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로보다 순종이 중요합니다
성경: 사무엘하 6장 1-15절(구 471쪽)
찬송: 279장(인애하신 구세주여; 통337장), 395장(자비하신 예수여; 통450)
설교: 20201206.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의 마지막은 그리 좋지 않습니다. 20년 가까이 독재하다 부하의 손에 죽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수감생활을 하고 특별사면을 받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두 전직 대통령이 수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전직 대통령들이 비참한 말년과 관련해 사면과 용서의 이야기가 나오곤 합니다. 전직 대통령들을 사면하고, 명예를 회복시켜 주자고 주장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한 국가의 수장이 수감된 것은 국가의 명예를 낮추는 일이라는 겁니다. 다른 이유 한 가지는,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 잘못한 일이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나라를 부흥시키고, 발전시킨 공로가 있다는 것입니다. 전직 대통령들의 사면을 바라거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이들의 가장 큰 주장이 이것이고, 여기에서 의견이 크게 나뉘는 대상이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1년 5.16 쿠데타를 주도하고, 이후 부하에게 피격되기까지 16년 동안 대통령을 지냈습니다. 당연히 독재했고, 군사정권이었고, 부정선거를 저질렀습니다. 부하에게 살해당하지 않았으면, 얼마나 더 오래 대통령으로 지냈는지 모릅니다. 군인이 권력을 빼앗는 일 자체가 불법이죠? 법을 바꾸면서, 네 번이나 대통령 자리에 오른 일도 불법이고 부정이죠? 또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서 얼마나 많은 부정을 저질렀는지 모릅니다. 이 때문에, 한 편에서는 독재자로만 여겨집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에서는 위인으로 인정되죠? 특히 경북 쪽과 보수 진영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여깁니다. 심지어는 ‘탄신제’를 지내며, 마치 신처럼 섬기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여전히 위대한 지도자로 여기는 분들도 많습니다. 지금까지도, 역대 대통령들의 지도력과 선호도 조사에서 1위에 오를 정도입니다.
왜 이런 반응이 나올까요? 다른 무엇보다도, 공로와 업적을 인정하기 때문이죠? 얼마 전엔, 여당의 한 국회의원의 “이승만, 박정희 전직 대통령들의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봐야 한다”는 발언에서 이런 입장이 잘 드러납니다. 전직 대통령들이 잘못한 일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그것은 그 나름대로 평가하되, 잘 하고, 나라 발전에 기여한 점들에 대해서는 인정하자는 주장입니다.
나름 일리 있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완벽할 수 없습니다. 완벽할 수 없기에, 그 속에서 나오는 생각과 정책도 절대 완벽할 수 없습니다. 한 쪽이 좋아지면, 다른 한 쪽이 나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 쪽을 발전시키면, 그 속에서 부작용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알기에, 업적과 과오를 나누어 보자는 말도 나름 일리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준은 자칫 결과만 좋으면, 잘못된 수단과 방법마저 괜찮다고 하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발전이라는 결과만 만들어 내면, 도둑질이어도 괜찮고, 거기에서 나오는 희생과 피해도 상관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해, 독재를 해도 괜찮고, 나라의 법을 무너뜨려도 괜찮다는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이상한 논리가 만들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공로주의’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업적과 공로가 많으면, 법 위에, 법을 넘어서도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기준이 가장 많이 적용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대형 교회를 만든 목회자들이 무슨 일을 저질러도 공로와 업적 때문에라도 그냥 넘어가자는 주장입니다. 그 목회자가 아니었으면, 대형교회를 만들지 못 했을 터이니, 비록 불법과 부정이 있다 하더라도, 묵과하자는 입장입니다. 이런 기준과 판단이 신앙인들과 목회자들에게도 적지 않습니다.
이를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데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읽을 때마다 무조건 ‘아멘’으로 받아들여집니까? 저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이 너무 모지신 것으로 보일 때가 있습니다. 웬만하면 조금 더 용서하시고, 조금 더 아량을 베푸셨으면 하는데, 그렇지 않고, 선을 너무 명확하게 그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 인물들 중에 모세가 있죠? 모세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기록한 인물이기도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온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모세가 얼마나 많은 이적을 보였습니까? 또 그러면서도 철저히 절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민수기 12장 3절에서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기록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모세도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희생한 세월이 무려 40년입니다. 자기 민족을 위해서 산 세월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이 보이는 산에 올라 바라만 보고, 들어가지 못 하고 죽었습니다. 심지어는 모세가 죽을 때의 모습을 신명기 34장 7절에서는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 하나님이 너무 매정하신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차라리 병으로 죽게 하시거나, 아니면 기력이 없어 죽게 하셔서, 가나안 땅을 꿈꿀 수조차 없는 게 낫죠? 아니면 광야에서 지내다가 죽는 게 나아 보입니다. 모세가 가장 바라고 원하던 일은, 자신이 이끌고 나온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를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단 하루만 걸어가면 밟은 수 있는 약속의 땅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한 번 바라볼 수 있는 것까지만 허락하셨습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너무 인색하신 것처럼 보이곤 했습니다. 너무 매정하신 것처럼 여겨지곤 했습니다. 차라리 건강 때문에 들어가지 못 하게 하시든지, 아니면 보게 하실 바에야, 시간이 많이 걸리지도 않으니, 그 땅을 밟도록 허락하시면 좋지 않습니까? 이 정도가 우리가 기대하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의 평생소원을 외면하셨습니다. 27km가량 떨어진 산에 올라가 바라볼 수 있는 정도만 허락하셨습니다. 27km면, 여기에서 직선거리로 해도 나주정도밖에 안 됩니다. 40년간 모세가 걸어온 시간과 거리에 비하면 너무 보잘 것 없는 정도입니다. 하나님이 너무 엄격한 잣대로 모세를 대하셨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러한 생각이 공로주의적인 생각이고, 하나님께서 이런 계산과 생각을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비로소 이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공평하심과 엄위하심은 사람에 따라 다르지 않고, 업적과 공로에 따라 달리하지도 않으십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리는 왕이 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수도를 옮겼고, 침략해 온 블레셋 민족을 두 번이나 무찔렀습니다. 다음에 시작한 일이 바로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 성으로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궤 속에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 만나 항아리, 십계명이 들어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과 함께하심을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잘못 여기게 됩니다. 법궤를 통해,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고, 오직 법궤만 잘 섬기게 되었습니다.
요즘 우리로 보면,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해야 하고, 그 은혜를 받은 자답게 살아야 함에도, 이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나 노력도 없이, 오직 십자가만 크게, 멋지게, 높이 세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때문에 블레셋 민족과 싸우다 법궤를 빼앗겼고, 하나님이 벌을 내리셔서 이스라엘 민족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이후에는 사울이 왕으로 있으면서, 믿음이 좋은 사람이 아닌지라, 방치하다시피 했습니다.
다윗은 적을 무찌를 만큼 강해지고, 안정을 찾자, 법궤를 옮기려 했습니다. 많은 군사들을 모으고 가서 법궤를 새 수레에 싣고, 여러 악기로 연주하며 법궤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당시 도로 사정은 좋지 않아 수레가 출렁여서, 법궤가 떨어질 위험에 처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땅에 떨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수레를 몰던 웃사가 손을 내밀어 궤를 붙잡았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웃사를 그 자리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다윗도 이 일 때문에 화가 나기도 하고, 또 하나님이 무서워서 궤를 다윗 성으로 옮기지 않고, 중도에 있는 오벧에돔의 집에 놔두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이해되십니까? 아니면 이를 보고 화낸 다윗의 행동이 더 이해되십니까? 먼저는, 하나님이 너무하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죠? 다윗이 자기 욕심이나 자랑을 위해 이 일을 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궤가 외진 곳에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려서, 하나님의 법궤를 새로운 수도로 옮기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이었습니다. 의도도 좋았고, 떨어지는 궤를 붙잡은 웃사의 행동도 나쁘다고 볼 수 없습니다. 분노해서 법궤를 중간에 놔둔 다윗의 행동이 충분히 이해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런 계산에서 빼먹은 게 한 가지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데 있어, 하나님이 어떻게 옮기도록 말씀하셨는지를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민수기 4장에 하나님이 지정하신 물건을 옮기는 방법에 대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5절에서는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제사장을 통해 성물을 덮지도 않았고, 고핫 자손으로 하여금 어깨에 메고 옮기도록 하지도 않았습니다. 수레에 싣게 했고, 아비나답의 아들들로 하여금 수레를 몰게 했습니다. 웃사는 떨어지는 법궤를 엉겁결에 붙잡다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결국 웃사가 죽은 사고는 하나님이 너무 가혹하시기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의 궤를 가까이 두려는 다윗의 마음이 잘못되어서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말씀하신 절차를 지켜 행하지 않은 까닭이었습니다.
자신의 잘못된 판단과 명령 때문에 웃사가 죽었음에도, 다윗이 오히려 하나님의 징벌을 탓하고 무서워한 까닭은, 다윗에게도 공로주의적인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법궤를 위해, 이만큼 앞장서고 수고했음에도, 하나님은 그것을 보지 않고, 오히려 징계를 내리셨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정말 다윗에게 잘못이 없으려면,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정해준 사람들을 통해 법궤를 운반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마음과 믿음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이 먼저라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실 다윗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애쓰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 노력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죽음을 각오하고 산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공로와 업적만으로 보면, 다윗은 분명 최고의 자리에 오를 만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어겼다는 점에서는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징벌하신 게 질서에 맞고, 다윗의 판단과 계산이 잘못되었습니다.
신앙생활 중에 다윗이 가진 공로주의적인 생각이 없는지 언제나 조심해야 합니다. 요즘 기독교와 교회 내에 문제들이 많습니다만, 대부분 원인이 공로주의적인 생각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직분이 높으면, 자기의 판단과 주장을 앞세우곤 합니다. 교회에서 일을 많이 할수록 말이 많아집니다. 헌금을 많이 할수록 교회 질서와 규칙마저 어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래도 되는 줄 압니다. 그 정도는 하나님도 용서하실 거라 판단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잘못을 하나님이 어떻게 처리하셨는지만 봐도, 공로와 업적을 앞세운 행동이 어떤 결과를 맞이할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아무리 대단해도, 다윗의 믿음만 하겠습니까? 우리의 헌신과 수고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다윗의 헌신과 수고만 하겠습니까?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믿음으로 살았고, 순수한 열정과 믿음으로 헌신했음에도, 말씀에서 벗어나자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하물며 극히 작은 것 하나 해냈다고, 보잘것없는 것 해냈다고,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 질서와 평안을 해치고, 말씀에서 벗어난다면, 하나님이 절대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징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와 평안과 복을 누릴 수 있는 길은 분명합니다. 순수한 믿음과 열정으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오벧에돔 사람들이 복을 받은 까닭은, 이들이 특별한 공로와 업적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법궤를 곁에 두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계산으로는, 하나님의 궤를 집에 두기만 한 사람보다는, 궤를 옮기고자 노력한 다윗이 훨씬 더 큰일을 해내고, 공로가 큰 것 같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다윗에게 진노하셨고,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주셨습니다.
신앙생활 중에 혹시 공로와 업적을 의지하는 마음이 있는지 조심해야 합니다. 아무리 크고 엄청난 일을 해냈더라도, 그 속에 자기의 것을 내세우는 교만이 있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건 진노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내 자신이 내세울 만한 게 하나 없음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은 반드시 은혜와 복으로 채워 주십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옮기던 중에 겪은 하나님의 섭리와 말씀을 기억하고,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순수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말씀하신 바를 순수하게 믿고 따름으로써,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 복을 받으며 사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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