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선택과 행동에 따라 만들어집니다
성경: 열왕기상 11장 14-25절(구 532쪽)
찬송: 406장(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곳과), 302장(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설교: 20220703. 주일낮예배
이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온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함께하길 빕니다.
최근 한 연예인이 자신이 속했던 소속사의 사장을 고소한 사정이 한 프로그램을 통해 방송되었습니다. 소송이야, 언제 어디에서나 쉼 없이 일어나는 일인데도, 특별히 더 많은 관심과 화제를 낳은 까닭이 있습니다. 전 소속사의 사장이 자기 친형이기 때문입니다.
사정은 이렇습니다. 연예인이 30년가량 여러 분야에서 활동했습니다. 유명 연예인들은 일반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수입이 많죠. 오랫동안 활동하고, 또 유명해서 수입이 충분했으면서도, 본인은 정작 경차를 타고 다니고, 수입 모두를 형과 형수가 운영하는 회사에 모두 맡겼습니다.
그런데 어느 계기를 통해 그 동안 모아놓은 재산을 정리해 보니,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동안 이 사람 이름으로 건물을 사고, 보험을 들었다고 하는데, 실제 본인이 받고, 쓸 수 있는 금액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한두 해는 모를 수도 있고, 속아 넘어갈 수도 있지만, 30년 동안 이를 몰랐다는 사실이 쉽게 이해되지 않죠.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가족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은 자신을 속이고, 빼앗으려 한다 생각할 수 있어도, 가족은 절대 그렇게 해서는 안 되죠. 가족이란 자기 손해를 입는 한이 있더라도, 상대의 성공을 위해 애써야 합니다.
형의 부정을 다른 가족이 알지 못 하거나 믿지 못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형이 대부분의 일을 사주를 들어 처리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직원을 뽑을 때도, 면접을 보기 전에 사주를 확인했다고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 무조건 사주를 언급했습니다. “사주를 보니 좋다.” “사주를 보니 안 좋다” 등의 형식으로 일을 처리했습니다.
이 연예인이 작년에 52의 나이에 결혼했습니다. 아주 늦은 나이죠. 그 이유도, 형이라는 사람이 “결혼하면 죽는다.” “결혼하면 집안이 망한다. 너는 혼자 살아야 할 사주다.”라며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몇 년 전에 결혼을 계획했던 사람과 어쩔 수 없이 헤어졌다고 합니다.
아직은 법원의 판결이 나오지 않았고, 또 피해를 입었다고 하는 연예인의 입장만 나온 상황이라 좀 더 시간이 필요해 보입니다만, 이를 들으면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수십 년 동안 속인 사람이 다른 누가 아니라, 자기 친가족이라는 사실이 더욱 놀랍고 무섭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무서운 사실은, 사주를 향한 집착과 맹신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점입니다.
‘사주’란 태어난 연월일시의 네 가지에 따라 삶의 수준과 방향이 결정되어 있고, 이를 예측하거나 대비할 수 있다는 주장을 말합니다. 삶을 예측하기 위해 이용되는 방법은 사주만이 아니죠. 이 외에도 인간은 수없이 많은 방법을 이용했습니다. 하늘의 해와 달, 별을 보고 운명을 알 수 있다고 하는 점성술이 있습니다. 나열해 놓은 카드를 뽑아 이를 해석하면 운세를 점칠 수 있다고 하는 타로도 여전히 유행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수많은 방식이 이용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굿을 통해 신의 뜻과 미래를 알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쌀을 던져 흩어지는 모양새를 통해 점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 외에도 생김새를 통하는 관상이 있습니다. 두개골의 모양으로 성격과 특성 및 운명을 알 수 있다고 하는 골상학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아서 그렇지, 이 외에도 앞날과 운명을 알기 위해 만들어낸 방법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이처럼 미래를 알 수 있고, 대비할 수 있다는 주장은 모두, 살아가는 과정과 내용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생각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앞날이 정해져 있지 않으면, 어떻게 알 수 있고, 어떻게 재난과 화를 피할 수 있겠습니까? 앞날이 이미 정해져 있지 않은데, 무엇을 어떻게 대비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조금 낫지만, 그러나 선택에 따라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여기는 주장들도 적지 않습니다. 조상과 부모로부터 받은 바에 따라 삶이 정해진다는 생각들입니다. 특히 요즘 이런 생각들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대로 살 수밖에 없다고 하며,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로 나누어 부릅니다. 대부분 많이 받아 쉽고, 편하게 살아가는 이들을 향한 부러움과, 자신은 그렇지 못 했다는 아쉬움과 불평 섞인 표현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삶은 태어나면서 이미 정해진 과정을 살 수밖에 없습니까? 태어나는 연월일시에 따라 삶의 방향과 수준과 내용이 대부분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정도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조상과 부모로부터 받은 재산과 조건에 따라 우리가 걸어갈 수 있는 방향과 내용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삶이 언제, 무엇 때문에, 어떻게 정해지거나 바뀐다 여기는 기준에 따라 자세가가 달라집니다. 사주든 관상이든, 혹은 그 무엇으로 보든, 삶이 이미 정해지고, 정해진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고 여기면, 쉽게 포기하게 됩니다. 죽을힘을 다해도 그 무엇도 바뀌지 않는데, 괜한 헛수고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삶이 선택과 행동에 따라 달라지고 만들어진다 여기면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지금 힘들고 어렵더라도,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지금 더 수고합니다. 지금 더 많이 참을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의 시간보다, 더 좋은 앞날을 기대하며, 지혜와 소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솔로몬 왕, 하닷, 르손입니다. 솔로몬은 누구에게나 잘 알려져 있는 사람입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지혜와 부귀영화를 가장 크게 누린 사람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닷과 르손은 솔로몬 왕에 맞서 싸운 적들이고, 이들은 하나님께서 솔로몬 왕을 벌하시기 위해서 세운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솔로몬 왕은 성경에 기록된 인물들 중에서, 부귀영화를 가장 크게 누린 인물이죠. 솔로몬 한 사람 때문에, 온 나라가 부강해질 만큼 지혜와 능력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솔로몬의 아버지는,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들 중에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인물입니다. 그만큼 다윗이 받은 복과 은혜도 대단했습니다. 단순히 왕이 된 정도에 그치지 않고, 나라를 크게 발전시켰고, 더 나아가 후대가 더 잘살 수 있도록 준비까지 모두 마쳤습니다. 솔로몬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왕의 자리를 이어받았습니다. 지금 우리의 기준으로 본다면, 솔로몬은 많다 못 해 넘치는 수준이었습니다.
세상에 왕의 아들로 태어나고, 왕의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것도 자기 아버지는 웬만한 왕이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었으니, 솔로몬은 더 바라거나 필요할 만한 게 없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솔로몬 자신의 지혜와 능력까지 더해져서 인간의 모든 욕망을 채우고 남을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가장 좋은 모든 조건을 갖추고 태어나고, 거기에 훨씬 더 많은 부귀영화를 높였던 솔로몬의 삶이 점차 기울여 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이곳저곳에서 반역이 일어났습니다.
솔로몬을 대적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하닷과 르손이 일어났는데, 이들 모두 철저히 망한 집안 출신이라는 점도 같습니다. 하닷 집안은, 다윗 시대에 망했습니다. 다윗 시대에 이웃 민족인 에돔을 정복했습니다. 남자는 남기지 않고 모두 죽일 정도로 전멸시켰습니다. 그때 살기 위해 도망한 사람들 중 하나가 하닷입니다. 하닷은 자기 땅에서 살 수 없어서, 이집트로 도망했습니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살아가는 과정도 쉽지 않죠. 그런데 재산은 물론 땅까지 모두 빼앗겨, 겨우 몸만 피해야 하는 하닷의 삶이 어땠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에돔을 공격한 이스라엘은 가장 강한 시기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날도 길고 강했는데, 뒤를 이은 솔로몬이 다스린 날만 해도 40년이고, 가장 강했을 때이니, 하닷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자기 나라를 무너뜨린 적이 약해지거나, 잠깐 번쩍하고 사라져야, 다음을 준비하고 기대할 수 있는데, 하닷으로서는 빠져나갈 구멍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르손도 하닷의 상황과 똑같았습니다. 르손 역시 자기 민족이 다윗의 손에 망할 때, 살기 위해 다메섹으로 피하고, 그곳에서 사람들을 모아 겨우 두목질 하며 살았습니다. 르손 역시 낯선 땅으로 피해 살아야 하는 비참한 지경에 처했습니다.
솔로몬이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고 누렸다면, 하닷과 르손은 가장 불리하고 어렵습니다. 솔로몬은 더 이상 욕심내지 못 할 만큼 누렸던 반면, 하닷과 르손은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을 만큼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결국이 어떻습니까? 넘치게 받고, 넘치게 누린 솔로몬은 끝까지 넘치게 누렸습니까? 반대로 피하고 얻어먹어야 했던 하닷과 르손은 끝까지 비참하고 어렵게 살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많다 못해 넘치게 받고, 누리며 맘껏 살았던 솔로몬은 점차 기울어졌습니다. 힘이 강하다 못해, 필요 이상으로 갖추었던 군사력으로는 막을 수 없을 만큼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적들은 강해졌습니다. 하닷과 르손은 점차 회복되는 과정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빼앗겼던 자기 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자기들을 망하게 만들었던 이스라엘과 맞설 수 있을 만큼 강해졌습니다.
솔로몬의 이스라엘이 점차 힘이 빠지고 기울어지고, 반대로 하닷과 르손이 점차 회복하고 강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성경은 오늘 본문에서, 솔로몬과 반대되는 두 사람의 모습을 이어서 기록해 말씀할까요? 각자의 삶은 선택과 행동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말씀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사주든, 운명이든, 유산이든, 혹은 그 무엇으로 표현하든, 이미 정해지고, 받은 대로 살 수밖에 없다면, 솔로몬은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잘되고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이미 망한 나라에서 태어나고, 겨우 목숨이나 연명하는 하닷과 르손은 끝까지 회복되지 못 해야 맞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잘되고 성공하고, 누렸던 솔로몬은 점차 약해졌습니다. 그 동안 넘치게 누렸던 즐거움은 하나씩 빼앗기고 무너졌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향해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복과 은혜를 약속하신 길을 무시하고, 저주와 실패의 길을 선택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부흥과 회복의 조건을 따르지 않고, 좌절과 실패로 이끄는 일들만 행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하닷과 르손의 상황은 회복과 성공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지만, 그럼에도 이들에게는 회복과 성공의 길이 열렸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기준에 따라 살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에 따라 이용되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하닷과 르손이 이제 회복과 희망을 향해 살아가고 있지만, 그러나 이들의 나머지 여정들 역시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서 벗어나, 자기 욕심과 성공만을 위해 산다면, 다시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복이 약속된 대로, 하나님이 주신 길을 따라 살면, 하닷과 르손의 민족은 다시 회복과 부흥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은 누구의 주장대로, 그 무엇으로도 알 수 없습니다. 정해져 있지 않고, 만들어 가는 모양에 따라 바뀌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 각자 무엇을 선택하며,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우리 앞날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정해진 길에 따라 살아가도록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심어주셨습니다. 선택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두셨고,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삶의 수준과 내용이 달라지게 만드셨습니다.
신앙인들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운명론이나 운수나 사주처럼, 정해진 과정을 걷게 된다는 생각에서 멀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착각입니다. ‘기도의 능력자,’ ‘응답받은 자’ 등의 이름을 쓰지만, 앞날이 정해져 있고, 그래서 이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신앙인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우리 삶은 태어나는 시간이나 조건이나 형편에 따라 정해지지 않습니다. 물론, 다른 누구보다는 더 좋은 형편과 조건에서 출발하기도 하고, 반대로 더 어렵고 힘든 형편에서 시작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나중의 모습도 똑같지는 않습니다. 부유한 형편에서 시작했으나, 처참하게 무너지는 경우도 많고, 힘들고 어렵게 시작했으나 나중은 그 누구보다 더 나아지는 경우도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래서 지금 형편이 힘들고 어렵다고, 실망하거나 좌절할 필요 없습니다. 지금 힘겨운 형편 때문에 다가오지 않은 날들을 포기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의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앞날을 포기하기 위한 조건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복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 있는지, 돌아보고 방향을 바로 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더 나은 이후 시간과, 자녀들의 삶을 위해 하나님의 기준에 맞춰 살아야 합니다. 지금 힘들고 어려우면, 하나님이 주신 시간과 기회를, 불만과 원망으로 채우지 말고, 지금 걸어온 시간과 과정을 살필 줄 알고, 더 나은 날들을 위한 과정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야 지난날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다음이 더 복되고 풍족해집니다.
넘치게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서 벗어남으로써, 결국 기울어지고, 실패하는 솔로몬, 철저히 망했으나 다시 기회를 얻은 하닷과 르손의 삶을 기억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형편에 교만하지도, 좌절하지도 말고, 오직 복과 은혜와 생명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날마다 성공과 회복과 소망을 가득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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