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분을 허락하신 하나님
성경: 사무엘하 17장 15-29절(구 491쪽)
찬송: 490장(주여 지난밤 내 꿈에), 315장(내 주 되신 주를)
설교: 20210801.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수영장에 가서 수영을 몇 개월 배운 적이 있습니다. 수영장에서 예상과 전혀 달랐던 점이 하나 있습니다. 수영장은 여러 칸으로 나뉘었죠? 이를 ‘레인’이라 하는데, 레인을 구분하는 부표물이 있습니다. 정확한 명칭을 알아내지 못 했는데, 부표가 예상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수영을 할 때는, 물안경을 써서 눈을 뜹니다. 하지만 물안경 안쪽에 성에가 끼거나, 물방울이 맺혀서 방향과 사물을 파악하기 쉽지 않습니다. 머리를 물속에 넣고 좀 가다 보면,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손과 발을 열심히 젓다 보면, 의도치 않게 방향이 틀어지며, 이 부표물에 부딪히곤 합니다.
그런데 부표가 스폰지처럼 부드러운 재질로 되어 있으면 괜찮은데, 모든 수영장도 똑같은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다녀본 수영장들은 모두 아주 딱딱한 플라스틱 재질로 되어 있습니다. 손과 발을 열심히 젓다가 이에 부딪히면 많이 아픕니다. 자칫 타박상을 입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차라리 수영장에 레인이 없으면 안 되나? 물만 채우고, 원하는 자리에서 수영하도록 만들면, 레인을 만드는 비용도 아낄 수 있고, 수영하다 부표물에 부딪혀 다치는 일도 없을 텐데...’하는 생각을 합니다.
비용과 부상이 생길 수 있음에도, 왜 레인을 나누고, 시설물을 설치하겠습니까?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각자의 자리를 나누지 않고, 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선수들이 서로 얽히고설킬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는 바른 방향으로 가려 해도, 옆 사람으로부터 방해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을 방해하게 됩니다.
또 다른 이유는, 불필요한 힘을 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리가 정해지지 않으면, 서로 좋은 자리를 이용하려 하겠죠? 또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불필요한 힘과 시간을 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과정에 힘과 시간을 쏟다 보면, 정작 꼭 필요한 데는 힘과 시간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아예 이런 문제를 막으려 수영장마다 부표물을 달고, 레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다른 사람을 방해하지 않게 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도록, 또 힘과 시간을 불필요한 데에 쓰지 말고, 목표한 일을 잘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쓰시는 방법도 이와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은 교회라는 수영장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이 수영장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어진 사명을 향해 곧 바르게 나아갈 수 있도록 각자의 레인을 만드셨습니다. 교회에서는 이를 ‘직분’이라 부릅니다.
교회 내에서, 직분 때문에 여러 갈등과 문제가 일어나곤 합니다. 대부분은 직분간 갈등이거나, 중직을 맡고 싶은데, 그렇지 못 해서 생기는 문제들입니다. 이럴 때마다, ‘차라리 직분이 없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하죠. 차라리 직분이 없으면, 교인들 모두가,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일들을 맡아 할 수 있습니다. 직분으로 인한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생각과 계산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번거롭고, 복잡한 직분을 만드신 까닭이 있습니다.
만약 교회 내에 직분이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목사, 장로, 권사, 안수집사, 서리집사 등의 직분이 없이 교회가 운영되면 어떨까요? 직분으로 인한 갈등은 줄어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직분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문제들이 일어나고, 효율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는, 생각하는 방향과 방법이 다르다 보니, 일이 서로 꼬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사람은 야외 화장실을 먼저 짓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은 사택부터 지어야 한다며, 다른 사람이 지은 화장실을 모두 허뭅니다. 누구는 교회를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돈과 시간과 수고를 들여 나무와 꽃을 심었는데, 또 누군가는 열매 맺는 나무가 좋다며 다른 사람이 심어놓은 관상용 나무와 꽃을 모두 뽑으면 모두 헛수고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서로 생각하고, 보기 좋은 대로 하다 보면, 무질서해지고, 서로 방해가 됩니다. 교회가 성장할 수도 없고, 발전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질서정연하게, 효율적으로 좋은 결과를 이루도록 직분이 세워졌습니다.
두 번째 까닭은, 각자 할 일을 찾는 데 힘을 낭비하지 말고, 정말 꼭 필요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쓰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 내에 직분과 그에 따른 책임이 정해지지 않으면, 교인들마다 자기가 무엇을 하고, 어떻게 일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서로 갈등이 커질 수밖에 없고, 여기에 힘을 쏟느라, 정작, 해야 할 일, 꼭 필요한 일을 하지 못 하게 됩니다. 교회로서도 손해고, 신앙인 개인으로서도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손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문제와 낭비를 없애고, 질서정연하게 일하고, 또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도록 교회 안에 직분이라는 자리를 구분해 주셨습니다. 직분이라는 책임과 자리에 따라 일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를 오해하고 착각하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직분의 모양과 책임의 크기를 생각하지 않고, 계급으로 여깁니다. 서리집사보다는 권사와 안수집사가 높고, 장로는 그 위고, 목사는 더 높고, 담임목사는 가장 높다고 여깁니다. 계급으로 여기니, 높은 직분을 받으려 하고, 받으면 좋아합니다. 낮은 직분이면 싫어합니다. 더 높은 직분을 주지 않았다며, 심하면 교회를 비난하거나 떠나기도 합니다.
회사와 군대에서는 직위와 직급과 계급으로 나뉩니다. 높고 낮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높고 낮음이 없이, 책임의 모양과 방향이 다르기에 ‘직분’입니다.
직위와 직급과 계급으로 나뉘는지, 아니면 직분에 따라 나뉘는지에 따라 보상이 달라집니다. 직위와 직급과 계급으로 나뉘는 곳에서는 높은 자리일수록 큰 보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직분으로 나뉘면, 보상은 어떤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고, 책임과 사명을 어떻게 얼마나 감당했는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회사와 군대는 지위와 계급으로 나뉘는 곳들이죠? 회사에서 사장과 사원 중에 누가 더 많은 보상을 받을까요? 당연히 사장이 많이 받죠. 일은 누가 더 많이 할까요? 거의 틀림없이 사원이 일을 훨씬 더 많이 합니다. 사장은 일은 적게 하는데, 훨씬 더 큰 보상을 받고, 사원은 일은 훨씬 더 많이 하면서 보상은 덜 받습니다. 군대에서도 일을 하는 양이나 종류보다 계급에 따라 보상이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우리에게 보상하실까요? 어떤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 상을 주십니까? 아니면 어떻게 일하느냐에 따라 보상하실까요? 요한계시록 2장 10절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는 말씀, 마태복음 25장 21절의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등을 보면, 하나님은 맡은 책임을 다하는 사람에게 상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자리가 아니라, 사명과 충성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에는 직급과 계급과 지위가 없습니다. 오직 직분으로 충성과 불충을 나누십니다. 이를 기억하면, 우리가 무엇을 향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확실해집니다. 더 나은 자리, 더 높은 자리를 찾고, 차지하려는 데에 힘을 낭비하지 말고, 각자 자신이 맡은 자리를 알고, 그에 충성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이 기준에 따라 살며 힘쓰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만들어집니다. 반대로 이 기준에 어긋나면, 능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결국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오늘 본문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한 두 사람 아히도벨과 후새, 그리고 이들이 세운 전략과 그 결과가 나옵니다.
아들 압살롬의 반역 때문에 급히 피신한 다윗은 압살롬 세력의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후새를 심어놓습니다. 후새는 다윗에게 충성한 사람이지만, 압살롬 편인 것처럼 위장합니다. 압살롬 편에는 전략에 특출난 아히도벨이 있었고, 압살롬은 아히도벨이 하는 말들을 잘 따랐습니다.
아히도벨은 다윗 세력이 쉬지 못 하도록 곧 바로 공격해 다윗만 처치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조언합니다. 하지만 후새는 다윗을 살리기 위해 시간을 끌 수 있는 전략을 펼치자고 합니다.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후새의 계략이 더 좋아 보였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압살롬에게 재앙을 내리게 하시려 했기 때문이라 설명합니다.
오늘 본문은 다음의 상황인데, 후새는 아히도벨이 세운 계략과 자신이 이를 어떻게 막았는지를 다윗에게 전합니다. 후새가 여종을 보내 성 밖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그만 압살롬 세력에게 발각되고 도망합니다. 이때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한 여인이 이 두 사람을 우물에 숨겨주고, 또 지혜롭게 우물 위를 덮개를 놓고, 또 그 위에 곡식을 널어두었습니다. 우물에 덮개만 있다면, 의심이 가서 덮개를 열어보기 쉽겠죠. 하지만 덮개에 곡식을 널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그곳엔 숨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게 됩니다. 이 여인의 지혜로 인해 중간에서 연락을 전하던 두 사람은 무사히 다윗에게 소식을 전하였고, 다윗도 함께한 모든 사람과 무사히 안전한 곳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다윗을 살리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힘을 모으는데, 누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까? 아히도벨의 계략을 막는 후새의 역할도 중요하죠. 성문 밖에서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의 역할도 꼭 있어야 합니다. 이들에게 소식을 전해준 여종도 필요합니다. 두 사람을 숨겨준 여인의 행동과 지혜가 없었으면 어땠겠습니까? 역시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과정에서는 그 누구 한 사람, 역할이라도 없었으면, 모든 작전과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만큼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역할을 맡은 여러 사람들이 나오는데, 이들 모두가 하나님의 역사를 만드는 데 꼭 필요한 조각이었습니다. 후새처럼 싸움의 가장 앞자리에서 목숨 걸고 싸우는 조각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조각 하나만으로는 크고 아름다운 작품이 완성될 수 없습니다. 중간에서 다리를 놓아주는 조각도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또 후새의 말을 전하는 여종이나, 두 사람을 숨겨준 한 여인처럼,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을 만큼 가장 뒷자리에서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사람도 꼭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보는 기준으로는, 후새의 역할이 가장 크고, 또 그만큼 하나님이 인정하실 것 같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으로는 후새는 물론, 여종과 여인까지 모두 칭찬과 복을 받을 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인정하시는 방법입니다.
이에 반해,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기준을 보여주는 아히도벨의 모습과 그 결과 역시 본문에 등장합니다.
아히도벨은 다른 사람이 감히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계략을 세웠습니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키며 가장 먼저 영입할 만했습니다. 이처럼 대단한 능력을 가진 아히도벨이 23절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자기 작전을 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쉽게 납득되지 않습니다. 아히도벨의 능력은 모두가 인정합니다. 그런데 다른 이유도 아니고, 최고 권력자가 자기 작전을 한 번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삶을 포기했습니다. 아히도벨은 자기의 자리와 사명을 직분으로 보지 않고, 계급과 지위로 봤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히도벨은 언제나 최고의 자리를 원했습니다. 가장 높은 자리, 모두에게 인정받는 자리만 원했습니다. 아히도벨은 이를 향해 살았습니다. 압살롬이 불렀을 때도, 자기의 능력과 자리를 보장해줄 거라는 기대감에 합류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말한 대로 실행되지 않고, 다른 이의 계략과 비교되고 결국 거절당했으니, 아히도벨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 계략은 언제나 무조건 인정받고, 자기 자리는 가장 높아야 한다는 교만에 가득한 사람인지라, 압살롬의 거부는 죽음을 선택할 만큼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오늘 본문 앞 14절의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는 말씀을 보면, 사명과 책임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욕망을 향해 살며 교만한 이들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싫어하시고, 어떻게 버리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와 복과 평안을 누리는 길은 분명합니다. 아히도벨처럼 자기 욕심과 성공과 자랑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맡은 바 책임을 위해 수고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에는 더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는 없습니다. 직분이 크다고 좋아하시고, 직분이 낮고 하찮다고 싫어하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아무리 작고 사소해 보이는 역할이라 해도, 그 자리에서 충성을 다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높이 인정하시고, 칭찬하십니다. 넘치는 복과 은혜로 채워 주십니다. 우리가 향해 나아갈 방향이 바로 이러합니다.
아히도벨은 가장 높은 자리에 서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힘으로써,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후새를 비롯한 여러 일꾼들은,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결국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이름과 높이가 중요하지 않고, 직분과 사명이 중요함을 다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히도벨의 교만과 비참한 최후, 그리고 이와는 달리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기억하고,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함으로써,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역사에 함께한 이들의 모습을 기억하고, 우리 각자에게 주신 사명과 자리에 감사하고, 충성함으로써,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날마다 받는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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