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한 사람
성경: 사무엘하 6장 16-23절(구 472쪽)
찬송: 254장(내 주의 보혈은; 통186), 426장(이 죄인을 완전케; 통215)
설교: 20201213.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우리나라가 여러 모로 발전되어서, 먹고 살기 좋아졌습니다. ‘먹고 살기’가 뜻하는 폭이 아주 넓습니다만, 말 그대로, 살기 위해 먹는 음식만을 뜻한다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좋아졌습니다. 특히 연세 많은 분들은 이를 가장 느끼시죠? 반대로 나이가 적을수록 이를 알기 쉽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제 나이 대는 중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굶어 죽을 정도의 어려운 시기는 아니었지만, 요즘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고 어려운 시절을 겪었습니다. 특히 저의 집 형편이 어려워서, 비슷한 연령대에서도 어려움을 더 많이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끼니마다 보리가 많이 섞였고, 쌀에 비해 값이 싼 밀가루로 죽을 만들어 먹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요즘이야 건강을 목적으로 보리와 잡곡을 섞고, 입의 즐거움을 위해 밀가루 음식을 먹는 것과는 차이가 많습니다.
그렇게 어려울 때 어머니가 밥을 담는 데에 한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자녀들의 그릇에 차이를 두신 일입니다. 아버지 그릇에는 할 수 있는 대로 쌀밥만으로 담으셨고, 자녀들의 밥그릇에는 그만큼 보리밥의 양이 많아졌습니다. 국을 담는 데에도 이런 차이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고기로 국을 끓였으면, 아버지 국그릇에 고기가 가장 많았고, 그에 비하면 자녀들의 그릇에는 어림없이 적은 양의 고기가 들었습니다. 자녀들은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밥그릇과 국그릇을 부러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식사를 하다 보면, 또 하나의 일이 반복되곤 했습니다. 아버지가 거의 틀림없이 밥과 국을 남기셨습니다. 남은 음식은 자연스레 자녀들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매일 반복되자 합리적이지 못 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자녀들에게 돌아올 쌀밥과 고깃국이라면, 처음부터 그렇게 담으면 될 것 같았습니다. 자녀에게 담을 밥과 국을 아버지께 드리고, 아버지께 드릴 음식을 자녀의 그릇에 담으면, 간단하게 해결되는 문제였습니다. 그렇지 않은 어머니의 습관이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끼니마다 이런 일을 되풀이하셨을까요? 자녀에 대한 사랑보다는 남편에 대한 사랑이 커서 그럴까요? 직접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사랑의 크기로 따지면 별반 다르지 않을 겁니다.
남성에 비해 신체적 힘이 약한 여성이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경우들이 간혹 있죠? 바로 자기 자녀가 위험에 처했을 때입니다. 자녀를 살리기 위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참아내기도 하고, 자신을 희생해 자녀를 지키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에 비하면, 남편을 지키고, 살리려 희생한 경우들은 들어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남편’을 ‘남의 편’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여러 가지를 감안해 봐도, 여성이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보다는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크고 강해 보입니다.
아마 저의 어머니의 경우도 이런 부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 많이 다투셨고, 원망하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계속 아버지 그릇에만 유독 좋은 음식을 놓으신 것을 보면, 단순히 남편에 대한 사랑이 더 커서 그러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시간이 꽤 지나서 어머니의 모습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의 크기에 따라 그리 하신 게 아니라, 남편과 자녀에 대한 사랑법이 달랐던 것이었습니다. 가장으로서의 남편을 존중하기 위해, 반복되고, 결국 자녀에게 돌아가겠지만, 먼저 남편에게 좋은 것을 담았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되, 가정의 질서를 알고, 부모를 존중하도록, 아버지 그릇에만 좋은 음식을 먼저 담아 내셨습니다.
만일, 사랑의 크기에 따라 좋은 것을 자녀에게 먹이려 하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권위를 갖지 못 하셨겠죠? 맛있는 것을 자녀부터 먹고, 남편은 나머지를 얻어먹는다면, 아버지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가정의 질서와 평안도 깨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는, 대상에 따라 표현하는 모습이 달라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상을 분명히 해서, 표현법이 섞이거나 달라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을 뜻합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이 우리 삶의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고, 내 가정의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사는 게 신앙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인이심을 인정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주인 되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해야 하죠? 그러면 어떻게 인정하고,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복잡하고 어렵게 생각하면 한 없이 복잡합니다만, 반대로 기준만 분명하게 세우면 복잡할 것도 없고, 어려울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리고, 사람의 것은 사람에게로 돌리면 됩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것인데, 그러면 모두 하나님과 교회에 바치고, 빈털터리로 살아야 하느냐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야 하는 한, 우리에게는 여전히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필요한 모든 것마저 바치고, 비참하게 살면,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합니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을 믿으려 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린다는 뜻은 모든 걸 바쳐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인 되심,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며 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족과 이웃을 마땅하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도 하나님께 드릴 것과 사람에게 줄 것을 섞지 않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이에 대한 바른 기준을 세우고 행하는 사람 다윗과, 반대로 기준이 잘못 세워져 저주를 받게 되는 왕비 미갈이 등장합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된 후 나라가 빨리 안정을 찾고 발전하게 됩니다. 다윗으로서는 하고 싶은 일들이 많겠지만, 하나님 중심으로 산 사람이어서, 하나님의 법궤를 옮기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처음 시도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절차를 무시하다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옮겨서, 온 나라를 하나님의 기준으로 통치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지만, 수레를 몰던 웃사가 죽는 사고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다윗 본인으로서는 하나님을 더 가까이 모시고 싶은 표현이었는데, 이렇게 큰 사고로 이어지자 화가 나서 법궤를 오벧에돔의 집에 놔두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이 이 집안에 복을 주셨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다윗은 다시 다윗 성으로 옮기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첫 시도가 왜 실패했는지를 알았으니, 두 번째는 훨씬 더 섬세하고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절차에 따라 행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으로서는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토록 사모하던 하나님의 법궤를 가장 가까운 곳에 두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날마다 보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다는 그 약속이 하나 어긋나지 않고 이루어진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이 영원토록 변함없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날마다 확인하며 체감할 수 있으니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이겠습니까? 다윗은 기뻐서 뛰면서 춤을 추었습니다.
이 모습을 다윗의 아내인 미갈이 창밖으로 봤는데, 좋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왕다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왕이나 대통령은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죠? 이런 자리에 마땅한 모습을 생각하곤 합니다. 물론 법이나 규칙으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이에서 어긋나면 체면과 권위가 떨어진다고 여기곤 합니다. 특히 전통을 중요하게 여기는 곳일수록 심하죠? 당시 이스라엘도 이런 분위기였습니다. 왕답다는 건 근엄해서, 말과 행동이 무겁고 조용함을 뜻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법궤를 옮기면서 춤을 얼마나 열심히 추었는지, 옷이 올라가고 맨살이 드러날 정도였습니다. 왕비 미갈에게 다윗의 이런 모습은 이스라엘의 왕, 그것도 이제 나라의 기반을 다져야 하는 왕으로서는 체면이 깎이고, 권위가 서지 않는 행동처럼 보였습니다. 다윗이 함께한 모든 백성에게 떡과 고기를 나누어 준 후, 기쁜 마음으로 가족에게로 축복하러 들어오자, 미갈이 다윗에게 한 마디 했습니다. “왕이면서도, 마치 건달패들이 춤을 추듯, 맨살이 드러날 만큼 격하게 추어서, 신하들과 그 아내들이 보기에 체통이 서지 않게 되었습니다.” 분위기로 봐서 절대 조용하게 말하지는 않았겠죠? 아마 크게 질책하듯, 마치 자기 아랫사람에게 충고하듯 거칠게 쏘아 붙였을 것입니다.
지금 다윗에게는 일생에서 가장 기쁜 날이었습니다. 성경을 봐도, 다윗이 살이 드러날 만큼 격하게 춤을 추며 기뻐한 일이 없습니다.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에 오른 것보다, 이렇게 하나님의 법궤를 가까이에 옮기고, 백성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며 축복할 수 있게 된 게 그만큼 기쁘고 좋았습니다.
하지만 이 기쁨은 오래 가지 못 합니다. 가족에게 와서 축복하려고 왔는데, 자기 아내로부터 건달패보다 못한 모습을 보였다며 핀잔을 받았습니다. 가장 큰 기쁨으로 가족을 축복하고자 한 다윗의 마음이 순간에 식고, 이제 다윗의 입에서는 오히려 미갈에 대한 분노와 저주의 말만 나왔습니다. 이 때문에 미갈은 자녀를 낳지 못 하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미갈이 아이를 낳지 못 하는 저주는 누가 내렸는가요? 다윗이 쏟아낸 저주의 말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축복은 사람이 하지만, 복은 하나님만이 주시는 것처럼, 저주의 말은 사람이 하지만, 저주로 인한 징벌과 징계는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이를 생각해 보면, 미갈이 저주를 받아 아이를 낳지 못 한 까닭은, 하나님이 미갈의 행동과 생각을 싫어하셔서 벌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미갈에게 벌 주셨습니까? 미갈이 저주를 받을 만큼 잘못한 일이 무엇입니까? 남편 다윗을 왕으로서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단지 다윗이 체면 꺾이는 일을 지적했기 때문이겠습니까? 미갈이 남편의 체면을 깎아먹은 까닭 때문에 하나님이 벌을 내리셨다면, 다윗도 미갈의 체면을 깎아먹고, 저주했으니 다윗에게도 같은 벌을 내리셨겠죠?
미갈의 가장 큰 잘못은, 대상을 분명히 하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살을 드러낼 만큼 춤춘 까닭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향한 마음이었고, 기쁨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나라의 왕으로 선 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남자로 선 게 아닙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섰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섰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으로 서는 데, 왕으로서의 체면과 지위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미갈은 이를 알지 못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마저 다윗이 왕으로 서는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체면을 지켜야만 권위가 서는 줄 잘못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가지고 다윗을 오히려 비난했으니, 하나님께서 미갈을 가만 두시겠습니까?
다윗은 반대입니다. 자기가 온 백성 위에 있는 왕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세우지 않으셨으면, 자신은 8형제 중 막내로서, 여전히 시골 외진 곳에서 양이나 기르는 사람에 불과했음을 잘 알았습니다. 그런 자신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히셨음을 인정했습니다. 그 동안 숱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지켜 주시고, 새로운 시대를 열게 하신 분도 하나님뿐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다윗이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매일 보고 확인할 수 있는 궤를 성안에 옮기는 중에 사람의 눈을 의식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지금 다윗은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예쁘게, 멋지게, 위엄있게 보이느냐 하는 일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기쁨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문제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다윗과 미갈은 같은 일을 보면서도 전혀 다른 관점을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돌릴 일은 하나님께, 사람에게 돌릴 일은 사람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갈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봐야 할 일을 사람의 눈으로 판단하고 말았습니다. 이를 여러 말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성경에서 자주 쓰는 표현된 바에 따르면 거룩과 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룩’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구별, 선별입니다. 하나님의 것과 사람의 것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릴 마땅한 바를 선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마음으로, 왕으로서 체면과 체통까지 생각하지 않고 춤을 춘 다윗은 거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과정이면서도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고, 그렇지 못 한 다윗을 비난한 미갈은 거룩하지 못 합니다. 부정합니다. 영적으로 더러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할 때는, 하나님만을 생각하는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면서도 사람의 것을 생각하면 부정하게 여기시고 싫어하십니다. 하나님만을 향할 때는 다윗처럼 순수해야만 하나님은 거룩하다 인정하시고, 은혜와 복을 내려 주십니다. 하나님을 향하면서도, 미갈처럼 사람의 것을 섞으면 하나님은 부정하다 여기시고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을 향하면서도 사람의 것마저 생각하는 게 더 합리적이고, 효과적일 것 같지만, 거룩은 그 어떤 것도 섞지 않고, 분명하게 선을 긋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시선이 어때야 하는지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바르게 기억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함으로써, 다윗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날마다 누리며 사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
'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0210124)하나님의 거부에도 감사하십시오(삼하 7장 18-29절) (0) | 2021.01.24 |
|---|---|
| (20201220)자기를 거스를 줄 아는 믿음(삼하 7장 1-17절) (0) | 2020.12.20 |
| (20201206)공로보다 순종이 중요합니다(삼하 6장 1-15절) (0) | 2020.12.06 |
| (20201122)하나님의 뜻을 인정하는 기도(삼하 5장 13-25절) (0) | 2020.11.29 |
| (20201115)작은 것에도 감사하십시오(마 14장 13-21절) (0) | 2020.1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