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을 인정하는 기도
성경: 사무엘하 5장 13-25절(구 471쪽)
찬송: 302장(내 주 하나님 넓고; 통408), 214장(나 주의 도움; 통349)
설교: 20201122.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신학대에 다닐 때 한 교수님이 “교회에서 문제를 많이 일으키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다.”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안 하는 사람도 아니고, 교회 상황도 잘 알고, 또 목회자를 교육하는 분으로부터 나온 발언으로서는 좀 의외죠?
성경에 기도에 대한 말씀이 많습니다. 마태복음 21장 21,22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는 말씀에서는, 믿음 위에 기도가 더해지면 응답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는 어떻게 기도해야지에 대해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이 외에도, 어느 정도로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해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7절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어떻게 기도하라는 뜻일까요? 시간과 내용으로 나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시간으로 판단하면, 많이 할수록 좋다는 뜻인 ‘다다익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내용과 범위에 대해서는, 제한을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란 없습니다. 사사건건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이처럼 기도를 많이 하는 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분명한 뜻인데, 왜 기도하는 사람들이 문제와 말썽을 일으킬 때가 많습니까? 기도를 많이 할수록 좋지 않음에도 하나님께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육신의 부모도 자녀에게 할 수 있는 대로 좋은 것으로 주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쁜 것을 주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까닭일까요? 보통, 기도를 많이 한다는 기준은 시간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이 길면,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합니다. 기도하는 시간이 길지 않으면 기도를 많이 안 한다고 말합니다. 이 기준도 전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좀 부족해 보이지 않습니까? 단순히 기도하는 시간만 길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짧으면 안 좋아하실까요?
만약 시간만으로 기도를 판단하면, 마태복음 6장 7,8절에서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어긋납니다. 말을 많이 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길어야만 응답을 받는다는 생각이 하나님을 모르거나, 다른 신을 믿는 사람들의 계산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기도하는 시간만으로 응답을 결정하지 않으십니다.
이를 보면, 신앙인들 중에 기도를 많이 하면서도, 신앙생활을 이상하게 하는 까닭을 알 수 있습니다. 하루에도 몇 시간씩 기도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말썽과 분란을 일으키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시간은 길지만, 기도하는 내용과 범위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도에는 크게 두 가지가 포함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을 묻고 듣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에 잘 나와 있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더불어 우리에게 오늘 필요한 양식과 이웃과의 관계의 문제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를 많이 하지만, 물어야 할 것을 묻지 않고, 묻고 싶은 것만을 위해 기도하는 교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뒷전이고, 내 소원, 내 바람, 내 기도만 들어달라고 오래 기도합니다. 몇 시간 기도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는 않고, 내가 바라는 것들만 위해 기도하니,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 나오겠습니까? 이런 기도를 많이 한들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하고, 성장하겠습니까? 이 때문에, 기도를 많이 할수록, 교회에 분란과 문제를 일으키고, 손해만 되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도, 기도하고 응답을 받긴 했지만, 온전한 기도를 드리지 못 한 다윗의 모습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에게 필요한 일을 하나님께 기도해서 응답을 받는 믿음의 사람입니다만, 동시에 부정적인 답이 내려올 것으로 예상된 것은 하나님께 기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그 동안 억울한 일을 당하고, 쫓기던 어려운 때가 지나고, 이제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계획을 펼쳐가기 위해 가장 먼저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겼습니다. 그곳에 여부스 민족이 살고 있었는데, 좋은 작전을 펼쳐서 빼앗고, 그곳을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 수도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본문 17절에서는 다윗이 블레셋 민족을 무찌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블레셋 민족은 이스라엘 민족과 끊임없이 싸운 민족입니다. 사사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이 전쟁에서 패하고 법궤를 빼앗긴 민족이 바로 블레셋입니다. 이곳은 다윗이 싸워 이겼던 거인 골리앗의 고향이기도 하고, 다윗이 사울의 핍박을 피하다 도망한 곳이기도 합니다. 또 사울을 피해 도망하다, 살기 위해서 미친 사람처럼 행동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블레셋은 이스라엘과 인접해 있었고, 많은 갈등과 전쟁이 이어졌던 곳입니다. 이처럼 오랫동안 싸우며 이스라엘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던 블레셋은 결국 다윗에 의해 점차 힘을 잃고,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내에서도 블레셋이 두 번이나 침략했습니다. 이에 다윗은 19절에서 하나님께 블레셋과의 전쟁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여쭈었습니다. 이기도록 하겠다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나가서 싸워 이겼습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지만, 블레셋 민족이 재정비한 후 다시 22절에 공격해 왔습니다. 다윗은 다시 23절에 하나님께 어떻게 싸울 것인지를 여쭈었고, 하나님께서는 어떤 작전을 펼쳐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해서 블레셋을 물리쳤습니다.
이것만 보면 다윗의 믿음과 기도가 어떤 것 같습니까? 믿음이 대단해 보입니다. 이제 막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었으니, 할 수만 있으면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고 자랑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철옹성처럼 버텨왔던 시온 성까지 빼앗고, 수도를 옮기는 작업까지 멋지게 해냈으니, 자기 능력을 자랑하고, 자기 지혜를 더 드러내고 싶을 때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싸움을 처음 대하는 사람처럼, 하나님께 묻고, 그대로 따릅니다. 이미 한 번 이겨서 기세가 잔뜩 오를 만함에도, 다시 쳐들어온 블레셋을 맞아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묻고, 말씀하신 대로 따라 이겨냈습니다. 이 과정을 보면, 다윗의 믿음과 겸손함이 대단해 보입니다.
문제는 블레셋과의 전쟁 이야기 앞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본문 13절부터 16절까지, 다윗이 많은 첩과 아내들을 두었고, 거기에서 여러 자녀들이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헤브론에서 올라온 후에”라는 구절을 보면,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된 후 새로 맞이한 아내와 첩이 여럿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만 해도 다윗이 여러 여인들을 두었다는 뜻이죠?
그런데 사무엘하 3장 2-5절에도 다윗의 여섯 아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 모두 배가 다른 형제였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 즉 유다지파만 다스리던 왕이었을 때 이미 최소 6명 이상의 아내와 첩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옮긴 후, 즉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었을 때, 본문 13절 말씀처럼, 다시 여러 아내와 첩을 두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삼천 년 전이니, 절대 권력자가 많은 여인들을 거느리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주인공이 다윗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한 남자와 한 여자로 가정을 이루도록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아브라함, 야곱처럼 믿음의 사람들도 두 사람 이상의 여인들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하나님의 질서를 어긴 것이지, 이를 하나님이 허락하셨다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이 큰 믿음과 용기를 가진 좋은 사람이었음에도,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어기고, 여러 아내를 취하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다윗처럼 믿음이 좋은 사람이 왜 이처럼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났을까요? 무엇보다도 다윗은 여인을 취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싸움과 전략에 특출한 능력을 갖추었음에도, 싸움을 앞두면 마치 무능한 사람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하나님께 기도로 여쭈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행동했지만, 여인의 문제에 대해서는 한 번도 하나님의 뜻을 여쭈지 않았습니다. 기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전쟁은 생명이 결정될 만큼 크고 중요하지만, 배우자를 만나고 선택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인가요? 전쟁이 생명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그러나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도 이와 별반 다를 바 없이 크고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을 배우자로 맞이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바뀌는 경우를 우리는 수없이 보고 겪고 있지 않습니까? 좋은 사람을 만나면, 삶이 풍요로워지고, 행복으로 채워집니다만, 반대로 나쁜 사람을 배우자로 맞이하게 되면, 인생 자체가 망가지지 않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보면, 여인들을 취하는 게 별것 아니라서 다윗이 기도하지 않았다는 말은 좋은 설명이 되지 못 합니다.
자기를 죽이려 끊임없이 쫓아오는 사울을 두 번이나 살려준 믿음, 그리고 전쟁의 결과와 방법마저 하나님께 기도했던 신실함을 보면, 다윗이 여인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여쭈지 않은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부하실 것을 다윗이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반대하시고,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다윗은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질서의 하나님이시고, 한 남자와 한 여자로 가정을 이루게 하시는 질서를 세우신 하나님이, 다윗이라고 해서 여러 여인을 두도록 허락하시겠습니까? 그렇게 여러 여인을 취해 복을 받게 허락하시겠습니까?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40년을 다스리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기간에 가장 큰 위기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자기 아들의 반란 때문에 급히 피신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반란을 일으킨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배다른 형제자매간의 관계 때문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뜻조차 묻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한 일 때문에, 자신은 아들의 위협을 피해 도망가야 하는 비극을 맞이해야 했고, 가정과 나라가 무너질 수 있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여러 여인을 취하는 게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고, 하나님께 기도로 물어봤자 분명히 거부하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의 결과는 절대 복이 될 수 없습니다.
다윗은 자기 욕망과 정치적인 목적 때문에 여러 여인을 취해 가정과 나라를 안정시키고, 자신을 더 높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아들의 반역 때문에 쫓기는 신세가 얼마나 처량합니까? 세상 사람들마저 조롱할 만한 일 아닙니까? 이렇게 대가족을 이루어 번성한다고 여겼겠지만, 이 때문에 오히려 형제끼리 죽이는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부모와 자식간에 싸움을 벌이는 나라가 어떻게 안정될 수 있겠습니까?
이를 통해, 기도를 많이 하는 것보다 기도하는 방법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많은 시간 기도하는 것보다 기도의 내용이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내게 필요한 바를 얻는 것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먼저 구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아는 것도 좋습니다만,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면 행하는 게 먼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기도로 확인하는 일도 꼭 필요합니다만,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나는 일이면, 비록 내게 이익과 기쁨이 되는 일이라 하더라도 포기할 수 있는 담대함이 더 중요합니다. 큰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과 담대함과 순결함만을 하나님은 인정하시고, 복과 은혜로 채워주십니다.
다윗은 분명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거인 골리앗과 싸워 이길 수 있었습니다. 사울에게 쫓기는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고,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분명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고,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얌체 같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거부하실 바를 분명 알기에,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자기 욕망을 위해 선택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좋은 기도의 기준은 시간도 아니고, 간절함의 크기도 아니고, 유불리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순수하게 구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거부하실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내게 이익이 되더라도 과감히 포기하고 물러서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 하면, 기도할수록 해로운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이제 순수한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며 물러서야 합니다. 하나님이 “안 된다” “아니다” “하지 말아라”는 말씀하실 수 있음을 인정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기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런 순결한 기도와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복과 평안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하나님의 결정을 먼저 인정하며 기도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내 욕망과 욕심을 더 채우는 기도가 복된 게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기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다윗처럼 모든 일을 기도로 아뢰나, 더불어 하나님의 뜻이 아닐 때는 과감히 물러섬으로써, 매일 매순간 하나님의 인도를 통해, 복과 평강이 넘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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