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선한 도구로 사십시오
성경: 사무엘하 17장 1-14절(구 490쪽)
찬송: 88장(내 진정 사모하는), 335장(크고 놀라운 평화가)
설교: 20210725.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닭을 키우기 시작한 지도 벌써 3년가량 되었습니다. 키우는 수가 많지도 않고, 기간도 특별히 길다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키우기 전 세운 계산과 계획과는 너무 다른 결과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키우기 전에는 계산이 아주 쉬웠습니다. 30마리를 키워 알을 얻기 시작하면, 하루에 20개가량의 알을 얻을 수 있고, 한 주면 4,5판을 얻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 정도면 또 암탉이 알을 품고 부화시켜서, 더 이상 병아리를 구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충당되겠다고 계산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키워 보니, 예상하지 못 했던 문제들이 참 많습니다. 사료 값은 약 6개월 사이에 세 번이나 올랐습니다. 사료 값은 계속 오르는데, 닭이 먹는 양에 버금갈 만큼 수많은 참새들이 먹어댑니다. 갈수록 참새 수는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달걀은 기대하고 예상했던 수준의 1/3정도에 불과하고. 그나마 잘 낳을 때가 이정도입니다. 너구리가 닭을 잡아먹는다는 사실은 전혀 예상하지 못 했습니다. 들짐승으로부터 닭을 지키라 가져다 놓은 개가 오히려 닭을 여러 마리 해친다는 사실도 전혀 계산하지 못 했습니다. 암탉이 알을 품고 부화하면 대부분 병아리가 나온다는 예상과는 달리,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처음 세웠던 계획과 판단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흔히 ‘성공’이 ‘원하는 대로 이룸’을 뜻합니다. 애초에 닭을 키워 수를 늘리고, 알을 많이 얻는 목적을 가졌으니, 크게 실패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 부수적으로 닭을 키우는 거라 괜찮지, 이런 수준과 능력으로 생계를 위해 닭을 키웠다면 크게 망한 일입니다. 만약 수천 마리, 수만 마리를 키우면서, 이 정도 비율로 잃고 손해가 크다면,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폭삭 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고와 노력을 쏟아붓는 것만이 언제나 성공을 보장하지는 못 합니다. 계획대로 이루어지고, 계산대로 얻기 바라지만, 우리의 바람과 기대와 달리 이루어지는 일들을 수없이 겪곤 합니다.
흔히 성공과 실패를 결과물 하나만으로 판단하곤 하지만, 그러나 가치가 언제나 결과 하나만으로 판단되는 건 아닙니다. 결과에 따라 성공 여부가 나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도하고 노력한 것 자체가 성공에 버금가는 가치를 갖는 일도 있습니다. 또, 이와는 반대로 아무리 많은 결과물을 얻어내도, 결국 실패일 수밖에 없는 일들도 있습니다.
만약 돈 하나만을 위하는 사람이, 시간과 수고를 투자했으나, 돈을 벌지 못 했다면 실패라 할 수 있습니다. 시간과 수고에 비해, 많이 거두었다면 성공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돈이라는 결과물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나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라는 바 목적을 이루지 못 해도, 그런 과정에 함께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성공에 버금갈 만한 가치를 갖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일본에 의해 강점되었을 때, 독립과 해방을 위해 여러 운동과 시도를 펼쳤습니다. 해외에 사람을 보내, 일제의 만행을 알리기도 했고, 일본의 주요 인사를 저격하기도 했습니다. 또 대표적으로 1919년 3월 1일에 만세 운동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노력과 시도가 모두 성공하지도 못 했고, 이런 노력 때문에 해방이 되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해방 하나만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945년이 되어서야 일본이 항복 선언을 했기 때문입니다.
몇 달 전에, 부유하게 사는 친일파 후손들의 노력을 칭찬하고,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대충 살아서 가난하다는 발언을 내뱉은 이가 있습니다. 아무리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세상이라 해도, 정신 나간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으로서의 최소한의 양심과 의식조차 없는,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이의 막말입니다.
그러나 사람다운 생각과 기준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누가 해방을 위한 노력과 시도가 실패한 역사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힘으로 해방을 이루지 못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과정과 노력과 시도가 쓸 데 없는 일이라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시도와 노력을 통해, 나라를 빼앗긴 절망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최고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가치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와 정반대되는 상황도 많습니다. 결과물을 얻은 것에 따라 칭찬을 받지도 못 하고, 시도하고 함께했다는 이유만으로도 비난과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경우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지난주에 한 중학생이 살해되는 안타까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성인 두 사람이 집으로 들어가서 살해했는데, 두 사람 중 하나는, 자신은 범행에 가담하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 있기만 했다고 변명했다고 합니다. 물론, 직접 범행을 저지른 사람이 더 나쁘고, 처벌도 크게 받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범행에 가담하지 않고, 그저 함께 있기만 했다는 사람에게는 아무 죄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성과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 일, 시도와 함께한 것만으로도 칭송받을 만한 일, 반대로 비난과 처벌을 받을 일이 있다면, 무엇을 선택하며 노력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무엇을 향하고, 노력해야 하는지 분명해집니다. 계획한 대로 이루어져도 좋고, 계획대로 안 되어도 좋은 일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서로의 방향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의 행보가 등장합니다. 아히도벨과 후새입니다. 아히도벨은 뛰어난 머리로, 판세를 정확히 판단하고, 가장 좋은 전략을 펼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본래 다윗에게 정책을 자문해 주는 자리에 있었으나,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키며 부르자 반역 세력에 합세합니다.
이 과정을 보면, 아히도벨은 야망이 대단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목적을 위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르는 모습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밧세바의 할아버지이니, 족보로 보면, 다윗의 처 할아버지가 됩니다. 자기 손녀가 왕비가 되고, 살아 있음에도, 압살롬의 세력으로 합류합니다. 게다가 다윗의 자문관이었음에도, 반역한 압살롬의 세력이 커지자, 며칠 전까지 주군으로 섬기던 다윗 왕을 뒤로하고, 압살롬의 편에 설 만큼, 자기 이익과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아히도벨의 이런 특징은, 반역 세력과 함께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왔을 때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압살롬이 세력을 키우고, 권력을 확실히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냐고 묻자, 압살롬에게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하라고 권합니다. 압살롬에게는 서모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아히도벨이 제안한 방법은, 부모와 자식 사이, 가족 사이에서는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죄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마땅히 죽이라 하실 만큼 큰 죄로 여기시며 싫어하십니다. 아히도벨이 이를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아히도벨은 자기가 꿈꾸는 권력을 얻기 위해 압살롬에게 조언해 행하게 합니다.
아버지 다윗의 후궁들을 아들인 압살롬이 범하게 함으로써, 권력이 압살롬에게 향했음을 드러냈지만, 이 때문에 다윗과 압살롬은 더 이상 화해할 수 없는 강을 건넜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히도벨 역시 자기 손녀인 밧세바, 그리고 손녀사위인 다윗과도 다시 볼 수 없는 관계로 만들었습니다.
야망을 위해 잔혹한 짓도 마다하지 않는 아히도벨과 정반대인 후새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후새는 다윗의 형편과는 상관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충성했습니다. 다윗의 권력이 대단할 때도 충성했지만, 다윗으로부터 더 이상 얻을 것이 없을 때에도 변함없이 충성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남아서, 압살롬의 세력이 무엇을 하고, 무슨 계략을 세웠는지 알아서 전해 달라는 다윗의 말을 들었을 때, 후새는 이에 철저히 복종합니다. 압살롬 편으로 온 것처럼 거짓 행세하며, 다윗에게 상황과 계략을 전하는 역할을 충실히 다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드디어 아히도벨과 후새의 전략 대결이 펼쳐지고, 위험을 무릎쓰고 예루살렘에 남은 후새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압살롬에게 아버지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하도록 조언하고, 이 일이 끝나자 아히도벨은 곧 바로 다음 작전을 펼칩니다. 압살롬에게 군사 만 이천 명을 데리고, 피난길에 오른 다윗 세력을 따라가 다윗만 죽이자고 제안합니다.
압살롬은 반역을 일으키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큰 계획들을 세우고, 사람을 모으고, 세력이 커지자 반역을 선포했고, 공격을 펼칩니다. 하지만 다윗은 반역을 예상하지 못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 이틀 사이에 반역 소식이 전해지고, 급히 피난길에 올랐으니, 군사들을 제대로 정비할 수도 없었고, 예루살렘에서 멀리 도망하지도 못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군사를 몰고 가서, 다윗 왕의 목숨만 빼앗으면, 나머지 군사들도 모두 포기하고 압살롬에게로 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가능성과 효율성으로 보면, 이보다 좋은 작전도 없습니다. 성공이 보장되는 작전이고, 여건도 충분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압살롬 편으로 돌아선 것처럼 행세한 후새가 이 작전을 반대합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에게 대든다’는 말처럼, 다윗 세력을 몰아치면, 싸움 실력과 경험이 풍부한 군사들이 죽기 살기로 싸울 것이고, 피해가 커질 수밖에 없으니, 전국의 군사들을 모두 모아서, 다윗 왕을 공격하자고 합니다. 전국의 군사를 모으려면, 당연히 시간이 많이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날 밤 다윗을 공격하면, 다윗이 피하지도 못 하고, 멸망당한다는 사실을 후새도 알았습니다. 후새가 보기에도 아히도벨의 작전은 완벽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멀리 피해, 세력을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이런 작전을 말했습니다.
아히도벨과 후새가 세운 작전은 정반대였고, 그 결과는 오늘 본문 뒤에 나오지만, 계획의 성공 여부를 떠나 이 두 사람의 세운 계획과 가치를 살펴보면 어떻습니까?
먼저, 대단한 책략가로서 모두에게 인정받은 아히도벨은 어떻습니까? 아히도벨의 계략에 대해 오늘 본문 앞 16장 23절에서 “그 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 아히도벨의 모든 계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그와 같이 여겨졌더라”고 평가됩니다. 계획과 계략이 얼마나 잘 맞고 뛰어났던지,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 행한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모두로부터 인정받을 정도로 대단한 아히도벨의 계략인데,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요? 아히도벨이 세운 계략이 결국 버림받았습니다. 하지만 만약 계략이 모두 성공했다고 생각해 봐도,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되는 계략입니다. 계획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았지만, 그 계획대로 모두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결국은 철저히 실패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히도벨이 세운 계략에 따라, 다윗 왕을 죽이고, 압살롬이 나라를 완전히 장악했다고 생각해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아히도벨로서는 자기 작전이 잘 맞아떨어져서 잠깐 기쁠 수는 있지만, 그러나 남는 건 상처와 후회뿐입니다. 좀 더 큰 권력을 위해, 자기 손녀와 그 가정을 고난과 멸망으로 이끌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자기 아들이나 다른 가족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결국 아히도벨이 세운 계략은 성공해도 나쁘고, 실패해도 나쁜, 최악에 불과합니다. 아히도벨은 하나님이 나쁘게 이용하신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뛰어난 작전임에도, 철저히 실패하게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후새의 시도와 계략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후새를 통해 다윗을 지키시고, 회복시켜 주셨지만, 혹, 후새의 계략과 노력이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만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옳은 일을 위해 위협을 감수하고, 자기를 희생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후새는 실패해도, 이미 승리하고 성공한 길을 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길, 하나님과 함께하는 길,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이루어 주시는 길을 갔기 때문입니다. 후새가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 이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향해 걸어가야 할 길은 아히도벨처럼 성공해도 망하는 길이 아니라, 후새가 걸어간 것처럼, 이루어지지 않아도 성공한 길이어야 합니다. 이루어져도 결국 후회와 멸망만 남는 악한 도구가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아도, 그것 자체만으로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만한 선한 도구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 길만이, 원하는 바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우리의 삶에서 언제나 성공하는 길입니다.
우리 모두는 바라는 대로 모두 이룰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갑니다. 계획한 바대로 만들고 이루는 경우보다, 원하는 바는 얻지 못 하고, 바라지 않는 결과를 받을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이처럼 언제나 우리의 계획과 소원대로 삶을 만들어 갈 수 없다면, 삶의 방향을 더 지혜롭게 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한 도구가 되면, 우리의 계획대로 이루어져도 복되고 좋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이미 하나님의 칭찬과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악한 도구가 되어, 원하는 바를 이루며, 돌이킬 수 없는 수렁에 빠지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하고 복된 길입니다. 아히도벨은 하나님의 악한 도구로 사용됨으로써,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난 능력이 오히려 멸망으로 이끄는 지름길이 되고 말았습니다. 후새는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 사용됨으로써, 실패와 성공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과 복을 받았습니다.
바라는 바를 모두 이루어도 실패한 아히도벨, 반대로 결과와는 상관없이 이미 은혜와 복의 길을 간 후새의 선택과 삶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인정하실 만한 선한 도구로 살아감으로써, 모든 순간에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사랑으로 삶을 복과 은혜로 이끄는 복된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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