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210808)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과 헌신(삼하 18장 1-8절)

청명하늘 2021. 8. 8. 13:43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과 헌신

 

성경: 사무엘하 181-8(492)

찬송: 436(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461(십자가를 질 수 있나)

설교: 20210808.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2000년대 초에 방영되어 큰 인기를 끈 상도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최고의 부자 임상옥이라는 실제 인물을 다루는 내용인데, 여러 가지 재미와 인물을 더한 작품입니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긴장되고, 그만큼 시청률이 높은 장면은, 청나라에 홍삼을 팔러 갔을 때입니다. 요즘이야 인삼, 홍삼이 워낙 흔해져서 쉽게 구하고 먹을 수 있었습니다만, 당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귀하고 비쌌습니다. 드라마에서는 가장 좋은 홍삼 한 근은 현재 가치로 2천 만원이 넘었다고 말합니다. 당시 상단에게는 다른 품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중이 크고, 홍삼 거래에 상단의 사활이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입니다.

 

주인공은 엄청난 수고를 들여 가장 좋은 홍삼을 만들어, 청나라 약제 시장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고려인삼이 워낙 귀하고 또 비싸지자, 청나라 상인들끼리 담합합니다. 보통 때에 거래되던 가격의 1/3을 제시합니다. 이 정도면 상단으로서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손해를 입습니다. 그냥 홍삼을 그대로 가지고 돌아오는 일은 더 손해인지라, 어쩔 수 없이 손해를 보고 판 이들도 있습니다.

 

주인공은 청국 상인들의 부당한 담합을 깨뜨리기 위해 고심을 계속합니다. 그러다 큰 위기를 만날 때 열어보라며 스승이 전해준 글자를 떠올리고, 확인해 보니, 오직 죽을 사()’ 한 글자만 적혀 있습니다. 다른 설명이 전혀 없습니다. 글자의 뜻은 쉽지만, 절체절명의 기로에서 어떻게 해야 살 수 있는지에 대한 해결책으로서는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몇 시간 고민하다 의미를 깨달은 주인공은, 아랫사람들에게 홍삼을 모두 마당에 꺼내놓고, 장작까지 준비하라 시킵니다. 장작에 불을 지피고, 거기에 자기들이 가져온 홍삼을 던져 태우기 시작합니다. 한 근에 수천 만원 하는 홍삼을 수십 근 태우자, 담합을 맺은 청국 상인들이 놀랍니다. 조선에서 가져온 홍삼은 가격은 비싸지만, 자신들이 재배하고 만든 홍삼과는 비교할 수 없이 품질이 높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대로 두면, 자기들의 담합 때문에,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홍삼이 모두 불탈까 두려워 결국 자기들의 담합을 풉니다. 이미 타버린 홍삼까지 감안해, 본래 거래되던 가격보다 훨씬 더 높은 값으로 전부를 구입합니다. 이 때문에 중소 상단에 불과했던 주인공의 상단은 조선 최고의 부자가 됩니다.

 

여기에서 주인공이 이용한 전략은 사생결단(死生決斷)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죽든 살든 뒤를 생각하지 않고 끝장을 보려는 전략입니다. 만약 여기에서 주인공이 지금의 손익과 나중을 생각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상인들의 담합을 깨뜨릴 수 없어, 크게 손해를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죽기를 각오한 이들만큼 무섭고 강한 사람도 없습니다. 나중을 생각하면,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나중을 위해 지금의 위험을 무릅쓰려 하지 않습니다. 지금 모두를 쏟아붓다 자칫 실패하면, 후유증과 어려움은 너무 커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전략은, 절대적으로 불리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주로 이용됩니다. 항복하고 포기함으로써 당하는 어려움이나, 싸우다 실패해 당하는 어려움이나 비슷하다면, 뒤를 생각하지 않고 싸우면, 그나마 이길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커지기 때문입니다.

 

역사 속에서 죽기를 각오해 싸우는 경우들이 적지 않습니다. 불리한 상황에서, 일부러 바다를 등짐으로써, 더 이상 물러설 곳을 차단하고 싸운 배수진’(背水陣)도 사생결단의 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 민족의 위인인 이순신장군이, 12척으로 왜적의 133척에 맞서며, 부하들에게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고, 살고자 하면 반드시 죽는다고 전하고, 결국 왜적을 무찔렀던 전략 역시 이런 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기 나중을 생각하지 않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움으로써, 절대 불리한 싸움을 이기는 모습이 오늘 본문에서도 나오고 있습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 때문에 급히 성을 떠났습니다. 아히도벨이라는 사람이 세운 전략 때문에 큰 위기가 있었지만, 후새와 또 각자 자기 자리에서 충실히 감당한 여러 손길들을 통해 위기를 넘깁니다. 그리고 군대를 정비하고, 두 세력이 본격적인 싸움을 치르게 됩니다.

 

이때 다윗과 압살롬 두 세력 중에 어느 쪽이 많고 강했을까요? 양측의 정확한 세력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만, 몇 가지 정황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압살롬은 시간을 들여 반란을 준비한 후 실행에 옮겼습니다. 반란을 일으켰다 실패하면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압살롬 세력은 다윗 세력을 이길 수 있을 만큼 충분하고, 또 준비되어 있습니다.

 

또 반역 소식을 듣고, 다윗이 지체하지 않고, 성읍과 왕궁을 버리고 떠난 사실을 통해서도, 압살롬 세력이 우위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보통 성 안에서 지키는 일이, 밖에서 공격하는 일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리합니다. 그럼에도 다윗이 성읍을 지키려 하지 않고 급히 떠났으니, 압살롬의 세력이 그만큼 강하고, 수가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절대 불리한 상황에서, 다윗 세력이 이길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뿐입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지 않으면, 그 결과가 어떨지 다윗과 그 군사들은 분명 알고 있었습니다.

 

이에 반해, 압살롬의 군사들은 방심합니다. 자기들은 수도 많고, 또 시간을 두고 준비해 왔으니, 이길 수 있다며 자신만만합니다. 자기들이 강하니, 다윗이 그 군사들과 성읍을 버리고 도망했다는 계산도 곁들어졌습니다. 게다가 압살롬은 전국에서 군사들까지 더 모아들였으니, 압살롬 자신과 그 군사들로서는 방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이들의 예상과는 달랐습니다. 많은 군사가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준다고 여겼던 압살롬 세력이 오히려 크게 지고 말았습니다. 6절부터 싸움의 결과를 기록해 놓았는데, 압살롬 군사들이 2만 명이나 죽었습니다. 그런데 무기에 찔리거나 베여 죽은 사람보다, 수풀에서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고 말씀합니다. 싸움의 승패가 사람의 힘과 기술에 따라 결정되지 않고, 하나님의 선택과 계획에 따라 나뉘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군사로 살아가는 우리가 사방에 가득한 적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길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죽음을 각오할 만한 단단한 믿음과 각오로 싸움에 임해야 합니다. 우리가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고, 충분한 여력이 있으면, 특별한 노력과 다짐이 없어도 괜찮을 수 있습니다. 싸움터와 다를 바 없는 우리 삶의 현장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나가 싸우면 이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중에, 마주할 수밖에 없는 고난과 아픔을 모두 이겨낼 만큼 강하고, 준비되고, 많이 가진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덜 가진 사람도 있고, 더 가진 이들도 분명 있습니다만, 그러나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만큼 강한 이들은 없습니다. 어느 부분에서는 충분해 보이면, 다른 쪽은 턱없이 부족하고 약한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물질로 인해 어려움을 많이 겪습니다만, 그렇다고 물질을 많이 가진 이들은 고난과 아픔을 겪지 않고 삽니까? 돈 걱정은 안 하더라도, 그 외의 수많은 문제로 어려움을 겪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다든지, 자녀나 가족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습니다. 또 돈과 건강과 가족으로부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하더라도, 또 다른 문제들로 고통을 겪습니다. 이리저리로 얽히고설킨 문제 하나 없이 사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생사를 건 싸움터에 나가면 질 수밖에 없을 만큼, 모두 약하고 부족합니다.

 

이처럼 나약하고 부족한 우리가 실패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입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길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절대 불리한 다윗과 그 군대가 죽음을 각오하고, 맞서 싸우러 가는 것처럼, 우리도 단단한 각오로 모든 어려움과 두려움과 염려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다윗과 그 군대는 압살롬 세력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약하고 부족했습니다만, 그러나 죽음을 각오하고 맞서 싸우자 결국 승리했습니다. 이들의 굳은 다짐 때문에, 없던 능력이 갑자기 생겨서가 아닙니다. 본문에서 압살롬의 군사들이 오히려 수풀에서 죽은 이가 더 많았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그 싸움에 개입하시고, 다윗 세력으로 이기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압살롬 세력을 버리시고, 다윗 군사들과 함께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다고, 우리가 한순간에 대단한 능력자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싸움에 개입하신다는 뜻이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그래서 결국 이기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배울 수 있는 두 번째 내용은, 나중이나 사정을 두지 않고,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다는 뜻은 곧 우리 각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각오로 맞서 싸운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처럼 희생을 이야기하는 곳도 별로 없습니다. ‘자기 십자가,’ ‘자기희생,’ ‘한 알의 밀알,’ ‘헌신등 다양한 표현을 이용하지만, 자신의 안위와 편위와 성공을 기준으로 삼지 않고, 더 큰 목적을 위해 자신을 버린다는 의미는 같습니다. 그만큼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중요해서 이처럼 자주 강조되다 보니,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높아졌습니다만, 막상 중요한 자기 손발의 헌신과 수고는 턱없이 가벼워지고 낮아졌습니다. ‘헌신이라고 하면, 1년이나 한 달에 한 번 헌신예배라는 이름으로 예배를 주관하거나 참여하는 정도라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봤자, 행사에 몇 시간 더 참여하는 정도에 그칩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보는 눈과 듣는 귀의 수준은 높아져서, 어느 순간 헌신과 봉사와 수고에 참여하는 사람이 아니라, 남의 수고와 헌신을 판단하는 재판관이 되었습니다. “누구는 열심히 봉사한다. 누구는 하는 척만 잘 한다. 누구는 너무 비협조적이다등의 기준을 만들어 놓고, 다른 사람의 행실을 평가하고 점수를 먹이곤 합니다. 봉사와 수고와 헌신의 자리에 자기를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가까운 곳에 있는 목사님이 솔선수범과 교인교육 사이에서 균형 잡기 어렵다는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이 목사님이 그 교회로 새로 부임했는데, 그 동안 듣고 생각했던 모습과는 차이가 많았습니다. 수고하고 헌신하는 교인들이 없다시피 했습니다.

 

교인을 교육하는 일도 목회자의 직무라, 교인들에게 어떻게 이를 알려줄까 고민하다, 직접 솔선수범하기로 했습니다. 교회 마당의 풀을 직접 뽑고, 예배 전에 교회 마당의 쓰레기를 줍고, 빗자루로 쓰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목회자가 이렇게 직접 솔선수범하면, 교인들이 보고, 깨닫고, 함께할 거라는 계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판단과 계산이 완전히 어긋나고 말았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말로만 저희가 해야 할 일인데...” 하며 지나가는 경우는 좀 나은 편이고, “목사님. 수고하십니다.” 혹은 제가 할까요?”라는 말만 남기 지나가는 경우가 대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한 마디 더했습니다. “그 정도는 그래도 양반입니다. 더 심한 교인들은, 청소가 안 된 곳들을 알려주거나 지적하게 됩니다.”

 

웃으며 한 말이었지만, 많은 교회들의 실제 모습입니다. 헌신과 봉사와 수고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사실은 귀로 들어 아는데, 자신이 직접 함께하고, 수고하고 애쓰겠다는 다짐은 없고, 남의 모습을 평가하고 지적하는 일만 잘 하는 교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설교로만 헌신과 수고를 말할 뿐, 삶으로 옮기지 못 하는 목회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뒷짐 지고, 남의 봉사와 수고를 평가하고, 지적하는 이들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복 주신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남을 더 높이고, 내가 더 수고하고, 헌신할 각오로 참여해야 합니다.

 

다윗과 그 군사들 속에서 바로 이런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다윗은 군사들과 함께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전장에 나가 싸우겠다고 말합니다. 싸우는 실력과 경험이 많은 다윗이 나가 싸우면, 함께한 이들에게도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사들은, 압살롬의 군사들이 다윗 왕만 노릴 터이니, 차라리 안전한 곳에 머물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왕의 목숨이 자기들 만 명의 목숨보다 귀하다고 합니다.

 

목숨이 귀하기야 군사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왕의 목숨도 하나고, 군사들의 목숨도 하나뿐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백성들과 함께하려 자기 목숨을 내놓고 전장으로 가려 하고, 그 군사들은 자기 죽어도, 다윗 왕만은 살아야 한다며, 자기들이 사망의 위협이 가득한 전장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왜 절대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있던 다윗과 그 군사들이 이기게 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칼과 창이 아니라, 오히려 숲 속에서 더 많은 압살롬의 군사들이 죽은 까닭을 알 수 있습니다. 서로 자기가 먼저 수고하고, 헌신을 다짐하는 다윗과 그 군사들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할 방향과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십니다. 철저한 믿음과 다짐으로 수고하고 애쓰되, 남을 희생시키고, 자신은 안전한 자리에 머무는 게 아니라, 각자 자기가 먼저 수고하고, 희생하며 사는 길입니다. 이것이 불리하고 어려움 많은 이 세상에서, 이기고 복되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입니다.

 

불리한 상황에 처했음에도, 죽음을 각오할 만큼 단단한 믿음과, 서로 먼저 희생하고 헌신하겠다는 각오를 통해 승리한 다윗 세력의 모습과 그 결과를 마음에 새기고,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모습으로 선택하고, 어려움에 맞서며, 헌신과 수고의 자리에 함께함으로써, 크신 능력으로 도우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체험하고, 승리하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