과 규정에 따라 처벌을 내립니다. 죄가 클수록 처벌이 크고, 죄가 작을수록 처벌도 작습니다. 그러면 사회법에서 규정하는 죄들 중에서 어떤 죄가 가장 큰가요? 사람을 죽이는 살인죄죠? 그래서 생명을 해치는 죄는 처벌의 수준이 가장 높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죽였다고 해서 처벌이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법에서는 단순히 결과만으로 처벌하지 않고, 죄를 저지른 상황이나 이유까지 함께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살인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똑같은 형벌을 내리지는 않습니다. 왜 죽였는지, 어떻게 죽였는지까지 판단해 형을 내립니다.
올해 두 여성이 각기 자기 자녀를 죽게 한 죄에 대해 처벌을 받았는데, 한 여성은 금고 1년에 집행유예 2년형을, 다른 여성은 징역 22년을 선고 받았습니다. 각기 자녀를 죽게 하는 죄를 저질렀음에도, 이처럼 큰 차이를 보이는 까닭은, 죽게 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함께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금고 1년에 집행유예 2년이라는, 생명을 죽게 한 죄에 비하면 가벼운 처벌을 받은 여성은 3주도 안 된 아기를 죽게 했습니다. 남편이 먼 곳으로 발령난 것에 마음이 안 좋아 몸을 가누지 못 할 만큼 술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아기에게 분유를 줬는데, 분유를 먹이면 반드시 트림을 시켜야 하죠? 하지만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아기 트림시키는 걸 잊고 말았습니다. 이 때문에 아기가 숨을 쉬지 못 해 사망했습니다. 이 여성이 아기를 죽게 했다는 것을 알지만, 실수로 여겼기 때문에 무거운 처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를 죽인 죄 때문에, 22년이라는 무거운 처벌을 받은 여성의 이야기는 많이 보도되었죠? 의붓어머니가 9살 된 아이를 여행용 가방에 가둬서 사망하게 했습니다. 여행용 가방이 비교적 크지만 사람을 넣거나 가두지는 않죠? 그런데 이 여성은 아이가 말을 안 듣는다며, 가방에 가두고, 또 본인과 다른 아이들까지 그 가방 위에 올라가게 했습니다. 아이가 숨을 쉬기 어렵다고 호소했음에도, 헤어 드라이기로 뜨거운 바람을 가방에 넣기도 하고, 숨쉬기 더 힘겹도록 가방 틈을 테이프로 막았습니다. 결국 아이가 죽게 되어, 법정에 서자 이 여성은 “죽을 줄 몰랐다”고 했습니다. 죽이려 한 게 아니고, 실수로 죽였으니, 처벌을 낮춰 달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법원에서는 이 여성에게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으로 22년이라는 무거운 형을 선고했습니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란, 반드시 죽이려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하면 죽을 가능성이 있음을 알면서도 행동함으로써 사망하게 만든 경우를 뜻합니다.
이 여성은 그렇게 해도 죽을 몰랐다고 하지만, 사실 말도 안 되죠? 작은 아이를 가방에 넣고, 숨을 못 쉬도록 테이프로 막고, 또 아이의 몇 배 몸무게인 자신과 아이들까지 그 위에 올라가 뛰는 게 아이를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죠? 법원은 그렇게 심하게 누르고, 숨을 못 쉬게 하면 죽을 줄 알면서도, 이 여성이 그렇게 하다 죽게 되었다며 선고했습니다.
이처럼 죄의 크기가 행위 자체만이 아니라, 그러한 행위를 한 까닭과 상황까지 고려한다는 건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회개 기도할 때 자주 이용하는 표현이 있죠?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자주 고백하는 표현이긴 하지만, 그러나 이 속에는 죄인 줄 알면서도 지은 죄, 혹은 계획적으로 죄를 짓는 경우가 표현되었습니다. 반대로 죄인 줄 모르거나, 혹은 죄를 지으려 계획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죄를 짓는 경우도 있음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떠한 죄도 용서해 주십니다. 마태복음 12장 31,32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는 말씀하십니다. 일부 목회자와 신앙인들은 이 말씀을 ‘성령 훼방죄’로 이해하고, 성령을 훼방하면 용서받지 못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또 그러면서 이 죄를 여러 가지로 적용해 해석하곤 합니다. 때로는 자신들이 하는 일을 방해하는 데 이를 적용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목사가 강단에서 전하는 말씀을 거부하는 데에 이를 적용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좋은 해석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죄는, 살인죄, 절도죄, 사기죄처럼, 죄의 한 종류를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지 못 하는 죄란 곧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으로 인정하지 않는 죄를 뜻합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이 땅에서도, 우리 몸이 죽은 이후에도 용서받지 못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 성경의 요한1서 5장 16,17절에서 “누구든지, 자기의 형제나 자매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가 아니면,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죽을 죄를 짓지 않은 그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죽을 죄가 있습니다. 이 죄를 두고 간구하라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불의한 것은 모두 죄입니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지 않는 죄도 있습니다.”고 말씀합니다.
죄에 대해서는 이렇게 정리하시면 좋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장차 세상을 심판하러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으로 믿으면, 용서받지 못 하는 죄는 없습니다. 우리 보기에 아무리 크고 무서운 죄로 보여도, 진심으로 믿고, 철저히 회개해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 다짐으로 기도하면, 모든 죄, 흉악한 죄마저 용서받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은 ‘알고 지은 죄도 모르고 지은 죄’도 모두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하신다고 해서 모든 죄를 같은 수준으로 보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저지르는 많은 죄에도, 크고 작은 죄로 나눌 수 있는데, 그 기준 중 하나가 바로 고의성 여부입니다.
사회법에서도 의도와 계획을 가진 경우에는 훨씬 무겁게 처벌하고, 의도와 계획이 없이 실수에 의한 경우엔 훨씬 가볍게 처벌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저지른 죄들 중에서 모르고 지은 죄보다, 알면서도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짓는 죄를 훨씬 더 심각하고 무겁게 여기십니다. 당연히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훨씬 더 크고 무섭습니다.
이는 오늘 본문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당시 7년 반가량 둘로 나뉘어 있던 이스라엘 땅이 다윗의 통치 아래에 하나가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울 왕이 죽자, 사울에게 쫓겨 다녔던 다윗이 다시 자기 고국 땅으로 돌아왔는데,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지 못 하고 유다 지파의 왕에 올랐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경상남도 정도로 작은 부분만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나머지 11지파를 사울의 아들이 다스리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아브넬이라는 국방장관이 절대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당연히 권력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는 왕보다 힘이 더 세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한 가지 일로 아브넬에게 책망했습니다. 국방장관이 감히 자기 아버지의 첩을 건드렸다는 겁니다. 국방장관으로서는 나라를 세우는 데 자신의 힘과 공로가 가장 큰데, 그런 일로 비난을 받자 참지 못 합니다. 그러면서 본문 앞 8절에서 “오늘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과 그의 형제와 그의 친구에게 은혜를 베풀어 당신을 다윗의 손에 내주지 아니하였거늘 당신이 오늘 이 여인에게 관한 허물을 내게 돌리는도다”고 쏟아냅니다. 아브넬의 권력이 얼마나 센지, 국방장관이 왕에게 이런 말을 하는데도, 왕은 결국 한 마디도 못 했습니다.
이 일로 아브넬은 다윗 밑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하고, 사전 작업을 펼칩니다. 먼저는, 다윗에게 부하 하나를 보내 “이 나라가 누구의 것입니까? 그러니 임금님이 저와 언약만 세우시면, 내가 임금님의 편이 되어서, 온 이스라엘이 임금님에게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12절)고 하고, 또 이스라엘의 원로들을 불러들여서 상황을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18절에서 “여호와께서 이미 다윗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종 다윗의 손으로 내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과 모든 대적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하셨음이니라”고 말합니다.
아브넬은 지금 다윗 밑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스보셋 아래에 있는 사람입니다. 아브넬은 다윗을 위해 일하는 게 아니고, 이스보셋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아브넬 때문에 다윗은 겨우 12분의 1을 다스리게 되었고, 이스보셋은 가만히 앉아 있었음에도 12분의 11을 다스리고 있다 말할 수 있습니다. 이랬던 아브넬은 이제 마음을 바꿔서, 그 동안 섬겼던 왕을 버리고, 다윗 밑으로 들어가겠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행동하고 있습니다.
이 전체 과정을 하나님의 역사라는 큰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때가 되어, 이스라엘 전체를 다윗 통치 아래로 두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아브넬이 보인 모습입니다. 아브넬의 선택과 행동이 과연 옳습니까? 정당성이 있습니까?
사울 왕이 죽은 후, 아브넬은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웠고, 그 밑에서 나라의 기반을 놓았습니다. 당연히 다윗과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이랬던 아브넬이 이제는 다윗을 왕으로 세우는 게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넬이 이처럼 전혀 새로운 관점을 가진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 동안 알지 못 했던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갑자기 계시를 받았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죠? 아브넬이 이스보셋 편에서 죽을힘을 다해 일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스보셋을 뒤로하고 다윗을 향한 까닭은 단 한 가지입니다. 이스보셋이 자신을 책망했기 때문입니다. 바꿔 보면, 왕이 자신을 향해 나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아브넬은 끝까지 이스보셋의 나라를 위해 일했을 것입니다.
이를 보면, 아브넬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약속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기의 권력과 지위만이 중요했습니다. 이 때문에, 자기가 큰소리치고, 자기가 인정받을 때는 이스보셋을 위해 일했고, 이제 이스보셋으로부터 싫은 소리 듣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원수처럼 미워했던 다윗을 위해 일하겠다고 다짐하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다윗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리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거슬러, 이스보셋을 고집스럽게 붙잡고 있었던 아브넬의 선택은 미필적 고의 같은 죄였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계획을 막으려는 적극적인 의도는 없었지만, 이스라엘을 다윗의 통치 아래로 만들어 가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이에 동조하기는커녕 오히려 반대편에 섰고, 적극적으로 일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알면 따라야 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인정하면 앞장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향을 알면, 그에 맞서려 하거나, 벗어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차라리 몰라서 잘못 행하는 건 실수라고 하고, 다시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 됩니다. 사람인 이상 실수한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어서, 하나님께서도 실수에 의한 죄는 죽을죄로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마음과 방향을 분명 알면서도, 거기에 동조하지 않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아예 반대로 열심히 행하면,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가만 두시지 않습니다. 아브넬의 마지막 모습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넬은 오늘 본문 바로 다음에서 요압에게 살해당합니다. 다윗 왕은 아브넬을 살려줄 뿐만 아니라, 나라를 통일시킨 데 큰 역할을 담당한 점을 높이 사고, 인정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동생을 죽인 것에 앙심을 품은 요압이 다윗 왕도 모르게 아브넬을 살해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기 욕심과 복수를 위해 아브넬을 죽인 요압도 잘못되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자기 욕망만을 위해 살아온 아브넬 역시 잘못되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에서 이를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연약한 존재인지라 부족하고 실수하고 죄를 저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분명하게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써도, 몸부림쳐도 죄성이 우리 안에 가득해서, 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음을 아십니다. 용서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말 싫어하시는 건, 하나님이 뜻인 줄 알면서도, 내 욕심과 내 계획 때문에 벗어나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미워하시는 건, 하나님이 뜻이 아닌 줄 알면서도, 내 계획과 뜻을 앞세우느라, 혹은 더 큰 이익을 위해, 행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모습은 모두 결국 우리를 실패와 패망으로 이끌 것입니다.
신앙인으로 산다는 건 하나님의 뜻에 맞춰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춘다는 것은 또한 내 계획과 내 욕심의 방향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오히려 하나님을 위해 내 계획과 욕심과 성공마저도 희생하는 삶을 뜻합니다. 아브넬처럼 알면서도, 자기 욕심을 위해 살다가, 또 다른 욕심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사람은 미워하십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을 위해 살다가, 또 다른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기 위해서는 아브넬 닮은 사람이 아니라, 다윗을 닮은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아브넬과 다윗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고, 나의 욕심과 유리함이나 불리함을 떠나,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어, 날마다 하나님이 베푸신 넘치는 복을 받고 살아나아가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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