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사람
성경: 사무엘하 4장 1-12절(구 469쪽)
찬송: 269장(그 참혹한 십자가에; 통211), 323장(부름 받아 나선; 통355)
설교: 20201025.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최근 우리나라의 문화가 참 많이 발전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20-30년 전만 해도 예상하지 못 했던 많은 성과를 이루고 있습니다. 작년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제들에서 가장 좋은 영화로 뽑히기도 하고, 최근엔 우리나라 가수가 미국 가요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이 외에도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해서 큰 인기를 끌고, 이제는 여러 나라에 돈을 받고 팔리는 TV 프로그램들도 있습니다. 완성된 프로그램이 팔리기도 하고, 프로그램 형식이 팔리기도 합니다.
외국에 수출되고 있는 프로그램 형식들 중 하나가 ‘복면가왕’이라는 노래 프로그램입니다. 가수들이 TV나 관객 앞에서 노래할 때는 잘 꾸며서 노래하죠? 그런데 이 프로그램에서는 가수들의 얼굴만이 아니라, 몸 전체를 이상하게 치장해 감춥니다.
가수란 노래하는 사람들이죠? 노래를 잘 하는 사람들이죠? 그런데 그 동안 TV 프로그램이나 쇼에서는 가수라는 이름으로 나오지만, 노래보다는 그 외의 것들로 관심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크고 잘 생긴 사람들, 예쁘고 늘씬한 젊은 여성들이 무리지어 노래해 인기를 끕니다. 유명하고, 인기가 많은 사람이면, 노래 실력과는 상관없이 큰 환호를 받습니다.
그러다 가수들의 노래 실력을 확인하고, 좋은 노래를 듣자는 의도로 만든 게 얼굴과 몸을 감추고 노래를 듣는 프로그램입니다. 이런 시도와 내용이 좋아서,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수출되었다고도 합니다.
이렇게 얼굴과 몸을 알아보지 못 하도록 하고 노래를 부르면, 관객들은 가수들의 노래 실력만을 가장 큰 기준으로 삼습니다. 얼굴과 몸을 가려 누구인지 알 수 없으니, 아무리 유명하고 인기가 많은 이라 하더라도, 노래를 못 부르면, 좋은 가수로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외모가 뛰어나지 못 하고, 큰 인기를 끌지 못 하는 가수라 하더라도, 노래 실력만 좋으면, 좋은 가수로 인정받게 됩니다.
이 프로그램처럼 얼굴과 몸을 감춰 누구인지 모르게 해서 평가하는 방법을 ‘블라인드 테스트’라고 합니다. ‘맹검법’이라고 풀이되는데, 눈을 가리고 평가한다는 뜻입니다. 눈을 가리면, 선입견을 갖지 않고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대상으로 시험한다면, 외모나 학력이나 지연, 혈연 등 다른 조건들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정말 필요한 기준들에 집중할 수 있고, 이러한 기준에 따라 바른 평가를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평가하실 때는 어떨 것 같습니까? 외적인 조건들을 먼저 보실까요? 아니면 내적인 기준들을 먼저 보시겠습니까? 우리가 가수들이고, 하나님이 가수의 실력을 평가하는 판정가시면, 외모와 유명세를 먼저 보시겠습니까? 아니면 ‘복면가왕’ 방식처럼, 오직 노래하는 실력 하나만으로 우리를 평가하시겠습니까?
사무엘상 16장에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시는 과정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사무엘 선지자가 베들레헴 지역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이새의 가정을 방문해서, 8명의 형제를 하나씩 나아오게 했습니다.
이새의 첫째 아들은 엘리압이었는데, 외모가 준수했고, 키가 컸습니다. 사무엘의 마음에 꼭 맞았습니다. 사무엘 선지자의 기준으로는, 엘리압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하나님의 기름부어 세우시려는 사람이다’고 작정하고, 기름부으려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은 외모와 다른 조건을 안 보신다는 뜻입니다. 외모와 조건을 보고, 이에 따라 휘둘리는 평가가 아니라, 꼭 필요한 기준만으로 판단하는 블라인드 테스트, 맹검법으로 평가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도 눈을 감아야만, 조건과 외모에 휘둘리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눈을 감고 평가하신다는 뜻은, 하나님은 우리의 겉치장에 속지 않으신다는 뜻이기도 하고, 꼭 필요한 조건만 보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평가하시는 기준이 뭘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점에 눈을 감으시고, 어떤 면에 대해서는 눈을 더 크게 뜨시겠습니까?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겠지만, 오늘 본문과 연결해 보면, 하나님이 눈감으시는 기준은 우리가 가진 이름과 세상에서의 지위입니다. 하나님이 더 크게 보시는 기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책임과 사명을 다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풀이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얼마나 유명한지, 유능한지, 얼마나 많이 가졌고, 얼마나 높은 지위와 권력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철저히 눈감으십니다. 반대로, 우리가 맡은 책임과 사명에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에 대해서는 불꽃같은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바꿔 생각하면, 우리가 세상에서 큰 인기와 인정을 받고 살지만, 사명을 저버린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낙제점을 받는 사람이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유하게 살고, 대단한 권력을 가졌지만, 그 누구에게도 유익을 주지 못 하면 수준미달자로 평가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만큼 무명이고,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만큼 무능하지만,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신실하게 사는 자녀를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십니다. 이 땅에서는 가난하고, 내세울 것 하나 없이 살지만, 이웃에게 유익을 주며 사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높이 평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7년 넘게 남북으로 갈렸던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되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북쪽의 국방장관이었던 아브넬이 남쪽 왕인 다윗에게 귀순하기로 했지만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사건이 이어집니다.
그 동안 북쪽의 실세였던 아브넬이 살해되자, 나라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왕도 자신이 어떻게 될지 몰라 당황하고, 다른 사람들도 자기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두 부류 사람들의 행적이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는 바아나와 레갑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여성입니다.
바아나와 레갑은 이스보셋의 부하였고, 군대 지휘관이었습니다. 그 동안 북쪽 왕인 이스보셋 밑에서 많이 활동했고, 당연히 그에 대한 보상을 받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북쪽이 다윗 아래로 들어갈 형편이 되자 전혀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그 동안 섬기며, 그 밑에서 많은 것들을 받아 누려왔던 자기들의 왕을 배신하고, 자기들의 손으로 직접 죽여 다윗에게 귀순한 것입니다.
이들이 이처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 까닭이 무엇일까요? 철저히 자기들의 이익과 보상을 기준으로 삼아 살았기 때문입니다. 7년 넘게 이스보셋 밑에서 충성을 다한 까닭도 더 큰 보상과 이익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는 자기들의 주군을 죽이고 다윗 밑으로 귀순한 까닭도 역시, 본인들이 받을 이익이 더 커지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아나와 레갑은 결국 철저히 자기들의 손에 쥘 수 있는 것들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은 자기의 주군의 목을 베어 다윗에게 왔으나, 또 상황이 바뀌어 더 큰 이익이 눈앞에 있으면, 가차 없이 다윗도 배신하고, 다윗의 목을 벨 사람들입니다.
뒤이어 나오는 이는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은 여성입니다. 이 여성은 사울 왕의 손자이자, 세자였던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을 돌보던 유모입니다. 이 여성도 궁전에서 먹고 살았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당시 왕이던 사울과 그의 아들인 요나단이 전장에서 함께 죽고 말았습니다.
당시 왕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오늘 본문 4절 말씀을 보면, 발칵 뒤집혔던 것 같습니다. 아마 다음 왕의 자리를 노리는 이스보셋과 그 부하들이 왕궁을 점령하지 않았나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왕이 죽고, 다음이 약속된 장남까지 죽으면, 다음 왕의 자리를 놓고 싸우곤 하죠? 사울의 네 번째 아들인 이스보셋과, 사울의 장손인 므비보셋이 서로 다툴 수 있습니다. 삼촌과 조카 관계지만, 왕의 자리를 위해서는 죽고 죽이기도 하죠? 이때 조카 므비보셋의 나이가 겨우 다섯 살이다 보니, 삼촌인 이스보셋이 부하들을 이끌고 궁으로 공격한 것 같습니다.
이때 유모는 다섯 살 먹은 므비보셋을 안고 도망쳤습니다. 가다가 떨어뜨리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만, 그만큼 당시 상황이 급박했음을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유모가 아이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책임지고 살렸다는 사실입니다.
큰 문제가 없을 때라면, 유모가 아이를 지키는 게 당연합니다. 그러나 지금 유모가 안고, 지키고 있는 아이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도움이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피해와 위기만 가져다줍니다. 이 아이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는, 이 아이 때문에 얻고 누리는 게 많습니다. 이 아이 때문에 유모가 산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왕과 그 아들이 죽은 이후에는, 이 아이 때문에 죽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이 아이를 보호했다는 사실 때문에, 유모와 그 가족까지 위태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유모는 마지막까지 자기 책임을 다했습니다.
성경은 자기 이익을 위해 주인을 바꾸는 군 지휘관들의 이야기 사이에, 자기 책임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여인의 이야기를 넣음으로써, 두 이야기를 분명하게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더불어 우리에게 둘 중 어느 방향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선택하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두 부류 중에 어떤 길을 선택하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정반대를 선택한 사람들의 결국을 성경은 기록해 놓았습니다. 자기 이익을 따라 이리 저리로 오가던 바아나와 레갑은 큰 보상을 바라고 다윗에게 갔으나 오히려 다윗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차라리, 주군을 배신하지 않고 자기 자리에서 끝까지 책임을 다해 살았으면, 그들의 목숨은 더 길었을 터입니다. 북쪽이 다윗 아래에서 통일되더라도, 그 동안 누리던 자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자리를 누리며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 유모의 결말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만, 나중에 다윗이 므비보셋을 불러들입니다. 사울 가문에 속한 모두가 죽었지만, 므비보셋만은 요나단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다윗의 보호와 사랑을 받아 평안히 살았음을 보면, 유모 한 사람의 수고와 헌신 때문에 사울 가문이 이어질 수 있었다 할 수 있습니다.
이 유모는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흔히 말하는 대로 이름을 남기지 못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헌신과 목숨을 다한 충성을 기록해 놓고, 이를 통해 므비보셋의 삶이 이어지도록 한 까닭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이런 이들을 통해, 유모처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하고 충성한 사람들을 통해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찾으십니다. 이름을 남길 만한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을 지휘하고 통제하고 명령할 만큼 지위가 높고, 권력이 큰 사람을 찾으시는 게 아닙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헌신한 것 같다가도, 더 큰 이익을 위해서는 자기 주군마저 죽이고, 돌아설 만한 사람들, 이익에 머리 좋은 사람들, 자기 권력에 눈먼 사람들을 찾으시는 게 아닙니다. 자기 명예와 큰 직분을 차지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다가도, 더 큰 명예와 더 큰 직분이 약속되면, 짓밟고 돌아서는 이들을 하나님은 미워하시고 버리십니다.
유모처럼 자기 자리에서 자신이 맡은 책임에 목숨 바칠 만한 사람을 하나님은 찾으십니다. 지금 우리가 이 유모처럼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고, 스쳐가듯 살아가는 것 같으나, 하나님이 맡기신 책임을 위해 죽음마저 각오할 만한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이처럼 옳은 일, 하나님의 일, 자신이 맡은 사명을 위해 유리함이나 불리함을 나누지 않는 순전한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기뻐하시고, 기억하시고, 복과 은혜로 채워 주십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과 은혜를 받기 위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진하게 믿는 것입니다. 순진하게 믿고, 미련한 사람처럼 책임을 다해 사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특징 중 하나는 손해와 이익에 지나치게 밝다는 점입니다. 요즘 신앙인들의 특징들 역시 지나치게 계산을 잘 하며 삽니다. 이익이 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서도, 손해가 된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신의와 사명마저 버리곤 합니다. 신앙생활에서마저 영악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아나와 레갑처럼, 손익에 밝고, 영약하게 사는 이들을 복 주시는 게 아니라, 유모처럼 미련하게, 순전하게 사명을 다하는 사람을 기억하고 복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직분에 따라 복 주시는 게 아닙니다. 직분과 지위에 따라 복 주셨다면, 유모는 저주 받아야 하고, 바아나와 레갑만은 말로가 대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목사라고, 장로라고 더 큰 복을 주시지는 것 아니고, 서리 집사나 직분마저 없다고 복을 안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입은 외모와 옷차림에 관심이 없이, 오직 중심 하나만 보시듯이, 우리가 가진 직분이나 업적보다는, 우리 안에 순전한 충성 하나만을 보십니다. 지금 우리가 힘쓸 방향은, 직분의 높고 낮음을 나누고, 높은 자리에 앉고, 큰 직분을 차지하는 게 아니라, 맡은 작은 책임이라도 끝까지 다하며 사는 길입니다. 이 길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방향이고,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복을, 상급을 받을 수 있는 길입니다.
이름조차 없으나,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감당함으로써, 이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기억된 유모처럼,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기억하고, 유불리를 계산하지 않고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다함으로써,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하나님의 선택과 복을 누리며 사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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