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201115)작은 것에도 감사하십시오(마 14장 13-21절)

청명하늘 2020. 11. 15. 14:49

작은 것에도 감사하십시오

 

성경: 마태복음 1413-21(24)

찬송: 401(주의 곁에 있을 때; 457), 588(공중 나는 새를; 307)

설교: 20201115. 주일낮예배(추수감사절)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시간에 주님께 감사하며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대학에서 [심리학]이라는 과목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심리학은 행동과 정신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행동과 생각이 나오게 된 원인과 이유를 밝히는 과목입니다. 책 내용 중에, 아이가 부모로부터 엄청난 상처를 받게 된 사례로 소개된 이야기가 지금까지 기억됩니다. 아이의 생일을 맞아 부모가 생일선물이라며 박스 하나를 주었습니다. 아이는 큰 기대감을 가지고 상자를 열어봤습니다. 그런데 그 상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빈 상자였습니다. 이 아이는 이 일로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되었고, 이후에도 심리적으로 불안과 아픔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부모가 너무 무책임하고도 잔인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차라리 선물을 안 하는 게 낫죠? 생일선물이라며 박스를 받으면서, 아이는 얼마나 크게 기대하고, 또 그 속에 아무것도 없을 때 실망감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걸 보면서, 아이가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었겠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인터넷에 생일선물로 바나나를 받은 아이라는 제목의 짧은 내용이 올라왔습니다. ‘생일선물바나나는 어울리는 조합은 아닙니다. 수십 년 전처럼, 먹고 살기 어렵거나, 바나나 자체를 접하기 어려운 때라면 어느 정도 이해되죠? 하지만 요즘은 바나나만큼 싼 수입과일도 많지 않습니다. 흔하고 저렴하기에 생일선물로 주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그래서 혹시 오래 전 심리학에서 배웠던 내용처럼, 아이에게 큰 상처를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봤습니다. 잠깐 같이 보실까요?

 

어떻습니까? 좀 의외죠? 바나나도 송이 채 준 것도 아니고, 겨우 한 개만 줬는데, 아이의 반응은 좋아 어쩔 줄 모릅니다. 아이가 상처를 받지 않을까 하며 머뭇거리며 봤는데, 좋아하는 아이의 반응 때문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게다가 가족들이 바나나 한 조각을 생일선물로 준 게 아니라고 합니다. 생일선물로 바나나 한 조각만 주었을 때, 아이가 어떻게 반응할까 하는 생각에, 장난삼아 주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좋은 생일선물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아이의 반응을 본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며 여러 댓글을 남겼습니다. “저렇게 사랑스러운 성격을 가지게 하려면 어떻게 키워야 하냐?” “귀엽다,” “천사다는 말이 대다수였습니다. “작은 거 하나도 저렇게 소중해하는 모습이 나를 반성하게 만든다는 말도 있었고, “나였으면 울면서 등으로 거실 청소했을 것이다는 재밌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또 몇 사람은 아이가 진짜 선물을 받았을 때의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저도 아이의 모습을 한참 바라보면서, 작은 선물, 어쩌면 선물이라고 보기조차 어려운 것을 받고도 저렇게 좋아하는 아이라면, 정말 좋은 선물을 받으면 어떤 모습을 보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할 수만 있으면 아이가 좋아할 만한 큰 선물을 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선물을 받는 입장에서는, 꼭 갖고 싶은 것, 또 가치고 크고 귀한 것일수록 기쁨도 커집니다. 그렇다면 선물을 주는 입장에서 언제 가장 기쁠까요? 무엇보다도 그 선물을 받는 사람이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이죠? 아무리 크고 좋은 것으로 선물해도, 받는 이가 시큰둥하거나 싫어하면 기분 좋을 리 없습니다. 반대로 정말 작은 것임에도 진심으로 기뻐하고 좋아한다면, 주는 입장에서도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할 수만 있으면 더 좋은 것, 더 좋아할 만한 것으로 선물하고 싶어집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작은 선물을 받았음에도, 아이가 그처럼 기뻐한 까닭이 무엇일까요? 다른 무엇보다, 가족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있기 때문이죠? 만약 잘 모르는 사람이거나, 싫어하는 사람이 생일선물로 바나나를 주었다면, 별로 좋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무시당했다며 싫어할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아이는 가족을 철저히 믿고, 또 사랑합니다.

 

또 다른 까닭을 들라면, 아이가 욕심을 크게 부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이라고 욕심이 모두 작은 건 아니죠?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욕심도 커지는 경우도 물론 있지만, 어린 아이들도 욕심의 종류가 다를 뿐, 큰 욕심을 부리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바나나 하나 받고 기쁘고 좋아한 아이는 욕심이 크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나나에 대한 욕심이 컸다면, 한 조각이 아니라, 몇 송이를 달라고 졸랐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 보면,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을 향한 굳은 믿음과 큰 사랑을 가져야 하고, 더불어 욕심의 그릇을 줄여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이 사실을 확실히 믿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에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더 좋은 것을 바라며 기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또 기뻐하고 감사하기 위해서는 욕심의 그릇은 줄여야 합니다. 인간의 욕심에는 끝이 없죠? 이를 쉽게 확인할 방법이 있습니다. 돈에 대한 욕심이 가장 크죠? 사람의 욕심에도 끝이 있다면,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돈을 가진 사람들은 돈에 욕심을 안 부리겠죠?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요?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사는가요? 돈을 더 벌기 위해서, 지금도 돈 버는 일에 힘쓰죠? 사업을 확장하기도 하고, 돈이 안 되는 사업은 없애거나 넘깁니다. 우리나라 최고 부자만 그런 게 아니죠? 세계에서 돈이 가장 많은 사람이 매일 매순간 가장 많이 고민하고, 위해 힘쓰는 것도 돈을 더 버는 일일 것입니다.

 

세계에서 돈을 가장 많이 버는 사람도 여전히 더 많은 돈을 위해 힘쓰는 것만 봐도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크고 끝이 없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보면, 욕심과 욕망을 줄이지 않으면, 기뻐할 수도 없고, 감사할 수도 없습니다.

 

이는 오늘 본문 속에서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 이상을 먹이신 이적으로서 오병이어 이적으로 불립니다.

 

세례 요한이 헤롯의 악행을 항의하다가 결국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께서는 외딴 곳으로 가셨는데, 소문을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계신 쪽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낮엔 그나마 괜찮았는데 저녁이 되자, 그 많은 수를 어떻게 먹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수천 명이 모일 수 있는 자리는 인가에서 멀리 떨어졌습니다. 요즘처럼 교통수단이 발달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쳐 주시고, 귀신을 쫓아내신다는 소문을 듣고 몰려든 사람이니, 대부분 가난하고 어려운 형편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대로 보내면, 종일 굶을 수도 있습니다. 이들의 형편을 아시고,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은 떡 다섯 조각, 물고기 두 마리로 이들을 먹이셨습니다.

 

오병이어는 한두 사람이 먹을 정도의 식사밖에 안 되는 아주 적은 양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전능하신 분이신지라,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큰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 모두 기록된 유일한 이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만이 아니라, 다른 복음서의 기록을 봐도, 기적을 행하셔서 수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께 감사를 표현한 사람 하나 없습니다. 감사한 사람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보고 놀란 사람조차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여러 가지 이적들이 있죠?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놀라운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이런 이적을 행하실 때마다 사람들은 보고 놀랐습니다. 그리고 이 소문을 듣고 더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오병이어 이적을 보고 놀라거나 감사한 사람이 하나 없다는 사실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당시 예수님께 몰려든 사람들은, 예수님이 음식을 미리 준비하신 거라 생각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음식이 어디에서 왔는지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조차도 이를 보고 놀라거나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것도 큰 능력입니다. 하지만 오병이어 이적은 훨씬 큰 이적 아닙니까? 그럼에도 왜 그 모두가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무엇보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이 크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몰려온 많은 사람들의 이유가 분명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거나 하나님의 아들로서 믿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한 가지 자기들의 필요를 채워 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정말 사랑했다면, 이들의 행동은 분명 달라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다면, 자기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이후에도 예수님과 함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몰려든 이들 모두는, 자기들의 욕심과 필요가 채워지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아들로서도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가까이서 예수님의 이적을 확인했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들은, 군중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도 않았습니다. 한 가지 세상적인 욕심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 앞에 세례 요한을 죽인 헤롯의 생일 이야기가 나옵니다. 헤롯은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여겼습니다. 밉고 싫었지만 함부로 죽이지 못 하다가, 많은 손님들이 몰린 자기 생일을 맞아 세례 요한을 처형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적을 보면서도 너무 무감각해진 까닭을, 헤롯의 생일잔치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이나 이적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헤롯의 잔치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습니다.

 

오병이어는 너무나 소박한 음식입니다. 우리로 보면, 밥과 김치 한 가지 정도입니다. 이에 반해 헤롯의 잔치 자리는 권력의 크기만큼 화려하고 귀한 음식들로 가득합니다. 값으로 따지면, 헤롯의 잔치에서 몇 명이 먹은 값이 오병이어 이적을 통해 수천 명이 먹은 값보다 더 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감사하지 않고, 놀라지 않은 까닭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헤롯의 화려한 궁전과 잔치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헤롯이 베푼 음식에 시선을 고정하고 보니, 오병이어는 아무 것도 아니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수천 명의 군중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잊고 있는 게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적을 베푸신 곳에는 생명과 소망이 있고, 헤롯의 잔치 자리는 죽음과 절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함께하시고, 베푸신 자리는 소박하다 못 해 초라한 자리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으면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는 자리입니다. 헤롯이 베푼 자리는, 화려하다 못 해 넘치는 자리지만, 그러나 헤롯과 함께할수록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헤롯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영원한 죽음에 가까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죽인 사람이 살아나고, 활동한다는 소식을 듣는 것부터 이미 죽음에 가까워진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베푸신 자리에 함께한다는 사실은 실망하고 초라해지는 일이 아니고, 오히려 감사와 기쁨이 넘칠 일입니다. 영원한 소망을 가질 만한 일입니다. 아무리 맛있고 좋은 음식을 먹어도, 아무리 좋은 술을 마셔도, 몇 시간이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것은 영원히 배고프지 않고, 다시는 마르지 않는 생명수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푸시는 자리에 함께하는 것 자체가 감사할 만한 자리고, 또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올 한 해의 모습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오병이어의 자리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염병으로 시작되어서, 전염병으로 지금까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되고 있다고 하지만, 언제 끝날지, 어떻게 끝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어디 전염병만 고통을 주었습니까? 올 여름처럼 장마가 오래 계속된 적도 없었습니다. 다른 때보다 두 배나 계속되었고, 매일같이 비가 내렸습니다. 햇빛을 보기 어려웠습니다. 비가 자주 오고, 해가 제대로 안 뜨니 농작물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 했습니다. 연이은 태풍을 세 차례 맞았습니다. ‘어렵다’ ‘힘들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사나?’와 같은 생각들이 많이 들 수밖에 없는 해입니다.

 

그럼에도 지금 우리는 살아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불평과 불만조차도 못 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지금 이런 생각과 계산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살아 있다는 것이고, 감사할 만한 일이고, 그래서 다음을 기대할 만한 것 아니겠습니까? 또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영원한 생명과 약속이 보장받게 되니, 불평과 원망과 좌절할 게 아니라,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하고, 기도할 일 아니겠습니까?

 

조금 부유하지 못 하면 어떻습니까? 조금 소박한 밥 먹으면 어떻습니까? 비싸고 귀한 고기와 생선을 못 먹으면 어떻습니까? 조금 덜 거두면 어떻습니까? 몸이 조금 더 약해지면 어떻고, 조금 더 세월을 보내면 어떻습니까? 여러 어려움이 있어도, 우리 욕심을 다 채우지 못 해도, 우리 앞날에는 주님이 함께하시는 영원한 생명과 소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할 일입니다. 이렇게 작은 것에도 기뻐하고, 감사하고, 기도하면, 바나나 하나에 기뻐한 아이에게 더 크고 좋은 선물이 준비된 것처럼, 하나님은 분명 더 크고 좋은 것으로 베풀어 주십니다. 더 큰 기쁨과 감사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올 한 해 여러 어려움을 겪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만, 그러나 이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고, 추수감사절을 맞아 더 감사하고, 그래서 더 큰 은혜와 소망을 누리며 사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