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210815)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순종(삼하 18장 5-33절)

청명하늘 2021. 8. 15. 15:18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순종

 

성경: 사무엘하 185-33(493)

찬송: 487(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 324(예수 나를 오라 하네)

설교: 20210815.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전세계로 유행한 전염병 때문에 1년 늦게 열렸던 올림픽이 지난주에 막을 내렸습니다. 여러 종목에서 선수들이 경쟁하는 가장 큰 대회지만, 올림픽에는 선수들만 나오는 게 아니죠. 각 종목마다 반드시 감독이 있습니다. 선수는 승패를 직접 겨루고, 감독은 선수들이 이기거나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도록, 작전을 세웁니다. 또 종목에 따라, 선수들의 순서를 정하고, 선발과 교체까지 결정합니다.

 

그러면 감독은 어떤 선수를 좋아할까요? 물론, 선수의 실력이 승패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니, 잘 하는 선수를 좋아하겠죠. 또 승리하고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도록 짜낸 감독의 지시를 알고 잘 따르는 선수를 좋아합니다. 실력도 좋으면서, 감독의 지시를 잘 따르는 선수를 감독이 가장 좋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실력과 지시에 잘 따르는 이 두 가지 중에 어떤 면이 더 중요할까요? 실력은 좋은데, 감독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선수를 좋아할까요? 아니면 실력은 별로인데, 감독의 지시를 알고 따르는 선수를 더 좋아할까요?

 

2년 여 전에 이를 잘 알려주는 경기가 있었습니다. 축구로 보면, 현재 세계에서 가장 활성화되고, 또 좋은 선수들이 많이 모인 곳 중 하나가 영국입니다. 영국 프로축구는 좋은 선수들이 많고, 또 그만큼 엄청난 대우를 받습니다.

 

여기에서 최고의 팀들이라 할 수 있는 두 팀이 대회의 결승에서 만났습니다. 경기가 진행되던 중에 한 팀의 골키퍼가 부상을 당해 감독이 교체를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골키퍼는 자신이 충분히 뛸 수 있다며 이를 거부했습니다. 할 수 없이 이 골키퍼는 경기가 끝날 때까지 뛰었습니다.

 

이 경기에서 승부차기까지 가서 패하긴 했습니다만, 감독의 교체 지시를 거부한 골키퍼는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만약 선수가 바뀌었으면 결과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만, 경기 내용만 보면, 골키퍼 때문에 패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골키퍼가 아니었으면 승부차기까지도 가지 못 하고 패했을 가능성이 더 클 정도로 실점할 수 있는 몇 차례의 위기를 잘 막았습니다.

 

감독의 지시를 거부한 이 골키퍼는 경기가 끝나고 어떻게 되었을까요? 비록 경기는 졌지만, 잘 막고, 끝까지 경기에 뛰려는 열정을 인정받아 칭찬을 받았을까요? 아니면, 감독의 지시를 거부한 일에 대한 질책을 받았을까요? 비록 경기 내용은 좋았지만, 징계를 받았습니다. 영국의 프로 축구선수들은 주 단위로 봉급을 받는데, 한 주의 봉급 정지 처분이 내려졌습니다. 금액 우리 돈으로 무려 3억 원 가까이 됩니다.

 

이를 통해 보면, 구단과 감독이 어떤 선수를 더 좋아하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좋은 실력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는 선수보다, 감독의 지시와 작전을 잘 따르는 선수가 인정받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프로 축구선수,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좋은 선수들이 모인 곳에서는 선수들의 기량 차이는 아주 작습니다. 주로, 실력 좋은 선수들이 먼저 경기에 나서긴 하지만, 그러나 먼저 나선 선수들이 빠져도, 그를 대신할 선수들이 있습니다. 교체되어 들어간 선수는, 앞선 선수의 경기 수준과 크게 차이나지 않을 정도로 잘 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실력을 믿고, 감독의 지시와 작전을 완전히 무시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감독이 좋은 작전을 세울 수 없고, 선수들을 활용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선수들마다 자기 좋은 대로 경기하면, 결국 뒤죽박죽됩니다. 한두 경기는 괜찮을지 모르지만, 이런 모습이 거듭될수록 절대 좋은 성적을 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감독의 교체 지시를 거부한 선수가 아무리 좋은 실력을 보여주었다 하더라도, 이처럼 선수에게는 가장 큰 징계가 내려집니다.

 

큰 성과를 만들어 내는 일보다, 팀을 운영하는 감독의 작전과 지시에 따르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은 세상이라는 운동장을 만드시고, 하나님의 자녀들과 일꾼인 우리를 선수로 세우시고, 하나님의 큰 그림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경영에는 오류나 실패가 없음을 기억하면, 선수인 우리가 각자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하는지 분명합니다. 내가 세운 계획과 판단을 내려놓고, 감독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말씀에 철저히 순종해야 합니다.

 

이런 모습이 오늘 본문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일꾼으로서 무엇을 앞세우며 살아야 하는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다윗이 자기 사람들과 함께 성읍을 떠났습니다. 급히 피하느라 반역 세력에 맞설 수조차 없었지만, 시간이 좀 지나 군사들이 어느 안정되었습니다. 압살롬도 그 동안 전국에 있는 군사들을 더 끌어 모았고, 두 세력이 에브라임 숲에서 싸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압살롬과 함께한 군사들을 버리셔서, 전세가 다윗 편으로 조금씩 기울기 시작합니다.

 

다윗은 군사들을 싸움터로 보내면서 한 가지를 부탁합니다. 본문 5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지휘관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는 말씀처럼, 자기 아들 압살롬의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합니다.

 

지금 다윗이 성읍을 버리고, 멀리 피난한 까닭은,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기 때문이죠. 압살롬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자기 아버지의 후궁들마저 범하는 악행을 저지른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에게는 아들인지라, 군사들에게 압살롬을 마주하게 되면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합니다. 이 당부를 지휘관들만이 아니라, 그곳에 있던 모든 군사들이 들었습니다.

 

싸움이 거세지던 중에, 다윗의 부하들이 나귀를 타고 가던 압살롬과 마주칩니다. 압살롬이 피해 도망하다가 그만 큰 상수리나무의 가지에 머리가 걸리고 말았습니다. 압살롬의 머리가 얼마나 무성했는지, 사무엘하 1426절에서는 그의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연말마다 깎았으며 그의 머리털을 깎을 때에 그것을 달아본 즉 그의 머리털이 왕의 저울로 이백 세겔이었더라고 기록되었을 정도였습니다. 요즘 주로 사용되는 단위로 하면, 2.3kg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랑거리였던 무성한 머리털이 가장 위급한 상황에서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그만 상수리나무의 가지에 머리털이 걸리고, 타고 있던 나귀는 도망하고 말았습니다. 압살롬은 상수리나무에 매달려 오도가도 못 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이 모습을 다윗 군사 중 하나가 먼저 발견합니다. 압살롬을 쉽게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군사는 압살롬을 죽이지 않고, 군대장인 요압에게 먼저 보고합니다. 그러자 요압은 오히려 이 군사를 꾸짖습니다. 보고하러 오는 동안 혹시 압살롬이 도망했을까 하는 염려 때문입니다. 압살롬을 죽이고 왔으면, 크게 포상했을 거라는 이야기까지 곁들입니다.

 

요압의 이 말을 들은 이 군사는 본문 12,13절에서 내가 내 손에 은 천 개를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가 들었거니와 왕이 당신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삼가 누구든지 젊은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 하셨나이다.”고 답합니다. 결국 요압은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군사 몇 명을 데리고 급히 가서, 그때까지 나무에 매달려 있던 압살롬을 죽입니다.

 

압살롬을 대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정반대입니다. 한 사람은 군대장관으로서 최고 지휘관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은 지위만큼이나 행동은 정반대입니다.

 

이름 없는 군사는 압살롬을 해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압살롬을 처치했으면, 크게 포상한다는 요압의 말을 듣고서도, 은 천 개를 받아도 압살롬에게 손대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 군사가 자기 삶을 쉽게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마저 거부한 까닭은 단 한 가지입니다. 자신의 주군인 다윗 왕의 명령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더 갖고, 더 누리는 삶보다, 왕의 명령을 따르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요압은 달랐습니다. 군대장관으로서, 왕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이었지만, 왕의 명령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압살롬을 해치지 말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왕의 부탁이자 명령에도, 급히 군사들을 몰고 가 죽인 까닭은 단 한 가지입니다. 자기 권력과 지위가 더 단단해지고, 자기 삶이 편해지기 때문입니다. 요압은 오직 자기 목표와 목적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왕의 명령마저 언제든지 뒤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왕의 마음에 맞는 사람일까요? 누가 더 충성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압살롬이 결국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다윗의 행동이 본문 마지막 33절에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압살롬의 죽음 때문에, 다윗은 너무나 큰 슬픔에 빠졌습니다.

 

이를 통해 보면, 충성이 업적에 따라 좌우되지 않고, 왕이 원하는 바를 이루고, 마음을 기쁘게 함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지위의 높고 낮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오직 왕의 의도를 알고, 이에 따라 자기의 판단과 계산과 이익을 순순히 내려놓는 자세가 곧 충성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위와 성과로 보면, 요압과 무명의 한 군사는 하늘과 땅 차입니다. 요압은 군대장관이고, 그 동안 다윗의 편에 서서 엄청난 성과를 만들고, 공적을 세웠습니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다윗 왕 다음의 자리에 오른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름 없는 한 군사는 감히 왕에게 직접 보고할 수 없을 정도로 지위가 낮은 사람입니다.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을 만큼, 그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사람입니다. 당연히 오늘 본문 외에서는 언급조차 안 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업적이 많고, 지위가 높은 요압이 다윗의 명령에 순종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요압이 다윗의 마음을 기쁘게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다른 업적이 기록되지 않고, 지위마저 하찮은 한 군사는 다윗의 마음을 알았고, 충성했습니다. 요압은 왕의 명령과 당부보다 자기 생각과 판단을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군사는 자기 이익과 판단보다 왕의 당부를 먼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야 하는 우리가 이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쌓은 업적을 보시고 충성이라 말씀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주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그 말씀을 그 어떤 계산보다 앞세워 사는 삶을 충성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1522절에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듣는다는 뜻은 단순히 귀로 듣는 행위가 아니라, 그 말씀대로 따라 사는 모습을 뜻합니다.

 

그런데 많은 신앙인들이 이런 부분에서 실패합니다. 자기 계산을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보다 앞세웁니다. 자기 계산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둡니다. 자신의 계획에 따르면, 훨씬 더 좋은 성과를 얻을 거라 판단합니다. 이런 성향은, 교회에서 직분과 책임이 클수록 자주 드러나곤 합니다.

 

교회에서 어떤 교인이 말썽을 많이 일으킬까요? 신앙생활을 이제 막 시작한 교인이 말썽을 많이 피울까요? 아니면 신앙생활을 오래 한 교인이 말썽을 많이 피울까요? 서리집사, 장로, 목사 중에 누가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을까요? 정확한 통계를 낸 자료가 없습니다만, 이는 거의 상식 수준이라 할 만큼 답은 분명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할수록, 직분이 클수록 문제와 분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거의 대부분이라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고, 또 직분이 클수록 왜 이런 모습을 보일까요? 누가 교회에서 그렇게 하라고, 그렇게 해도 괜찮다고 가르친 경우는 없죠. 그럼에도 마치 약속이라도 되듯, 이런 모습을 보인 까닭은 분명합니다. 교회 질서와 순종보다 업적과 공로를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질서를 지키고, 순종을 담으면, 활동의 폭이 많이 좁아집니다. 절차와 과정이 복잡해지고 어려워지곤 합니다. 할 수 있는 일을 못 하게 되기도 하고,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도 많습니다. 규칙과 질서 안에서 일하느라, 성과를 못 내고, 업적과 공로를 쌓지 못 하기도 합니다. 결국 더 크고 많은 일을 해내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에, 말씀과 질서마저 무시합니다.

 

그러나 제사보다 순종을 바라시고, 제물보다 말씀에 순종하는 자녀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업적과 공로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말씀에 비춰 순종하며 사는 모습을 더 기뻐하십니다. 이는 오늘 본문 속에서 업적을 앞세우며, 왕의 명령마저 거역한 요압의 악행을 다윗이 죽을 때까지 기억하며, 저주하였음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그 부하들에게 철저한 순종을 원한 것처럼, 우리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철저한 순종을 원하십니다. 자기 앞에 부와 명예가 있음에도, 왕의 당부를 가장 먼저 앞세우며 행한 이름 없는 군사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 앞에서, 우리의 모든 것을 뒤로하는 참된 충성을 바라십니다. 직분과 직위와 업적을 쌓아야만 충성으로 여기시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할수록 충성으로 여기십니다.

 

요압과 한 이름 없는 군사의 행동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어떤 자리에 있든, 무엇을 하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음으로써, 충성한 일꾼과 자녀가 받을 수 있는 만복을 매일의 삶에서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