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201220)자기를 거스를 줄 아는 믿음(삼하 7장 1-17절)

청명하늘 2020. 12. 20. 14:22

자기를 거스를 줄 아는 믿음

 

성경: 사무엘하 71-17(473)

찬송: 428(내 영혼에 햇빛; 488), 324(예수 나를 오라 하네; 360)

설교: 20201220.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우리나라 기독교가 여러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교회 성장이 멈추었다는 소식이 들린 지는 오래 되었고, 기독교인들의 수가 줄어든다는 소식이 계속 들려오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가까운 곳에 있는 교회 목사님과 말씀을 나누었는데, 교회학교 학생이 없어졌다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 교회는 농촌에 있지만, 그래도 시내와 가깝기도 하고, 장로님만 해도 세 분이나 있고, 어느 정도 안정된 교회입니다. 그런데 교회 학교에 학생이 없어졌다는 겁니다. 이게 무엇을 뜻할까요?

 

어린 자녀를 둘 만큼 젊은 교인이 없다는 뜻이죠? 평균으로 계산해 보면, 대부분 교인의 나이가 50대 이상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또 앞으로 1020년을 봤을 때도 역시 교인들의 나이가 점차 많아져서, 활동이 어려워지고, 교인들이 돌아가셔서 줄어든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일할 만한 젊은 교인들이 점차 줄어들 것을 예상하게 만듭니다. 지금의 형편도 어렵지만, 앞으로는 더 어려워질 거라 예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 오래 전도 아니고, 20,3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 기독교가 이렇게 될 거라 예상한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성장할 거라는 기대 때문에, 곳곳에 교회가 세워졌고, 수많은 목회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하지만 기대와 예상과는 달리 이런 어려움에 처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다양한 방법으로 많은 문제를 진단할 수 있겠지만, 저 나름으로는 교회가 교인들에게 더 이상 싫은 소리를 못 하게 된 이유가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을 특정할 수는 없지만, 언제부터인지 교회는 더 이상 교인들에게 싫은 소리, 부담되는 소리를 못 하게 되었습니다. 오직 듣기 좋은 소리, 잘된다는 이야기, 바라고 원하는 대로 될 거라는 축복의 선언만 쏟아내게 되었습니다.

 

이를 아주 잘 드러내는 표현이 있죠? “선포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이런 표현이 누가, 언제 시작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처럼 현재 기독교의 흐름을 잘 표현하는 말도 별로 없습니다. 될 것으로 믿고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고, 믿음으로 선포하는 대로 성공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꿈은 크게 꾸고, 언제나 잘된다는 긍정의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이를 크고 대단한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과연 성경적인 믿음이고 복입니까? 잘되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잘된다 생각하면 되고, 꿈꾼 대로 이루어지니 꿈을 무조건 크게 꾸라는 게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잘되고 잘사는 길입니까? 이런 기준이 세계 어디에나 있는 자기 복만을 위한 기복신앙 위에 하나님과 성경을 덧붙인 것에 불과한 것 아닙니까?

 

그럼에도 대부분의 교회들이 이를 대단한 믿음,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잘된다, 원하는 대로 된다고 말하는 곳으로만 교인들이 몰립니다. 싫은 소리 하고, 고난과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교회마다 교인들이 외면합니다. 원하는 대로 되고, 꿈꾸는 대로 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교회들이 곳곳에 넘쳐 나는데, 그 누가 싫은 소리 하는 교회를 향하겠습니까? 부담을 주고,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곳으로 향하겠습니까?

 

더 이상 고난의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는 교인들로 교회가 채워지니, 어떻게 목회자, 설교자가 고난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교인들의 삶에 대해 충고하고, 쓴소리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복과 평안의 이야기만 기대하며 나아온 교인들 앞에서 설교자가 어떻게 고난과 시련을 설교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들의 생각과 판단이 무조건 맞다고 인정해 주기 바라는 교인들에게 목회자가 어떻게 당신의 생각이 틀렸다.” “당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 “당신의 바람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며 교육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신앙인들이 자기 생각하는 대로,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고, 설교자는 더 이상 쓴소리를 못 하게 되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사기 176절의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말씀처럼, 자기 생각대로, 자기 원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자기가 세상 최고의 신앙을 가졌다 착각하며,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짧은 역사에 비하면 신앙의 위인들이 많이 계시죠? 위인들 중 한 분이 조만식장로님입니다. 이분은 독립을 위해 노력도 하셨고, 교육과 언론을 위해 일하기도 하셨습니다. 더불어 장로로서 큰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이분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주일에 애국운동하는 분이 찾아왔습니다. 너무 중요한 일이기도 하고, 또 숨어서 해야 하는 일이라서 그런지, 예배 시간이 되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다 그만 예배에 늦고 말았습니다. 목사님이 설교하는 중에 예배당에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장로님, 오늘은 의자에 앉지 말고 서서 예배를 드리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예배 시간에 늦었으니, 그 벌로서 서서 예배를 드리라는 뜻입니다. 목사님의 말씀대로, 장로님은 예배가 끝날 때까지 서서 예배를 드렸고, 예바가 끝날 시간에 기도하라는 목사님의 말씀에 따라, 자기가 잘못했음을 인정하며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장로님은 오산중학교 교장을 지내신 분이고, 교장으로 지내실 때 제자들 중 한 사람이 바로 담임목사님인 주기철 목사님이었습니다. 자기 제자가 담임목사로 있는 교회에서 장로로 지내고 있는데, 예배 시간에 늦었다는 이유로, 목사님으로부터 그런 책망을 들은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얼마나 자존심 상했겠습니까? 자존심 정도가 아니라, 감히 제자가 스승에게 함부로 말했다며, 싸워도 될 만한 일 아닙니까? 그럼에도 장로님은 목사님의 꾸중을 듣고 그대로 따랐습니다. 자기 스승이지만, 목사로서 장로에게 쓴소리, 하나님의 뜻을 무섭게 전하는 주기철 목사님도 대단하고, 자기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듣기 싫고, 자존심 상하는 목사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조만식 장로님도 정말 대단합니다.

 

그러면 지금 한국교회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목사가 장로를 책망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도 자기 스승인 장로에게 쓴소리를 그대로 말하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그 순간 그 교회는 난장판이 되고 말겠죠? 그 순간 목사님은 이미 목회를 그만둘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고, 이삿짐 센터에 연락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다윗과 나단 선지자의 모습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참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다윗이 이제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리는 왕이 되었습니다. 블레셋을 비롯한 여러 적들이 공격해 왔지만, 본문 1절의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셨고, 나라가 평안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나라가 안정을 찾고 강해지자,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어떻게 해야 할까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이 때문에, 앞장 6장에서도 하나님의 법궤를 자기가 있는 성으로 옮겼고, 이제는 성전을 짓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까지 하나님의 법궤는 천막으로 만들어진 곳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다윗은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을 지어 그곳에 법궤를 보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단 선지자에게 이를 이야기했습니다.

 

나단 선지자 보기에도 다윗의 생각이 좋아 보였습니다. 다윗이 자기 욕심이나 자랑을 위해 궁전을 지으려 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성전을 짓고 싶다고 했으니, 의도와 계획까지 모두 순수하고 좋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임금님과 함께 계시니, 가셔서, 무슨 일이든지 계획하신 대로 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 나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이 말한 성전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다윗이 성전 건축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내용만 나올 뿐 까닭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때의 일을 기록한 역대상 228절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보면, 다윗이 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희생을 너무 많이 만들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단 선지자의 선택과 결단을 살펴봐야 합니다. 나단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그대로 전하는 게 뭐가 어렵냐?’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나단 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전하는 일이 아주 어렵습니다.

 

먼저는, 나단 선지자 본인이 다윗의 의견에 동조하며, 그렇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이 성전을 세우고 싶다는 이야기를 듣고, 3절에서 나단은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나단의 판단으로는, 다윗이 성전 건축하는 일을 하나님도 원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이 반대하시고, 거부하실 만한 이유가 전혀 안 보였습니다.

 

다윗이 자기 이름을 더 내기 위해서 성전을 지으려는 것 아니죠? 자기 궁전을 위한 명분을 쌓기 위해 성전을 먼저 짓겠다 한 것도 아닙니다. 이유도 좋고, 과정도 좋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마음에 계획한 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 다윗이 성전 건축하는 일을 거부하셨습니다.

 

이때 나단이 웬만한 사람이었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이렇게 처음과 나중의 말이 달라진 데에 시간이 많이 걸린 것도 아닙니다. 단 하루였습니다. 전날에 와서는 성전을 지으라 하더니, 다음 날에 와서는 짓지 말라고 합니다. 이렇게 쉽게 답을 바꾸면, “실없다고 말하죠? 참되지 못 하고, 미덥지 못 하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평가가 가장 무섭죠? 진리를 전해야 하고,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단 선지자의 입장이 바로 실없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럴 때면, 자기 체면과 위신 때문에라도 침묵하거나 얼버무리기 쉽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단이 말해야 하는 대상이 왕이라는 점 때문에라도 너무 어려울 때입니다. 요즘 대통령의 의견에 반대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하물며 수천 년 전 왕에게는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목숨 내놓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왕의 계획이나 명분이 잘못되지도 않았고, 반대할 명분이 분명한 것도 아닙니다. 나단 선지자로서는 말하지 않는 게 훨씬 더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나단은 다윗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합니다. 하루 전 자기가 말한 것과 정반대 상황이 하나님의 뜻임을 전합니다. 전날에 자기의 입으로 말한 게 잘못되었음을 인정할 만한 용기가 필요했고, 왕의 계획과 뜻을 반대할 만한 담대함이 있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왜 나단이 참된 선지자였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지금 한국 기독교에 필요한 설교자가 이런 사람 아니겠습니까? 지금 한국 기독교 내에 만연해 있는 영적 질병을 고칠 만한 의사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신앙 지도자 아니겠습니까? 자기 인간적인 체면과 권위가 깎이더라도,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일꾼이 지금 이 시대, 이 땅에 꼭 필요합니다. 자기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더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왜곡시키지 않고, 머뭇거리지 않고, 숨기지 않고 전하는 지도자가 정말 필요합니다.

 

더불어 우리 모두는, 아무리 좋은 생각과 계획을 세웠더라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멈출 줄 알고, 포기할 줄 아는 다윗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명분과 뜻을 세웠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거부하실 수 있음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좋은 뜻을 세우는 것도 좋습니다만, 그러나 그런 계획마저도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게 먼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단이 위대한 까닭은, 입장을 바꾸지 않아서도 아니고, 내용을 바꾸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자기가 말한 바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할 줄 알았고, 엄청난 권력을 가진 왕 앞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전했기 때문입니다. 왕의 바람을 알았음에도, 왕의 권위보다 하나님의 권위를 위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위대한 까닭은, 하나님을 위해 수고하겠다 다짐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좋은 의도와 계획을 세웠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직 자기가 세운 좋은 계획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뜻에 반대하는 선지자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만한 바른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단과 다윗의 위대함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오늘의 교회들에서 이 같은 일이 일어났을 때를 예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나단 선지자처럼, 지금 목회자, 설교자가 자기의 생각과 발언이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났음을 인정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장로나 교인이 세운 뜻과 계획을 하나님이 거부하신다고 말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맞춰 교인의 잘못을 바르게 지적해 줄 만한 주기철 목사님 같은 목회자가 이 시대에도 용납될 수 있겠습니까? 인간적인 권위와 능력과 지식과 경력이 충분함에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철저히 낮아질 만한 조만식 장로님 같은 교인이 이 시대에도 나올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건강한 믿음을 가진 참된 신앙인으로 인정받으려면, 나단과 같은 목회자가 있어야 하고, 다윗과 같은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사명을 다하는 참된 목회자가 있고, 철저히 순종할 줄 아는 참된 신앙인이 있어야만 건강한 교회, 건강한 신앙인이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일꾼, 순종하는 일꾼이 됨으로써, 하나님께서 나단과 다윗에게 베푸신 은혜와 복을 풍성히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