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20220612)안팎이 모두 옳고 좋아야 합니다(왕상 9장 10-28절)

청명하늘 2022. 6. 12. 14:02

안팎이 모두 옳고 좋아야 합니다

 

성경: 열왕기상 910-28(529)

찬송: 400(험한 시험 물 속에서), 502(빛의 사자들이여)

설교: 20220612.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길 빕니다.

 

인터넷에 멕시코 마약 조직의 이야기가 올라왔습니다. 우리나라도 점차 마약 관련 뉴스와 범죄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인데, 우리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나라들이 훨씬 많습니다. 마약이 나라를 지탱하는 주요 사업이 될 만큼 심각하고 일상화된 곳들도 있습니다. 멕시코도 이런 나라들 중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조직이 마약으로 벌어들인 무기로 중무장해서, 경찰이나 군대와 맞서 싸우는 이야기들도 뉴스를 통해 간간히 전해질 정도입니다.

 

이처럼 무자비하고 흉포한 마약 조직을 이끄는 사람이라면, 어떤 모습이 떠오릅니까? 보통은, 덩치 크고, 험상궂게 생긴 남성을 떠올리기 쉽죠. 그런데 21세에 불과한 젊은 여성이 중간 조직의 두목으로서 이끌었고, 이 두목의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가 올라왔습니다.

 

마약과 돈을 만지는 조직을 이끌기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게다가 젊은 여성으로서 이끌기는 말할 필요조차 없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인지, 잔인한 방식으로 조직을 이끌었습니다. 다른 경쟁조직이나, 경찰이나 정부 기관에 협조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자비하게 복수했습니다. 오죽 했으면, 이 두목의 별명이 죽음의 귀부인’(‘Dame of Death’)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느 날 특수부대가 급습했고, 이 과정에서 두목은 총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 중 사망했습니다.

 

마약 조직을 이끌기 위해, 잔인하게 복수하고, 많은 사람을 죽인 이가 죽은 후, 주위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을까요? 이 조직에서 직접 살해한 사람도 많았지만, 피해와 고통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이들이 만들어 내고, 유통하고 판매한 마약으로 인해 생긴 피해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겠죠. 그만큼 해악을 크게 미친 조직의 두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두목이 사망하자, 전혀 다른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이 조직이 지역 사회를 위해 기부와 봉사도 많이 했고, 무능한 경찰을 대신해, 치안에 힘썼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지역 교회가 천국환송예배라는 이름으로 주관한 장례식에는 수많은 주민이 참석해 성대하게 치러졌고, 마약 조직의 중앙본부에서는 유족에게 거액을 위로금으로 전달했다고 합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20201월에 외국 신문에 보도되었던 내용인데, 교회 주관으로 장례식을 치렀는지는 정확한 보도를 찾을 수 없었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입니다. 비록 일부 사람에게는 잔인하고, 악랄한 조직이지만, 일부 지역 사람들에게는 기부와 봉사를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이 조직이 활동한 지역에서는 기여한 바가 훨씬 커서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고, 또 수많은 사람이 찾아와 애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가 어떻습니까? 과연 수많은 사람의 애도를 받을 만하다 할 수 있습니까? 교회가 그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주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할 만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까?

 

유족이 원하면, 교회는 대부분 거절하지 않고 장례식을 치릅니다. 이 경우라면, 교회가 여두목의 장례를 주관했다고 해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만, 그렇지 않고, 그 동안의 수고와 헌신에 감사하고,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교회가 먼저 나서서 장례를 주관했다면 어떻습니까?

 

이에 대해서는, 입장에 따라 두 가지 시선으로 나뉠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로부터 피해를 겪었다면, 마땅히 사라져야 할 조직으로 봅니다. 두목도 사라져 마땅한 사람으로 봅니다. 살아 있어 봤자,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고, 죽을 뿐입니다.

 

하지만 마약 조직과 두목으로부터 여러 도움을 받은 당사자들은 입장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들로부터 받은 혜택과 이익을 먼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약 조직이 세운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학교에서 배웠다면, 오히려 그들에게는 범죄 집단이 아니라, 지역 사회에 기여한 좋은 기업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교회가 범죄 조직의 두목을 단순한 장례식이 아닌,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장례를 치렀다면 이런 이유로 볼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일어날까요? 왜 같은 사람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이처럼 달라질까요? 다른 무엇보다 평가하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약 조직의 두목이지만, 자기들에게는 유익과 혜택을 준 고마운 사람으로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마약 조직이 다른 누구를 해치고, 죽였는지, 또 그들의 범죄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고, 피해를 입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과 가까운 곳만을 기준 삼습니다. 기준을 이렇게 세우면, 마약 조직이 다른 나라, 다른 먼 지역에서 수만 명을 죽이고, 망가뜨렸어도, 자기들에게 피해가 없고, 오히려 작은 도움이라도 받았으면, 마약 조직은 더 이상 범죄 조직이 아니라, 좋은 기업으로 봅니다.

 

하지만 시선을 자기 가까운 곳에 한정하지 않고, 다른 곳, 다른 나라에게 미친 영향까지 생각한다면, 마약 조직이 지역 사회에 많은 돈을 투자하고, 좋은 일을 아무리 많이 해도, 범죄조직으로만 봅니다. 법에 따라 심판을 받아야 하고, 없어져야 할 무리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처럼 안과 밖에 따라 기준이 달라지는데, 그렇다면 신앙생활의 기준은 어떻게 세워야 하겠습니까? 안팎의 모습을 함께 고려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나누어서 판단해야 하겠습니까? 좀 쉽게 보면, 교회 안에서는 열심히 일하고, 섬기고 봉사하는데, 밖에서는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 있다면, 이를 인정하고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비록 교회 안에서의 모습은 괜찮지만, 사회에서의 잘못된 생활 때문에 싫어하고 멀리 해야 하겠습니까?

 

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답과 가르침을 오늘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두 가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10-14절까지는, 솔로몬이 두로 왕 히람과 거래하는 모습을 기록했습니다. 15-29절까지는 솔로몬이 세운 여러 가지 업적을 기록하면서, 이를 위해 솔로몬이 어떻게 일을 진행시켰는지 과정을 덧붙였습니다.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자재가 필요하죠. 그중 하나가 백향목입니다. 이 나무가 많은 나라가 두로라는 지역이고, 히람은 두로의 왕입니다. 그래서 열왕기상 5장에서 솔로몬이 성전건축을 준비하면서, 가까이 지낸 히람 왕에게 백향목과 잣나무 등을 공급해 달라고 제안합니다. 대신 솔로몬은 여러 가지 농산물과 특산물을 히람 왕에게 주고 조약을 맺었습니다.

 

히람 왕은 솔로몬 왕과 맺은 조약대로 여러 자재를 성실하게 제공했습니다. 히람의 협조를 통해, 솔로몬은 성전과 자기 왕궁을 차질 없이 20년에 걸쳐 완성합니다. 또 본문 14절을 보면, 히람 왕이 솔로몬에게 금 120 달란트를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목적했던 건축이 완성된 후 솔로몬은 히람 왕에게 사례하는데, 갈릴리 지역에 있는 성읍 스무 곳을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땅을 본 후 히람 왕은, 13내 형제여 내게 준 이 성읍들이 이러한가 하고 이름하여 가불 땅이라 하였더니라는 기록처럼, 크게 실망했습니다. ‘가불이라는 말은 굳고 메마른 땅이라는 뜻입니다. 솔로몬이 히람 왕에게 준 땅은 말 그대로 굳고 메마른 땅, 쓸모없는 땅이었습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오가는 선물은 어느 정도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또 선물을 받았을 때도, 마음에 들지 않아도 직접 표현하지 않습니다. 이런 관례에 비춰 보면, 솔로몬이 히람 왕에게 준 땅은 기준에 전혀 미치지 못 했습니다. 감히 선물과 답례로 줄 수 없을 만큼 메마르고, 거친 땅이었습니다.

 

14절에 히람이 금 일백이십 달란트를 왕에게 보내었더라는 기록까지 남겼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기록했고, 후손들이 읽고 배우는 내용입니다. 철저히 이스라엘 관점과 기준에 따라 기록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14절의 내용을 추가했으니, 이를 기록하는 입장에서 봐도, 여러 자재를 대고, 금까지 엄청나게 보낸 히람에게 답례로 준 땅으로서는 턱없이 모자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15절부터 기록된 내용에서도, 솔로몬의 이런 성격과 기준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15절에 솔로몬 왕이 역군을 일으킨 까닭은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역군이란 강제 노역꾼을 뜻합니다. 강제로 일을 시켰다는 뜻입니다. 일꾼은 필요하고, 비용은 많이 드니, 솔로몬은 돈을 주지 않아도 되는 노예들을 불러 강제로 일을 시켰습니다.

 

이 과정과 방법이 본문 20-22이스라엘 자손이 아닌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 중 남아 있는 모든 사람 곧 이스라엘 자손이 다 멸하지 못하므로 그 땅에 남아 있는 그들의 자손들을 솔로몬이 노예로 역군을 삼아 오늘까지 이르렀으되 다만 이스라엘 자손은 솔로몬이 노예를 삼지 아니하였으니 그들은 군사와 그 신하와 고관과 대장이며 병거와 마병의 지휘관이 됨이었더라에서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지역을 점령할 때, 그곳에 먼저 있던 민족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하나씩 무찌르고 땅을 점령해 나아갔지만, 끝까지 살아난 민족이 있었는데, 이들이 20절에 나오는 민족들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에게 땅을 빼앗기고, 소수 민족으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시대나 주류가 있고, 비주류가 있죠. 세력을 만드는 무리가 있고, 세력에서 벗어난 약자가 있습니다.

 

20절에 나오는 민족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됩니다. 목숨은 부지했지만, 땅과 재산과 권리를 모두 빼앗겼습니다. 매일 노예로 살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러나 철저히 소외된 약자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권리는 없고, 힘들고 어려운 일은 맡을 수밖에 없습니다.

 

솔로몬은 바로 이들에게 힘들고 어려운 일을 모두 시켰습니다. 이들에게는 별도의 보상이나 임금을 주지 않아도 됩니다. 이들은 솔로몬의 계획과 목표를 위해 이용되었고, 더 이상 쓸모없을 때는 버려도 되는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다수이자, 강자인 이스라엘 사람들은 노예로 삼지 않고, 감독관, 신하, 군인, 지휘관, 기병대 등 권리와 보상이 주어지는 자리에 앉혔습니다.

 

이를 통해, 계산적이고, 편파적인 솔로몬의 성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사랑은 대단했습니다. 자기 사람들을 아낄 줄 알았습니다. 계산도 철저해서, 다른 나라에게는 아주 나쁜 땅만을 골라 주었습니다.

 

솔로몬의 이런 기준과 태도가 어떻습니까? 좋습니까? 나쁩니까? 성경에 이 모습을 기록한 이유가, 우리 역시 솔로몬처럼 자기중심, 우리 중심으로 행동하라는 뜻일까요? 반대로 솔로몬의 기준과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여기고, 다른 모습으로 살기를 바라기 때문일까요?

 

이는 오늘 본문 앞 4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온갖 일에 순종하여 내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이라는 말씀을 기준 삼으면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와 율례의 핵심은 마태복음 712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 소수와 사회 약자에 대한 하나님의 뜻도, 예레미야 75-7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 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는 말씀에서 잘 드러납니다.

 

나의 이익을 더 채우기 위해 남에게 손해를 끼치는 행위를 하나님은 지극히 싫어하십니다. 내가 더 갖고, 더 누리기 위해, 쓸모없는 땅을 주는 모습을 하나님의 율법과 뜻에서 벗어난 잘못이라 말씀합니다.

 

내 사람과 우리 사람만의 이익과 성공을 위해, 나약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만 짐을 지우는 행위를 하나님은 지극히 싫어하십니다. 다른 누군가의 희생과 아픔과 슬픔을 이용해 세워놓은 업적 속에서 하나님은 헌신과 수고를 칭찬하시지 않고, 오히려 약자 속의 눈물과 아픔을 먼저 보십니다.

 

자기 이익, 자기 민족의 부흥과 성장을 위해 행한 솔로몬의 비겁한 계산과, 약자의 희생 위에 세운 솔로몬의 업적과 부흥을 통해, 우리의 삶과 신앙생활을 돌아봐야 합니다.

 

신앙인들 중에도, 솔로몬의 기준과 행동을 닮은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교회의 성공과 부흥을 이룰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해도 된다 여깁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흥과 성공만을 향합니다. ‘나만’ ‘우리만잘되면, 다른 이의 희생과 아픔에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속에서, 하나님은 솔로몬이 행한 두 가지 모두를 율법과 계명과 명령에서 벗어났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과 은혜와 평안을 누릴 수 없는 길입니다. 하나님만이 주시는 복과 은혜와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는, ‘타인을 나누지 않아야 하고, ‘우리너희를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중심의 기준을 넘어서, 모두의 행복과 평안을 위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율법과 계명과 명령을 지킬 수 있고,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와 자기 민족의 이익과 성공을 위해, 편을 가르고, 탐욕을 행한 솔로몬의 잘못을 기억하고, 이웃에게 똑같은 사랑을 베풀고, 더 어렵고 힘든 이들에게도 같은 사랑과 자비를 베풂으로써, 계명과 율법을 지키는 자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넘치는 복과 은혜를 모두 받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