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210822)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삼하 19장 1-8절)

청명하늘 2021. 8. 22. 15:21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성경: 사무엘하 191-8(495)

찬송: 429(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300(내 맘이 낙심되며)

설교: 20210822.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태풍으로 무너졌던 예배당이 지어진 지 벌써 8년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이후에 부임했으니, 예배당을 짓는 과정의 여러 어려움을 겪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예배당과 사택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아쉬움을 넘어 안타까움이 많이 남습니다. 비용과 결과와 효율성까지 생각하면 화나곤 합니다. 그런데 예배당 건축과 관련해 가장 화날 때는, 당시 건축업자가 주위 사람들에게 교회 하나를 지어줬다고 흘리고 다닌다는 말을 들을 때입니다.

 

지었다지어 줬다는 의미가 많이 다르죠. ‘지어 주다라는 말은 건축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비용이나 대가를 받지 않고 짓고, 지은 후에도 별다른 조건이나 보상을 바라지 않을 때 사용됩니다. 기본적으로는 자재비와 인건비를 전혀 받지 않고 지었을 때나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 의미를 아무리 넓게 보더라도, 자재비만 받고, 인건비를 받지 않았을 때조차도 함부로 사용될 수 없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업자는 교회로부터 자재비와 인건비를 받았습니다. 게다가 일을 시작하면서 공사비 전체를 현금으로 받았고, 그것도 정당한 수준을 훨씬 넘어선 금액입니다. 부당하고 부정한 거래가 의심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교회에서는 당시 업자를 통해 얻은 이익이 전혀 없습니다. 멀리서 와서 공사하느라 비용이 많이 들 수밖에 없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훨씬 더 정직하고, 저렴하게, 좋은 자재를 이용해 공사할 업체는 주위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럼에도 굳이 비싸기만 할 뿐, 기술도 부족한 업체를 정했고, 비용은 훨씬 더 지출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지어 줬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만약, 비용은 더 들이고, 기술과 수준은 낮은 예배당을 짓고서 예배당을 지어 줬다고 말한다면, 모든 장사와 사업을 자선사업이라고 해야 합니다.

 

가게에 가서 물건을 사면, 정해진 비용을 지불하죠. 그럼에도 가게에서 고객에게 물건을 주었다고 하지 않고, “팔았다고 합니다. 이 둘을 나누는 기준은 분명합니다.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했는지 하는 여부입니다. 물건이 옮겨지는 행동은 차이가 없지만, 손님으로부터 비용을 받으면 판매가 되고, 비용을 받지 않았으면 기부가 됩니다. 만약 돈을 받고 물건을 팔았으면서도 주었다고 한다면, 세상 모든 가게는 물건을 팔지 않고, 주는 곳이 됩니다.

 

그래서 교회를 지어 줬다는 말이 옳은 표현이 되기 위해서는, 업자는 그로 인한 어떤 이익이나 도움이 없어야 하고, 모든 수혜는 오직 교회뿐이어야 합니다. 교회로서는 그 어떤 비용이나 수고도 들이지 않았는데, 업자가 모든 비용과 수고를 들이고, 희생해서 짓고, 예배당을 이용하는 권리를 교회에 주어야만 비로소 지어 주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로서는 자재와 인건비에 대한 모든 비용을 지불했습니다. 너무 많이 해서 문제지, 업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금액을 적게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건축 과정에서 대부분의 이익을 업자가 받았습니다. 적당한 이상의 금액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현금으로 받았고, 이로 인해 위기 중에 있던 회사가 숨통을 트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자신들이 모두 희생하고 기부한 것처럼 말하고 있으니, 분노할 수밖에 없죠.

 

너무 교활하고, 비겁한 모습입니다. 이런 어리석은 생각과 언행으로 지금까지 유지해 왔을지 모르지만, 절대로 복되고 번창할 수 없습니다. 업자와 회사의 앞날이 답답하고 안타까울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처럼 비겁하고 교만하며, 교활해서, 자기의 이익을 감추고, 마치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선심 쓰며, 희생하는 것처럼 포장한 요압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다윗의 아들인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아버지와 아들이 왕의 자리를 놓고 싸우게 됩니다. 압살롬은 자기의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차지하려 반역을 일으켰지만, 다윗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하면서, 다윗은 부하들에게 압살롬의 목숨만은 지켜 달라고 부탁합니다. 왕이지만 자기 부하들 앞에서 이런 부탁하는 일이 절대 쉽지 않습니다. 적의 수장이 자기 아들이라는 사실도 부끄럽고, 자기 부하들에게 명령이 아닌, 부탁으로 말하기도 체면 깎이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일부러 지휘관들만이 아니라, 모든 부하들까지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이야기했습니다.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고, 하나님께서는 압살롬 편의 군사들을 많이 물리치십니다. 압살롬도 전장까지 나왔다, 싸움이 불리해져 급히 도망하는데, 그만 무성한 머리털이 상수리나무 가지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이를 다윗 편에 있던 이름 없는 군사 하나가 발견하지만, 왕의 당부를 기억하고, 죽이지 않고 군대장관인 요압에게 이를 알립니다. 요압은 다윗 왕의 가장 가까이에 있고, 또 지위가 대단하지만, 왕의 명령이나 입장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요압의 여러 행적을 보면, 오직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지, 아닌지 하나만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옳든 그르든 행합니다. 반대로 손해가 되면, 옳든 그르든 하지 않습니다. 압살롬의 목숨만은 살려 달라는 왕의 당부에도, 압살롬을 살려 두면 자기에게 전혀 이익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주저하지 않고 군사들을 끌고 가서, 나무에 매달려 무방비로 있던 압살롬을 살해합니다.

 

반역 세력의 수장을 물리쳤다는 소식은 모두에게 기쁜 소식입니다. 멀리 떨어져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왕에게 전해 주기 위해 자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다윗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에게는 싸움 결과가 아니라, 아들 압살롬의 생사 여부입니다. 이 때문에 전장에서 소식을 가지고 돌아오는 두 사람에게 압살롬의 생사만 묻습니다.

 

전장 소식을 기다리던 다윗의 반응을 보면, 다윗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압살롬보다 승리를 더 바랐다면, 승리 소식을 들었을 때 기뻐했겠죠. 반대로 승리보다 압살롬을 더 아끼고 기다렸다면, 압살롬의 죽음 때문에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싸움 결과를 가져온 두 사람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싸움 결과보다 압살롬을 걱정합니다. 승리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안정을 되찾을 수 있다는 소식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압살롬의 안위를 묻고, 사망했다는 소식에 통곡하며 슬퍼합니다.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면, 엄청난 환대를 받죠. 그런데 다윗이 얼마나 심하게 슬퍼했는지, “그 날에 백성들이 싸움에 쫓겨 부끄러워 도망함 같이 가만히 성읍으로 들어가니라는 말씀처럼, 싸움에서 이긴 군사들이 패잔병처럼 조용히 들어와야 할 정도입니다.

 

이에 대해 군대장관인 요압이 차라리 부하들이 모두 죽고, 압살롬이 살았으면 기뻐했을 것이라며 다윗에게 항의합니다. 요압의 됨됨이와 행적을 잘 모르면, 요압의 말이 전혀 틀렸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군대장관으로서 다른 군사들의 입장까지 감안해야 하는지라, 중간에서 다윗에게 조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체면을 버리면서까지 압살롬을 살려달라고 부탁한 왕의 당부를 거역한 이는 다른 누가 아닌 요압 자신입니다. 다윗이 이처럼 큰 슬픔에 빠진 까닭은, 요압이 자기 이익을 위해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압살롬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압의 악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제는 대놓고 왕을 협박하는 지경에까지 이릅니다. 7절에서 이제 곧 일어나 나가 왕의 부하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옵나니 왕이 만일 나가지 아니하시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할지라 그리하면 그 화가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하리이다고 합니다. 지금 왕이 슬픔을 거두고, 밖에 나가서 군사들을 격려하고 환대하지 않으면, 모든 군사들이 하나 남지 않고 다윗을 떠나며, 요압 자신도 떠나겠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자신이 지금 다윗에게 큰 아량과 선심을 베풀었다는 속뜻을 품고 있습니다. 자신이 왕 곁에 있어봤자, 자신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데, 오직 왕의 어려움을 감안해 함께하고 있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하지만 요압의 이 말은 크게 잘못되었습니다. 요압이 다윗 곁에 머물러 있는 까닭은, 다윗 왕이나 민족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요압은 절대 그럴 만한 인물이 아닙니다. 오직 자기 이익만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 이익과 목적을 위해서는 왕의 명령까지 언제든지 거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 고난과 어려움 중에도, 다윗 왕 곁에 머물러 있던 까닭도 다름 아닌, 그 길이 자신에게 더 이익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꿔 보면, 다윗 곁에 머무는 것보다 더 출세하는 길이 있다면, 언제든지 떠날 사람입니다.

 

요압이 다윗 왕을 떠나면 어디로 가고, 얻을 만한 이익이 무엇이겠습니까? 왕인 다윗을 떠나면, 다른 민족에게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한두 번도 아니고, 왕마저 무시하는 요압을 누가 받아주고, 군대장관 수준으로 높여주겠습니까? 다른 민족으로 가면, 지금 다윗 곁에서 누리던 수준으로 대접받지 못 합니다. 다윗 곁이기에 요압이 왕을 직접 만나고, 말하고,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떠나면 더 이상 누리거나 받지 못 합니다. 그 누구보다도 요압은 이 사실을 잘 압니다. 그럼에도 마치 자신이 다윗을 위해 희생하고, 그러면서도 아무 대가나 보상을 받지 못 하는 척 포장하며, 왕을 협박합니다.

 

우리의 신앙과 신앙생활에서 요압과 같은 모습이 없는지 살피고 조심해야 합니다. 교회와 더 나아가 기독교 전체에 어려움과 문제들이 많습니다. 그 중 하나가 하나님께 선심 쓴다는 식의 믿음을 가지고, 교회와 목회자를 위해 인심 쓰듯 신앙생활을 이어간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마치 하나님을 위해 믿어주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게 아니라, 교회를 위해 내가 헌신과 수고를 들여 다녀주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교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특히나 요즘처럼 교회 수는 많아지고, 교인은 줄어드는 상황에서 더 자주 보이는 모습입니다. 자기들의 봉헌으로 교회와 목회자가 산다며, 봉헌을 많이 할수록 큰소리치는 경우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을 협박하듯, 교회를 협박하는 듯한 모습은 신앙도, 신앙생활도 아닙니다. 착각이고,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교만이며 오만입니다. 이런 생각과 자세면 그 끝은 분명합니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복과 평안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믿어 준다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뜻대로 안 되고, 힘들고 어려우면 언제든지 하나님을 떠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났을 때, 여전히 다가올 문제와 어려움 속에서 어디다 대고 기도하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언젠가 겪어야 할 죽음을 앞두고, 누구에게 구원과 영생을 바라며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는 삶의 끝자락은 복과 평안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하셔야만 받고 누리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의 수명을 알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만, 평균수명으로 판단하면, 제게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 어디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죽음이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물론 다치고, 몸이 아프고, 장애를 입는 상황은 싫습니다만, 그러나 그로 인한 불편함과 고통 때문이지, 그의 연장선인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내세울 것 없고, 가진 것 없고, 능력 없는 사람이지만, 가장 어렵고 힘든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는 까닭은 단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구원과 영생을 약속하셨고, 하나님의 약속이 참됨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받는 가장 큰 상과 은혜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남들만큼 가지지 못 하고, 배우지 못 했지만, 그런 나를 하나님이 택하시고, 믿음과 소망의 길을 살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셨음을 인정하고, 그 믿음에 따라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면, 그 어디에서나 그 무엇으로부터도 이런 소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비빌 언덕이 하나님 외에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교회가 여러 가지로 부족하고, 어려운 점들이 많습니다만, 그럼에도 교회 밖에 나가면, 교회에서 받는 정도의 관심과 사랑과 기도를 받을 수 없습니다. 교회 밖에서는 눈과 귀와 입을 즐겁게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 기쁨이 과연 얼마나 갑니까? 몇 시간, 잘 해야 며칠도 못 갑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대접을 받고, 관심과 사랑을 받는 까닭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주는 게 아니고, 교회를 다녀주는 게 아니고,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 때문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는 게 아니고, 반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시고, 교회가 우리를 여러 위협으로부터 지키고 돌보고 있습니다. 지금에 감사하고, 기뻐하고, 소망을 가지고 살 이유이기도 합니다.

 

요압은 교만과 착각 중에 살다가, 어리석은 길을 선택하며 살았습니다. 그 결과는 그의 비참한 최후를 통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요압은 어리석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 하며 교만하다, 결국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자신 때문에 왕이 존재한다는 어리석은 생각 때문에 이런 마지막을 맞이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내가 살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어준다는 교만한 생각, 교회 덕분에 내가 소망 가운데 살고 있음을 잊고, 내 덕분에 교회가 있다는 생각을 빠진 결과도 요압과 마찬가집니다. 비참하고, 절망만이 가득한 마지막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안에, 어리석고 교만한 요압의 모습이 있는지 살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믿음과 교회에 감사하며, 이를 소망으로 삼고 살아감으로써, 날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으로, 복되고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